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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그레셤의 법칙과 영란은행(2)

빅토리아 시대
  
영란은행을 보는 국민의 눈이 점점 싸늘해지면서 마침내 영란은행을 해체해 버리자는 의견까지 등장했다. 영란은행의 화폐 발행 독점권을 몰수하고 정직한 은행들끼리 금태환 준칙을 지키면서 경쟁을 하게 되면 통화가치가 더 안정되고 버블과 금융공황도 예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은행이나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자유은행주의(free banking system)라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도 없이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도 중앙은행 폐지 여부가 대통령 선거에서 최대 쟁점이었다. 중앙은행 폐지를 주장한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은 당시 중앙은행이었던 제2차 미국은행의 영업기간 연장 허가를 거부하여 1836년 자유은행주의를 실현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1914년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이하 연준)이 설립될 때까지 중앙은행 없이 버텼다.
  
미국에서 시작된 자유은행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영란은행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전쟁 전인 1781년 런던 지역에 한하여 발권 독점권을 인정한다는 영란은행의 특허권이 1833년 만료될 예정이었다. 영란은행이 영업을 계속하려면,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화끈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란은행 총재 존 파머경은 1832년 의회에 특허권 연장을 신청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오로지 금의 유출입에 맞추어 은행권 발행을 기계적으로 조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란은행이 수동적 발권 기능을 수행하는 상업은행의 위상에 만족하겠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이런 비굴한 저자세를 통해서 1833년 영란은행의 목숨은 다시 연장되었다. 런던 지역에서만 발권 독점권을 갖는다는 조건도 유지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37년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었다. 절제하는 군주, 빅토리아 여왕의 품위 있는 지도력 아래서 대영제국은 모범적인 입헌군주국가로 발전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선두에는 로버트 필 수상이 있었다. 그는 구태의연한 수구파 휘그당을 보수당으로 일신한 사람이었는데, 보수당의 당수답지 않게 상당히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근대국가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제도들을 혁신적으로 다듬어갔다. 도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제도가 그중 하나였다. 오늘날 런던의 경찰을 ‘보비(Bobby)'라고 부르는 것도 필 수상의 애칭에서 따온 것이다. 이 밖에도 필 수상은 세계 최초로 소득세를 정착시켰고 여러 가지 관세와 함께 대표적인 보호무역 법인 곡물법(Corn Law)을 폐지했다.
  
필 수상이 화끈하게 뜯어고친 것들 중에는 중앙은행제도도 있었다. 영국 경제가 계속 확대되자 영란은행의 영업지역을 더 이상 런던에만 못 박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영란은행의 영업허가 기간이라는 개념을 폐지하고 영업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대신, 금태환 의무를 확실하게 준수하도록 했다. 겉모습만 보자면, 10여 년 전 파머 총재가 몸을 낮추면서 제안했던 금태환 의무를 더욱 철저하게 지키도록 한 필 수상의 조치는 영란은행의 위상에 별다른 변화를 초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금태환 약속이 영란은행의 발목을 잡는 것 같지만, 금리를 조절하면 영국 전체의 무역량과 금의 유출입이 출렁이게 된다. 따라서 영란은행의 영업권을 항구적으로 인정하고 영업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는 영란은행의 힘을 엄청나게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써 영란은행은 발권 독점권을 항구적이며 전국적으로 갖는 중앙은행으로 발전했다. 그런 변화를 초래한 필 수상의 법률(Peel's Act of 1844)이 근대식 중앙은행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이었던 월터 배젓은 1873년 <롬바르드 스트리트>라는 저서를 통해 영란은행의 최종대부자기능을 찬양하고 이 기능을 행사하는 데에 겸손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중앙은행 제도에 관한 복음서로서,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금융위기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찬사를 받은 영란은행은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경제를 견인하는 최고의 기관으로 추앙되었다.
  
“금태환 약속을 지키는 한, 영란은행은 좋은 놈이다!”
  
