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셤의 법칙과 영란은행
영국 정부가 영란은행에 내린 금태환 중단 조치는 국민에게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암울했던 과거를 상기하기 때문이다.
1688년 명예혁명을 계기로 인류 최초의 민주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영국의 화폐제도는 만신창이였다. 헨리 8세나 찰스 1세 등 절대군주들이 불량 화폐를 제조하여 교모하게 화폐가치를 타락시키는 바람에 영국 국민은 아주 오랫동안 골탕을 먹었다.
낙후된 주화 기술은 위조화폐까지 범람하게 만들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셤의 법칙은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의 절규였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를 처음 만났을 때 선왕의 재상이었던 그레셤이 “제발 불량 화폐 문제를 해결해달라”라는 취지로 간언한 것이 곧, 그레셤의 법칙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쳐 영국의 해상 지배력을 만천하에 과시했지만 정작 자기 나라의 불량 화폐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영국의 중앙은행 영란은행 (英格兰银行, England Bank)
영국의 화폐제도가 정비된 것은 1694년 영란은행이 세워지면서부터다. 인류 최초의 민주 정부는 아이작 뉴턴을 조폐 청장으로 임명하고 영란은행과 함께 화폐개혁을 실시하며 불량 화폐를 몰아내도록 지시했다. 그럼으로써 아주 오랫동안 영국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불량 화폐가 사라지고 새로운 파운드(pound) 화가 보급되었다. 18세기 이후 영국의 건전한 화폐제도는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달성된 민주 정부의 위업이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영국 정부가 금태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불량 화폐가 남발했던 절대왕정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영국 정부가 금태환을 중지한 이유는 전비를 조달하는 데 있었다. 즉 영란은행의 발목을 잡고 있던 금태환 의무라는 족쇄를 풀어주는 대신 영란은행이 무한정 돈을 찍어 정부에 대출하라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다.
국민의 눈으로 보자면, 금태환 중단은 영란은행이 정부의 시녀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정부가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던 절대왕정 시대의 사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국민은 영란은행과 한 배를 탔다고 생각했다. 1797년 길레이의 또 다른 풍자만화가 당시의 여론을 말해준다.
제임스 길레이, 위기에 빠진 영란은행, 1797년작
그림에서 여자에게 구애하는 남자는 당시 영국 수상인 윌리엄 피트다. 피트는 노처녀 영란 씨 - 지금도 영란은행의 별명은 old lady다 - 에게 구애를 하는 척하면서 호주머니의 돈을 빼내가고, 영란 씨는 기겁을 하면서 외친다.
“안 돼요, 안돼! 지금까지 저한테 정조를 잘 지키라고 해놓고선 당신이 절 강간하다니, 말이 되나요? 이러시면 우리 둘 다 패가망신해요!”
강간? 그렇다. 국민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는 일 혹은 금태환 중단 조치는 국민의 눈으로 볼 때 재산권에 대한 강간이다. 명예혁명 이전에는 군주가 국민을 욕보였는데, 나폴레옹 전쟁을 앞두고서는 이제 민주 정부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영국 국민의 생각이었다. 나폴레옹전쟁 직전의 영국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영란은행은 좋은 놈이고, 재무부는 나쁜 놈이다!”
전쟁 뒤의 분위기
유럽 전체가 둘로 나뉘어 지루하게 싸웠던 나폴레옹 전쟁의 끝은 워털루 전투였다. 여기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은 실각하고, 1815년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유럽은 평화를 되찾았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과시하면서 마침내 대영제국으로 우뚝 솟았다.
