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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한국의 중앙은행 (2)

한국의 중앙은행 (2)
  
그 싸움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조선은행이 조선환금은행을 관리토록 할 때 조선식산은행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재무부와 합세하여 악소문을 퍼뜨리거나 공공연히 반대 여론을 몰아갔다. 재무부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조선은행이 조선환금은행을 관리하는 데에 반대했다. 당시 재무부에서 반대하던 사람 중에 송인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경성고상(오늘날 서울대학 상과대의 전신)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서 대리까지 지냈다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옮겼다. 
  
조선은행은 자신들이 중앙은행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정부 수립 이후 도입해야 할 중앙은행 제도를 연구했다. 이른바 ‘중앙은행 설립돼 강’이라는 보고서였다. 1947년 5월 <조선은행 월보>에 발표된 논문(‘신조선 중앙은행 시론’)을 통해 조선은행은 정부, 금융기관, 민간이 공동출자하여 ‘국립 조선 중앙 준비은행’이라는 중앙은행을 세우고 주주에게는 연 6%의 배당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금환본위제도를 채택하고 미국의 차관이나 대일 배상 자금도 준비금으로 인정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다분히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미국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구체적인 방안은 갖추지 못한 습작 수준이었다.
  
습작 수준의 보고서를 만든 사람은 장기영 조사부장이었다. 서울 출신인 그는 선린상고를 마치고 1934년 조선은행에 입행하여 청진지점에서 대부 계장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다시 서울로 내려와 조사부 차장에 임명될 때 그의 나이는 갓 서른이었고 조사업무는 경험이 없었다. 월터 스미스 조선은행 총재 아래서 출세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데다 백두진같이 도쿄 상대를 나온 것도 아니라서 일본이 남겨준 금융 시스템 이상의 근대적 중앙은행 제도를 제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장기영 부장의 자질과 보고서의 수준이야 어떻든, 조선은행이 중앙은행 법 제정에 앞장서는 것을 본 재무부는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금융 법규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고 1948년 3월 중앙은행 법과 은행법을 아우르는 법안을 만들겠다는 계획(금융 법규 대강 초안)을 세웠다. 그러나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더불어 이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정부의 움직임을 본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특명 조사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특명 조사 위원회에는 조사부 직원인 장기영 부장과 신병현 조사과장 이외에도 김정렴 업무부 참사 등 주니어급 사람들도 동원되었다. 황해도 출신의 김정렴은 오이다고상을 졸업하고 1944년 입행 직후 히로시마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 원폭의 피해를 입었었다. 그리고 집에서 요양하다가 1945년 11월 복직하여 근무 중이었다. 특히 김정렴은 발권부에서 근무할 때 조사부가 주최한 직원 논문대회에서 선배들을 제치고 두각을 내는 바람에 장기영 부장이 그를 점지해두고 있던 터였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각국의 중앙은행 제도를 연구했다. 1948년 말 특명 조사 위원회는 외국 사례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를 정부와 국회, ECA에 자랑스럽게 뿌렸다. 하지만 이 보고서도 어설프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갖는 중앙은행을 세우는 것이 골자였지만,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통화 심의회’는 재무부, 중앙은행, 국회의원, 금융기관장, 학자, 산업계 대표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되어 재무부 장관에게 통화신용정책을 권고하거나 조언하는 기능만 담당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조선은행 직원들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무부는 발끈했다. 조선은행의 건의를 공식적으로 접수한 재무부는 뒤늦게 발동을 걸고 재정금융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조선은행 측의 반발을 예상하고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면서 중앙은행 법안을 준비했다. 하지만 <연합신문>(1949년 2월 3일 자)을 통해 재무부의 법률안 전문이 드러났다. 언론에 보도된 법률안은 1942년 군국주의자의 시각에서 개정된 일본은행 법을 그대로 한글로 옮긴 수준이었다.
  
재무부가 중앙은행 제도 개편 논의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이 중앙은행의 자격을 놓고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은행의 기능과 지배 구조를 두고 조선은행과 재무부가 싸우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중앙은행 제도 도입을 위한 외국 전문가 초빙 건에 관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승낙이 떨어졌다. 이 계획이 한국에 주둔해 있던 ECA에 알려지자 ECA 측은 김도연 장관에게 미국 연방 준비 위원회에 의뢰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김도연 장관은 미연방 준비 위원회에 두 명의 전문가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띄웠다.
  
하지만 토머스 맥케이브 의장은 연준이사회의 직원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제조업체 사장 출신인 그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준의 업무를 파악하기도 바빴다. 신생 독립국과의 교류·협력은 그에게 부차적인 일이었다. 연준 직원들도 맥케이브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존 스나이더 재무장관이 매파인 에클스 의장의 연임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맥케이브의장을 추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실력과 지도력에 의문을 표시했다. 에클스 전임 의장은 평위원으로 ‘강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준 안팎에서 사실상의 의장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운신 폭이 좁았던 맥케이브 의장은 한국에서 온 편지를 뉴욕 연준으로 보냈다. 의장의 편지를 넘겨받은 앨런 스프로울 뉴욕 연준 총재는 고민에 빠졌다. 뉴욕 연준은 비둘기 파인 맥케이브 의장을 제치고 재무부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선봉에 있었다. 스프로울은 재무부의 지시에 따라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상태가 계속되면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을 걱정했다. 이렇게 통화신용 정책 방향을 두고 바짝 신경전을 펼치고 있을 때는 한 사람의 금융 전문가도 아쉬웠다.
  