이렇게 해서 영국이 천명한 금본위제도는 유럽 전체의 도덕률, 즉 국제금융 시스템의 ‘영혼’이 되었다. 동시에 영국의 파운드화는 유럽의 금본위제도를 지탱하는 받침점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플로린화가 담당했던 국제통화의 역할을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파운드화가 이어받은 것이다.
  
  
격랑의 시대
  
영국이 주도하는 금본위제도는 한동안 잘 지켜졌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금본위제도가 잘 지켜질 수 있었던 이유는 금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1848년 캘리포니아, 1851년 호주, 1887년 남아연방 등지에서의 연속적인 금광 발견은 산업혁명 이후 크게 늘어난 산업 활동을 충분히 뒷받침했다. 산업혁명에 기막히게 때를 맞춘 금광의 발견이 없었다면, 화폐공급이 부족해서 불황이 찾아왔거나 금본위제도가 붕괴되었을 것이다. (경제사에서는 19세기 후반 금광의 연쇄 발견을 ‘공급충격’이라고 한다.)
  
반면 금광의 발견으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등 4개국은 통화 부족 현상을 겪었다. 이들 4개국은 1865년 소위 라틴 통화동맹을 결성하고 금과 은을 함께 돈으로 쓰는 복본위제도를 도모했다. 하지만 화폐제도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교환이나 교류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모든 시스템은 참여자가 많을수록 유지비용이 줄어드는 규모의 경제적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후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도에 동참하지 않으면, 경제적 불편을 넘어 고립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2년 뒤인 1867년 20개국이 참가한 국제통화회의에서는 라틴 통화동맹과 같이 복본위 제도로 버텨보려는 일부 국가의 수고를 덧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전 세계가 금본위제도로 통일할 것을 결의했다.
  
여기에는 반대도 많았다. 특히 여전히 농업국가에 머물고 있었던 미국은 글로벌스탠더드를 채택하기가 어려웠다.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1873년 주조법을 개정하여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기로 했을 대 서부의 은광 소유주와 농님들은 이 법을 ‘범죄(Crime od 1873)'라고 하면서 강력히 반발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금본위제도의 채택 여부가 20여 년간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야 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주변 국가가 겪는 서글픈 현실 중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그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처럼 내부 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었지만 19세기 이후 금본위제도는 글로벌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1차 세계대전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정치적인 결론을 맺었다. 하지만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1922년 34개국은 제노아에 모여서 금본위제도로 복원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위해 각국이 중앙은행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1924년에는 승전국과 독일 사이에 배상금 문제도 타결되었다. 승전국들이 독일의 배상금을 낮춰주고 차관을 제공하면, 독일은 열심히 수출해서 빚을 갚는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미국 재무장관 찰스 도스의 중재로 마련되었기 때문에 도스 플랜(Dawes Plan)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산업시설이 파괴된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로부터 받아야 할 배상금의 규모가 줄어들고 시기도 늦어지기 때문에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스 플랜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금융질서 회복을 향한 큰 진전이었지만, 정작 금융 종주국 영국의 형편은 더 나빠졌다.
  
이러는 와중에 패전국 독일은 물론이고 스웨덴, 폴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이미 금본위제도로 복귀하고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 연방 등도 금본위제도 복원을 추진했다. 이런 움직임에 영란은행은 조바심을 느꼈다. 그러던 중 1924년 1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했다. 노동당 정부가 볼셰비키 정부와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반공 무드가 확산될 덕분이었다. 보수당 정부 아래서 경제정책의 중심은 물가 안정으로 전환되었다.
  
스탠리 볼드윈 수상은 집권 직후 아직 50세가 되지 않은 윈스턴 처칠을 재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처칠은 35세의 나이에 내무장관에 올라 해군장관까지 역임했지만 그 이후 정치적 계산 끝에 보수당과 자유당을 오락가락했던 철새 정치인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 그가 보수당에 재입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내각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를 제안받자 스스로가 당황스러워했다.
  