전쟁이 승리로 끝났으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내적으로는 금태환을 재개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금태환을 재개하자면, 전쟁 중에 늘어났던 종이돈을 거두어들여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 영란은행에 빌린 돈을 갚아야 했다. 이런 고민 앞에서 영국의 정계는 두 파로 갈렸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존 휘틀리 등 지금론자(bullionist)들은 당장 금태환을 재개하고 영란은행이 정도를 걷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 잉글랜드 출신의 상인, 정치인, 학자 들이었다. 이들은 금만이 진짜 돈이고 은행수표는 허구라고 보았다. 반면 반지금론자(anti-bullionist)들은 금태환을 반대했다. 제임스 밀, 존 스튜어트 밀경, 존 플라톤 같은, 주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론가와 은행가들이었다. 이들은 금태환이 재개되면 심각한 불경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걱정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지금론자는 원칙론을, 반지금론자는 현실론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집단 간의 논쟁을 역사학자들은 지금 논쟁(bullionist controversy, 1797~1821)이라고 부른다. 20년 넘게 계속된 이 싸움에서는 당대의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리카도의 활약에 힘입어 지금론자들이 승리했다. 유태계 부호의 아들 리카도는 1817년 경제학의 한 획을 긋는 명저 <정치경제학 원론>을 완성하고 1819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경제이론의 대가인 리카도의 의회 진출은 팽팽했던 지금 논쟁의 물줄기를 지금론자 쪽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1819년 금태환 법(Resumption Act)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1821년 영란은행권의 금태환이 재개되었다. 영국 사람들은 마침내 정의와 원칙이 승리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금태환 직후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825년에는 금융공황이 닥쳤다. 한동안 남미 투기 열풍이 불었다가 버블이 꺼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금태환의 재개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영란은행의 과도한 대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전쟁 중 영란은행의 대출이 늘어난 근본적인 원인을 정부의 요구에서 찾지 않고 영란은행의 영업 확장 욕구에서 찾았다. 그래서 영란은행을 ‘자기 배만 불리려다 버블을 키운 서민의 적’이라고 원망했다. 영란은행에 대한 당시 영국인들의 싸늘한 시선은 1826년, 시인 토머스 무어의 풍자시 <영란은행과 재무부의 음탕한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란은행과 재무부의 음탕한 대화
영란은행의 투정
자기야, 벌써 다 잊었어?
우리가 젊었을 때 뻔질나게 저질렀던 그 불장난말이야.
자기가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느니,
가장 믿음직스럽다느니 하면서 애정을 표시하면
내가 속도위반해서 뭘 만들었잖아.
남들은 우리 사랑의 결실을 신용(advance)이라고 했지.
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 우리 둘만 있을 때면
혈기왕성한 청춘 남녀가 하는 ‘그 짓’을 참 열심히도 해댔지.
나는 원래 종이로 뭘 만들면 안 되었지만,
잘 나가는 당신이 하도 잘 둘러대서 불법이 합법이 되었잖아.
나는 당신의 애첩이니까 종이를 써도 된다는 그 기막힌 변명 말이야.
하지만 우리 사이가 이제 끝나는 거야?
오셀로가 말하는, 냉정해질 시간이 된 거야?
닭살 커플이라는 우리도 별수 없구나, 자기야.
그놈의 늘그막 걱정 때문에 적당히 사귀다 헤어지는 다른 커플들처럼
우리의 관계를 여기서 끝내야 하다니, 너무 섭섭해.
재무부의 대답
유부녀 영란 씨,
우리의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일.
우리가 불장난하면서 뿌린 현찰은 악마도 예쁘게 만드는 요물이라오.
그러니 우리의 사랑엔 끝이 있어야 하오.
맬서스 경이 식량난을 걱정할 정도로 인류는 번창하지만,
자식을 귀하게 식량난을 걱정할 정도로 인류는 번창하지만,
자식을 귀하게 키우려면 숫자가 적어야 하는 법.
제정신이 사람들은 자식 한둘로 절제하는데, 우리는 너무했잖소?
우리 사랑의 결실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함께 살 순 없는 것이요.
파운드니, 실링이니, 펜스니 주체할 수 없이 많이 쏟아진
우리의 자식들은 남들 보기에도 창피하고 이제는 골칫덩이라오.
겉보기에는 모두가 수상님의 존귀한 자식들이라지만,
우리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렇게 세상에 많이 내놓진 말았어야 했소.
오, 생식력이 너무나 왕성한 나의 비너스여,
우리가 불장난을 하던 시절 주고받은 수많은 연애편지들을
우리는 소중한 돈이라고 부르지만
옆집 스코틀랜드에서는 휴지로 쓸 날이 머지않았구려.
다 식어가는 우리 애정을 다시 한번 불태우려면
이제부턴 사랑할 때 피임을 해야 한다오, 영란 씨.
처녀 다나에가 제우스와 사랑을 나눌 때처럼
앞으로 사랑의 결실을 만들 때는 종이 대신 금을 씁시다.
이 풍자시에서도 영란은행은 여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토머스 무어의 관점은 29년 전 제임스 길레이와 정반대다. 길레이는 영란 씨를 정숙하고 힘없는 처녀로 보았던 반면, 무어는 헤프고 사악한 유부녀로 보았다. 길레이는 치한 재무부가 처녀 영란은행을 강간한다고 보았는데, 무어는 음탕녀 영란은행이 영국 신사 재무부를 유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영란은행을 보는 민심이 달라졌다. 영국인들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재무부는 좋은 놈이고 영란은행은 나쁜 놈이다!”
영란은행의 숨통은 조금씩 조여졌다.
참고 자료
‘숫자없는 경제학’, 차현진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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