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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한국의 중앙은행 (1)

한국의 중앙은행 (1)
  
북한의 호전성이 여실하게 드러났던 지난 201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 되는 해였다. 아울러 우리 국민의 손으로 중앙은행을 세우고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화폐 주권을 선언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왕명에 따라 몇 차례 엽전이 발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업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중국의 눈치도 보아야 했기 때문에 잠깐 반짝하다가 금방 흐지부지되었다. 어떤 때는 상업에 쓰이는 하찮은 물건 따위에 통치자가 관심을 갖는 것이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생각 때문에 위정자들이 의도적으로 화폐 문제를 외면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세금을 내거나 씀씀이에 부족한 부분을 융통할 때 쌀이나 베를 썼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자들이 화폐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그들의 관심은 동전에만 국한되었고 화폐와 금융 전반을 통찰하는 시각은 없었다. 그래서 이익은 <성호사설>을 통해 사치와 소비를 조장하는 화폐를 없애고 물물교환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화폐제도 발달이 부진했다. 조선 후기에는 화폐가 부족하여 간간이 전황을 겪기도 하고 구한말에는 지나치게 많아 인플레이션을 겪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그런 문제를 담당하는 기관이 중앙은행인데, 금융업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니 중앙은행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다산 정약용의 제안이 뒤늦게 받아들여져 1883년 전환국을 세우고 발권 기관을 정비한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외국 돈이 유입되면서 화폐 질서가 엉망이 된 데에 대한 대증요법이었다. 즉 국가제도로서의 화폐가 아닌 물질로서의 화폐에만 관심이 있었던 나머지 ‘금융 없는 화폐제도의 정비’에 만족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제국이 민간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을 통해 조선 땅에서 제일은행권을 본격적으로 발행하자 대한 제국의 위기감이 커졌다. 그래서 1903년 ‘중앙은행 조례’를 통해 주식회사 형태의 ‘대한 중앙은행’을 세우기로 하고 충북도 관찰사 심상훈과 내장원경 이용익을 이 은행의 총재와 부총재로 임명했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를 바라지 않던 일본은 이 은행의 설립을 줄기차게 반대했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진 상태에서 친러파인 이용익이 부총재로 임명되는 중앙은행의 설립을 일본이 견제한 것이다. 그래서 서류상 최초의 중앙은행은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입김이 다시 강해진 일본은 생각을 바꿨다. 조선의 강점을 염두에 두고 일본의 은행 제도와 화폐제도를 조선 땅에 이식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래서 1909년 직접 중앙은행을 세우고 일본 제일은행이 담당했던 발권 및 국고 업무를 새로운 중앙은행이 승계하도록 했다. 한국 정부 30%, 일본인의 68%의 출자로 자본금 1,000만 원의로 이루어진 은행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임원 전원은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은행의 이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은행(韓國銀行)’이었다. 이 은행은 한일강제병합을 계기로 ‘한국’이라는 이름을 못 쓰게 되면서 1911년 이름을 조선은행으로 바꾸었다.
 

한국은행 본점, 1911년 이후 조선은행 오늘날에는 화폐금융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은행은 조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대동아 건설을 바라는 일본은 조선은행을 만주와 대만, 중국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의 발권 기관 겸 투자 기관으로 키웠다. 이는 영국의 영란은행(발권)과 동인도주식회사(투자)를 합한 형태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행은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보다도 중국 대륙에 지점이 더 많은, 아시아 최대의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이 은행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목숨이 끈질겼다. 일본이 패주하고 난 뒤에도 5년이나 더 연명한 것이다. 조선은행을 죽이는 데에 왜 5년이나 시간이 걸렸을까? 지금의 한국은행은 1950년 폐지된 조선은행의 후신일까? 금융업이 형편없이 부진했던 한국에서 어떻게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앞선 근대식 중앙은행이 세워졌을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왕이 항복을 선언하던 순간, 조선은행 영업부 외환담당 직원 한상원은 점심시간이 끝난 뒤 상사인 오와기 주임의 눈치를 살피며 외출을 했다. 은행생활 4년 차인 한상원은 저 멀리 혼마치(오늘날의 충무로 1가) 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신경 쓰여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와기 주임은 부하직원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눈감아주었다.
  