아무 준비 없이 재무부 장관 자리에 오른 처칠에게 몬터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가 접근했다. 볼드윈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노먼 총재는 처칠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장관님, 금본위제도가 신성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인간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최고의 총독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금본위제도로 복귀한다면 무식한 사람, 도박꾼, 시대에 뒤떨어진 사업가들에게 욕을 먹을 것이고, 금본위제도를 거부한다면 교육받은 사람들과 후세로부터 영원히 욕을 먹을 것입니다.”
  
영국의 물가 상승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을 감수하고서라도 금본위제도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노먼 총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금본위제도 복귀에 따르는 고통을 각오하지 않으면 영국은 곧 이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처칠에게 경고했다.
  
정치인에게 불황을 초래하는 정책만큼 걱정스러울 것은 없다. 그러나 당장 금본위제도로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무대에서 영국의 지위가 축소되는 것 역시 현직 장관에게는 굉장한 공포였다. 깊은 고민과 오랜 토론 끝에 처칠은 금본위제도 복귀를 결심했다. 1925년 4월 28일, 하원에서 처칠은 마침내 금본위제도 복원을 선언했다.
  
식자층에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익을 위해 실업과 경기 침체도 불사하겠다는 처칠의 용단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존 메이너스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짧았던 공무원 생활을 토대로 1913년 출간한 <인도의 화폐와 재정>에서 금본위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펴더니, 1924년 발간한 <화폐 개혁론>에서는 금본위제도를 “야만의 유산”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어차피 땅속에 있었던 물건을 공들여 캐내어 네모난 모양으로 다듬은 다음, 다시 땅속의 금고에 묻어두고 부자가 된 양 행복해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케인즈가 보기에는 금본위제도야말로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에 불과했다.
  
노먼이 우려하고 케인즈가 예언했던 것처럼, 금본위제도 복원은 영국 경제를 상당히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100여 년 전 리카도의 주도로 금태환을 재개했을 때와 같았다.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민심은 어수룩한 처칠 재무장관을 꾄 노먼 총제를 원망했다. 그리고 금본위제도 복귀 결정을 ‘노르망 정복(Norman Conquest)'이라고 비꼬았다. 1066년 노르망족이 잉글랜드를 침공했던 것처럼 노먼 총재의 ’사악한 음모‘로 재개된 금본위제도는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적 재앙이라는 비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결단을 계기로 글로벌스탠더드는 또다시 금본위제도로 바뀌었다. 미국만 잘 협조해주면, 그런대로 국제금융 시스템이 잘 굴러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몬터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와 벤저민 스트롱 뉴욕 연준 총재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스트롱 총재의 외동딸 캐서린이 노먼의 집에서 유학생활을 할 정도로 둘은 가까웠다.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가하여 피해가 가장 적었던 미국은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을 통해서 수출을 늘림으로써 당시 유럽의 금을 마구 빨아들였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 금본위제도의 존속 여부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금 대신에 이웃 나라의 화폐를 외화보유액으로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프랑화를, 프랑스는 파운드화를 각각 대외준비자산으로 비축해두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유럽 국가들이 말로는 금본위제도를 떠들었지만 현실은 금환본위제(gold-exchange standard)였다는 점이다. 상당량의 금이 미국에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금태환 요구가 차질 없이 이행되도록 유럽 중앙은행들이 연대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이런 살얼음 같은 시스템은 국제공조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리 오래갈 수 없는 허약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체결된 주요 중앙은행 간 통화스와프 계약도 이것과 같다.)
  
아직까지 민간기구였던 중앙은행끼리의 유대관계에 의존하는 이런 불안한 시스템 아래서 1928년 뉴욕 연준의 스트롱 총재가 갑자기 죽고 그다음 해인 1929년 대공황이 찾아왔다. 세계 경제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영란은행에 금을 빌려줄 미국인 친구가 사라지자 영국은 1931년 또다시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금본위제도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영국의 금태환 중단은 전 세계를 패닉 상태로 빠뜨렸다. 각국은 연쇄적으로 금태환을 중단하고 평가절하를 단행했다.(2007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도 이와 같았다.)
  
