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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은의 등장과 인플레이션

은의 역사
  
은(silver)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금보다 은이 더 귀했다. 금은 덩어리 형태로도 발견되고 모래 속에서도 채취할 수 있는 반면, 은은 오직 광석을 가공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유럽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대 10~13 정도로 유지되었다. 기원전 269년 로마에서는 아르젠툼(argentum)이라는 은화도 등장했다.
 

은광석 광산

   
중세 유럽에서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한 갖가지 수입 명품을 사기 위해 금과 은을 지불하면서 금속화폐를 ‘탕진’했다. 특히 은의 유출이 컸다. 은의 유출이 더 컸던 것은 아시아에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유럽과 달랐기 때문이다. 즉 중국인들에게 금, 은, 동의 비율은 1대 10대 1000이라는 관념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어서 이방인들과 교역할 때도 금과 은의 비율이 대략 1대 8~9 정도였다. 따라서 은이 유럽에서보다 상대적으로 고평가되었고 중국을 오가는 유럽의 상인들은 이 점을 이용해서 재정거래(arbitrage)를 취했다. 그들이 가지고 간 수출품은 금을 받고 팔고, 수입품은 은을 주고 사면서 이익을 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 안으로 금이 꾸준히 유입되고 은이 꾸준히 유출되었다. 아시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금화만 유통되고 가치가 높은 은화는 아시아로 퇴장되는 사실은 일종의 ‘글로벌 그레셤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인 중국이 유럽의 화폐제도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중국이 없었다면 유럽의 금본위제도는 보편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3세기 초 오늘날 보헤미아 지역의 요아힘 골짜기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사정이 반전되었다. 이후 남미에서도 금과 함께 은광이 발견되어 1493년부터 1800년까지 300여 년간 은은 금보다 30배 정도 더 많이 생산되었다. 이 물량은 유럽 사회가 물물교환에서 화폐경제로 전환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와 함께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1대 11 정도에서 1대 15 정도로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한편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그들의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함량 미달의 불량주화를 제작하는 일이 늘었다. 오직 스페인만이 남미 식민지에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금과 은 덕분에 불량주화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국제무역에서는 함량을 속이지 않는 스페인 은화가 기축통화 노릇을 했다.
 

인양한 침몰선에서 나온 17세기 스페인은화

   
화폐의 역사로 본다면, 미국의 독립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의 금호와 스페인의 은화가 함께 쓰이던 시절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신생국 화폐제도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1792년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의 주도로 제1차 주조법(Coinage Act)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1대 15로 설정하되 누구든지 이 비율대로 자유롭게 화폐를 주조할 수 있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건국 초기 미국은 복본위 제도(bimetallism)를 추구한 것인데, 자유로운 주조와 교환비율의 유지는 양립하기 힘든 원칙이었다.
  
법률에서 어떻게 정하던,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희소성의 원칙에 따라 바뀐다. 제1차 주조법이 만들어진 직후인 1799년 유럽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대 15.74로 더 상승했다. 나폴레옹전쟁을 앞두고 금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미국은 1834년 제2차 주조법을 통해 교환비율을 1대 15.988로 조정했다. 유럽으로의 금 유출을 걱정해 금을 약간 더 비싸게 평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의 국제시세가 빠르게 하락하고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올랐다. 1대 15.7이었던 금과 은의 국제 교환비율이 1850년대에는 1대 15.3 정도로 낮아졌다. 하지만 정작 금광이 발견된 미국은 종전의 1대 15.988의 교환비율을 그대로 유지했다. 화폐로서의 은 시세가 국제 시세에 비해 저평가되었으니 은을 녹여 물건으로 쓰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스페인과 멕시코 은화가 이미 상당 수준 미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 이후 미국에서는 은화, 즉 소액 동전이 씨가 말랐다. 이런 사태를 해소하려고 1853년 연방정부가 보조 은화를 제작했으나 충분치는 않았다. 일반 거래에서 은화가 쓰이는 일이 줄었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금본위제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지 정확히 10년이 되던 1858년, 이번에는 네바다 주 컴스 토크에서 엄청난 은광이 발견되었다. 미국은 멕시코와 함께 세계 은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고 미국에서 은화는 다시 흔해졌다. 가난한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항상 돈이 부족했던 미국에, 금광과 은광이 발견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광산을 발견할 때마다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춤을 추는 바람에 미국 사회 전체가 엄청난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한편, 금과 은 시세가 널뛰듯이 변동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노예제도였다. 캘리포니아는 원래 멕시코 땅이어서 건국 초기에는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텍사스 지역의 소유권을 두고 시작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미국이 싱겁게 승리하면서 미국은 멕시코 국토의 3분의 1을 빼앗았다. 이때 캘리포니아의 소유권도 미국으로 전환되었다. 공교롭게도 땅주인이 바뀌자마자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쏟아지고 이 지역에 사람들이 몰렸다. 노예제도를 두고 남북이 팽팽하게 긴장하던 시절,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신생 주 캘리포니아의 유권자가 늘어남으로써 건국 이후 계속되어온 북부와 남부의 팽팽한 세력균형이 개지고 국가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두 지역의 반목은 1861년 마침내 남북전쟁으로 분출되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재정사정이 빠듯해진 연방정부는 1861년 12월 금태환을 중단하고 1862년 2월 에는 법정통화법(Legal Tender Act)을 통해 금이나 은으로 교환되지 않는 종이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1863년에는 사상 최초로 소득세를 걷기 시작했다.(그 이전에는 재산세, 거래세, 관세만 있었다.) 세금을 아무리 더 걷어도 전비는 부족했다. 그래서 국채 발행을 늘렸는데 국채가 잘 팔리게 하려면 국민이 이것을 강제로 사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863년 국법은행법(National Bank Act)이었다. 이 법에 따라 연방정부가 허가한 상업은행들은 자본금의 3분의 1을 국채로 보유해야 하고 은행권 발행도 국채 보유액의 90%를 넘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중앙은행이 없어서 아무 은행이나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결국 금광과 은광의 발견이 전쟁으로 연결되면서 화폐제도와 은행 제도는 물론, 채권시장의 틀까지 몽땅 바뀐 것이다.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어 금과 은의 공급이 늘어난 것 때문에 전쟁이 터지고 그 바람에 오히려 금과 관계없는 불태한 화폐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예상했던 대로 불태환화폐의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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