혼마치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천황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상기도니 표정인 군중들은 일본인들이 기세를 펴던 번화가 혼마치에 모여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꿈만 같은 해방의 기쁨을 서로가 부둥켜안으면서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한상원은 기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함경도 원산이 고향인 한상원은 오사카 상대를 나온 뒤 일본인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선은행에 입성했다. 바야흐로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어 군자금을 다루는 조선은행은 총독부가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기고나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으로 송금업무를 담당하는 영업부 외환 담당계는 고강도 사상검증을 통과한 엘리트들만 근무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한상원은 그 자리에서 근무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 그런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이었다.
  
광복을 맞이한 그날까지 조선은행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물론 라이벌도 있었다. 조선식산은행이었다. 1918년 6개 농공은행을 합해서 설립한 조선식산은행은 채권 발행과 강제저축을 통해 끌어들인 자금을 군수산업에 대출해주는 기능을 맡았다. 조선은행이 아시아를 영업지역으로 했다면, 조신 식산은행은 한반도를 영업지역으로 했다.
 

조선식산은행

   
그러다 보니 조선은행에는 간부 중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던 반면, 조선식산은행에는 조선인 간부도 많았다. 승진하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이 조금 더 유리했다. 월급도 조선은행보다 조금 많았다. 전문학교나 상업학교 졸업생 중에서 “1등은 식산은행, 2등은 조선은행”으로 간다는 말이 돌았다. 1926년 12월 의열단원이었던 나석주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결한 사건 이후로 조선식산은행에 대한 인상이 많이 나빠졌지만, 그래도 그곳은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행은 규모가 훨씬 컸으며 돈을 찍어내는 발권 기관이었기 때문에 조선식산은행을 경쟁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두 은행 직원들은 서로 자기가 최고의 직장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얕보았다. 두 은행의 경쟁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9월 초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입성한 미군은 양 은행을 접수하고 일본인 간부들을 전원 추방했다. 그리고 일본 태평양 사령부에서 보내온 달러화를 취급할 전담기구를 설치했다. 조선 환금은행이었다. 이 은행을 만들 때 미군은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이 반반씩 대출하도록 하고 대출금과 함께 양 은행에서 다섯 명씩 직원을 차출했다. 일본인 아래에서 경쟁하던 두 은행 사람들은 이제 미군 아래에서 경쟁하는 관계로 바뀐 가운데 영어 잘하는 ‘꺼삐탄 리’들이 두각ㅇ르 나타냈다. 한상원은 일제 때에도 일본에서 열린 대학생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서도 큰 걱정은 없겠다고 안심했다.
 

조선 환금은행

   
최순주의 경우에는 영어를 잘해서 조선은행에 들어간 케이스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대학 상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리고 모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다가 일본인 세운 조선 흥업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변신했다. 해방이 되자 그 회사는 미군에게 접수되었다. 이후 미군정청은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호러스 언더우드 박사의 추천으로 실직자인 최순주에게 조선은행 이사직을 맡겼다. 미 해군 소령인 월터 스미스가 조선은행 총재로 임명된 상태에서 ‘낙하산’ 인사로 이사가 된 최순주는 조선은행 출신 구용서 이사와 함께 조선은행을 움직이는 실세가 되었다.
  
조선식산은행에는 김진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본 야마구치 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조선식산은행에서 근무하다가 해방 직후 부장과 이사로 고속 승진했다. 그리고 미군정청 산하의 조선 환금은행 전무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나중에 한국은행 이사와 총재를 역임하게 된다.) 영어도 잘하고 외환업무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의 신경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중앙은행 자격에 관한 경쟁이 그중 하나였다. 발권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은 당연히 자신들이 중앙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인 직원 수, 전문학교와 대학교 졸업자 수 등에서 조선은행을 앞선 조선식산은행이 중앙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싸움에는 조흥은행까지 가세했다. 조흥은행은 적산 청산론을 내세우며 일본이 세운 두 은행을 폐지하고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조흥은행이 중앙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 조흥은행 본점



  
참고 자료
  
‘숫자 없는 경제학’, 차현진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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