국제통화제도가 붕괴되는 혼란 속에서 세계에서 금이 가장 많았던 미국도 1933년 금본위제도를 포기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 달러화의 약세를 통해 수출을 늘리고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생각에서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니 벨기에, 캐나다, 아르헨티나,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체코, 일본, 콜롬비아 등도 잇달아 금본위제도를 중단했다. 이것이 금본위제도의 마지막이었다. 
  
1933년 미국의 금본위제도 이탈을 끝으로 인류는 영원히 금본위제도로 복귀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뒤에도 시도되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자초했으면서도 기축통화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의 달러화는 현재 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온리 휴먼’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의 금화 플로린에서 시작한 돈의 이야기는 푸른색 종이돈 달러로 끝을 맺는다. 이런 현실을 ‘녹색금융 시대의 도래’라고 환영해야 할까? 과거 영국에서 벌어졌던 지금 논쟁처럼, ‘글로벌 녹색금융’의 문제는 이제 우리 시대가 고민해야 할 새로운 숙제다.
  
‘글로벌 녹색금융’ 시대가 도래하기 전의 100년은 ‘글로벌 황색 금융’의 시대였다. 즉 1844년 필 수상이 금태환 의무를 조건으로 영란은행에 항구적 발권력을 인정할 때부터 1944년 45개국들이 미국 브레턴우즈에 모여 국제통화제도(IMF)를 만들고 미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인정할 때까지는 영국의 파운드화가 명실상부한 기축통화였다. 영국은 막강한 경제력, 특히 거대한 무역 흑자를 토대로 확보한 황금을 바탕으로, 세계를 상대로 그들의 파운드화를 뿌렸다. 그 중심에는 영란은행이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중앙은행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영란은행 천당과 지옥, 또는 ‘좋은 놈’과 ‘나쁜 놈’ 사이를 오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격랑의 시대에 영란은행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동시대인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1922년 제노아 회의에 참석한 34개국의 대표들이 금본위제도를 결의했을 때 영국의 랠프 호트리와 스웨덴의 구스타프 카셀과 같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지했다. 케인즈의 절친한 친구였던 호트리는 ‘세계 최고의 경제 공무원’이라는 찬사를 받던 당대 최고의 경제전문가였다. 카셀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의 저명 경제학자들의 권고를 배경으로 1925년 보수당 정부가 금본위제도를 채택했지만, 3년 뒤 국민은 등을 돌렸다. 금본위제도 복원을 주도했던 영란은행은 실업이 늘어나고 경기가 하강하자 ‘나쁜 놈’을 넘어서 ‘죽일 놈’으로 매도되었다.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은 처칠 수상의 면전에서 그가 재무장관 시절 단행한 1925년의 금본위제도 복귀야말로 가장 한심한 결정이었다고 힐난했다. 국민적 사랑을 받는 연예인의 비판 앞에서 처칠은 아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처칠마저도 자기가 결행한 금본위제도 때문에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보게 된 것을 알고 친구에게 “금본위제도를 권고한 노먼을 지옥에 보낼 수는 없을까?”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영란은행이 처칠을 설득하여 금본위제도 복원에 앞장선 것은 그 옛날 지금 논쟁 때 반지금론자들이 소수파로서 몰락한 사실과 영란은행이 국민적 조롱거리가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노먼 총재의 주도로 진행된 1925년의 금본위제도 복귀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처절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영란은행의 태도는 세상이 바뀐 것을 모르는 시대착오적 편집증이기도 했다. 1925년 영국의 금본위제도 복귀는 이미 왜소해진 영국 경제의 체격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 잘 나가던 시절 입었던 옛날 옷을 다시 입어보려는 헛된 몽상이었는지도 모른다. 6년 만에 중단할 일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금본위제도에 대한 영란은행의 신념은 옳았는가, 틀렸는가? 이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불행한 것은, 정답이 없는 이 문제를 두고 영란은행은 무슨 일을 하든지 비난을 들었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선거에서 패배했다. 정권교체 직후 노동당은 금본위제도를 주도했던 영란은행에 모든 경제난에 대한 책임을 돌렸다. 그 결과는 1946년 영란은행 국유화 조치였다.
  
그로부터 51년 뒤인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 수상도 집권하자마자 영란은행에 책임을 물었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수상 시절, 금융기관 연쇄부도를 막기 위해 영란은행이 1984년에 실시했던 존슨매세이은행에 대한 긴급대출이 대단히 불합리한 특혜성 대출이었다고 영란은행을 몰아세운 것이다. 블레어는 그에 대한 벌로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 훗날 수상이 되었다 -을 시켜 은행 감독 권한을 박탈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금융 안정 차원에서 찬사를 받았어야 하는 일이 저주받은 일로 매도된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란은행을 좋은 놈으로도 만들고 나쁜 놈으로도 만들었던 것은 화폐공급에 관한 원칙이다. 2차 세계대전까지는 그 원칙을 금본위제도라고 불렀다. 영란은행에 대한 평가를 오락가락하게 만든 금본위제도는 한마디로 말해서 ‘이상한 놈’이다.
  
물론 금본위 시대에도 금본위제도를 수상하게 본 사람이 있었다. 보수당 소속 벤저민 디즈레일리 수상이 그중 하나다. 디즈레일리는 금본위제도가 영국 사회의 풍요에서 오는 결과이지, 풍요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영국이 곧 국제사회의 법이요, 기준이 되는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에는 영국이 택한 금본위제도에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금본위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불신은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의 골수 지배계층인 케인즈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카를 마르크스가 ‘황금만능 사상’을 조롱했다. 화폐를 가치저장 수단이라고 하고 금화에는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황금을 현미경을 들여다보면 ‘가치’는 보이지 않는다. 가치는 물질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즉 약속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둘도 없는 유물론자라고 일컬어지는 마르크스가 약속과 믿음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 것은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를 유물론자가 아닌 유심론자라고 보기도 한다.)
  
마르크스와 케인즈 이후에는 금본위제도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중국의 쑹홍빙과 같은 일부 인사들이 금을 돈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과거 마르크스나 케인즈가 그랬던 것처럼 ‘한심한 괴짜’라고 취급될 뿐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은 케인즈가 우리 인류의 정신세계에 침투하여 금본위제도의 단점을 ‘인셉션’한 결과다. 그렇지만 시대가 흐르면 생각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금본위제도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중앙은행에 대한 평가 기준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중앙은행을 바라보는 눈은 아주 관대해졌으며 그 결과 무슨 일을 저질러도 ‘나쁜 놈’으로 몰릴 가능성은 사라졌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이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미 연준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종식시킨 책임은 당연히 그것을 발표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즉 팍스아메리카나의 최고봉에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중앙은행에 대한 관용은 지금도 계속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 연준은 달러화의 가치와 국제통화 질서의 미래야 어떻든 간에 일단 미국 경제부터 살리겠다고 1조 달러 이상의 돈을 풀었다. 그래도 2010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제2차 양적완화정책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별로 크지 않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란은행이 파운드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겪은 수모와 비난이 미 연준에는 쏟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아니라 화폐, 즉 금에 대한 환상이다. 경제사학자 피터 번스타인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금에 대한 환상이 문제였을 뿐, 영란은행에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금본위제도를 바라보는 인간의 변덕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원천이었던 것이다. 풍자만화가 제임스 길레이는 영란은행을 동정했고, 극작가 토머스 무어는 조롱했으며, 언론인 월터 배젓은 찬양했고,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은 비난했다. 이들 모두 영국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옳았고 어떤 면에서는 틀렸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피조물을 또 다른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1726)의 마지막에서 ‘야후(yahoo)'라고 불렀다. ’you human'이라는 뜻이다. 조물주가 땅속에 박아둔 황금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있건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자주 바뀌었다. 혼란스러운 금융의 역사 속에서 진짜 이상한 놈 또는 추한 놈은 야후, 즉 인간 자신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숫자없는 경제학’, 차현진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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