뉴욕 연준은 일찍이 초대 총재 벤저민 스트롱 시절부터 워싱턴 D.C의 본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통화신용 정책의 중추는 바로 뉴욕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연준이사회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월가의 증권회사들과 공개시장조작을 처음 시도한 것도 뉴욕 연준이었고, 1929년 초 신용 감소 현상을 두고 대공황을 예언했던 것도 뉴욕 연준이었다. 
  
뉴욕 연준에서 보기에 워싱턴 D.C의 연준이사회는 금융을 잘 모르는 백면서생들의 집합소였다. 대통령과 가까워서 임명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으스대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박사 출신이 즐비한 연준이사회가 보기에는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 모인 뉴욕 연준은 실무자들의 집합소에 불과했다.(스트롱 총재는 예일대학에 입학허가를 받고서도 가정 형편상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뉴욕 연준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연준이사회는 진성어음주의에 빠져 있던 반면, 뉴욕 연준의 스트롱총재는 통화주의자였다. 경제철학이 다른 연준이사회를 뉴욕 연준 직원들이 이론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스트롱 총재는 부하직원 칼 스나이더에게 통계학을 독학시켜 공개시장조작의 유효성을 입증해 보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스트롱 총재 아래서 부총재로 지내다가 스트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총재에 오른 조지 해리슨은 예일대학 출신의 법률 전문가였다. 그래서 해리슨 역시 과학적 경제분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941년 계략 분석에 뛰어난 스프로울에게 서열 3위인 부총재보 자리를 파격적으로 제안하면서 그르 영입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반면 스프로울 총재는 월가 출신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통화신용 정책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버클리대학에서 농경제학을 공부한 뒤 친구의 권유에 따라 1920년 샌프란시스코 연준의 동향 분석과장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그는 금융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숫자에 밝았을 뿐이었다.
  
1941년 뉴욕 연준 총재로 승진했을 때 스프로울은 자신의 약점을 채워줄 전문가를 찾았다. 스프로울은 총재직에 앉자마자 블룸필드 박사를 채용했다. 블룸필드는 1941년 시카고대학에서 제이컵 바이너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막 취득했지만 그의 연구는 국제경제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프랭크 나이트교수에게서 화폐금융사와 경제 사상을 배운 나이트 교수의 애제자였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뉴욕 연준에 취직할 때 블룸필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금융제도와 역사에 관하여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계량경제학에 치우쳤던 스프로울은 블룸필드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현직의 맥케이브 의장을 제쳐놓고 금리정책 방향에 관하여 스나이더 재무장관과 씨름을 하는 판에, 생전 처음 듣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금융 전문가를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연준이사회의 부탁을 받았으므로 뉴욕 연준 직원들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재무부와 연준이사회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필리핀, 과테말라, 우루과이, 실론 등에 직원들을 파견하여 중앙은행 설립을 도운 경험이 많았다. 대부분 식량 수출국인 이들 나라는 전략적 가치가 많았기 때문에 연방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했다. 국무부 직원이 합세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뉴욕 연준 단독으로 후진국 중앙은행 설립을 도울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를 멋지게 처리하는 것은 뉴욕 연준의 자존심과도 관련이 있었다.
  
두 달여의 고민 끝에 스프로울 총재는 자기가 직접 채용하였으며 자신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던 블룸필드 국제수지 과장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한국이 다소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블룸필드는 미혼이라서 몇 달 간 파견을 보내는 데에 걸림돌도 적었다. 아울러 은행법에 특히 조에가 깊은 존 젠센을 파트너로 골랐다. 젠센은 감사실에서 근무하는 법률 전문가였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1949년 8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나라,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블룸필드와 젠센 일행은 9월 초 서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서울 생활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의식주는 형편없었지만, 사람들이 상냥하고 협조적이었다.
  
게다가 장기영 조사부장을 필두로 신병현, 김정렴, 진경득, 최기웅 등 똑똑한 조선은행 직원들은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블룸필드의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했다.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듯이 기대감에 차오른 그들은 2차 세계대전 후 미 연준의 도움으로 과테말라에서도 근대적 중앙은행 제도가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설명을 듣고서는 “홀딱 반해서 이거밖에 없다!"라고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은행 직원들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던 벤치마킹 대상이 과테말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행 직원들은 블룸필드 일행을 통해 ‘민주적 금융제도’라는 신학문의 세례를 받고 사기가 충천했다. 반면, 김도연 장관의 명의로 미국 전문가를 초청한 재무부는 시큰둥했다. 조선은행 직원들에게 가끔씩 진척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블룸필드 일행은 1948년 7월 장기영 부장의 지휘하에 만들어진 <조선경제 연보>를 보고 흡족해했다. 해방 후 3년간의 한국경제에 대한 방대한 보사와 통계자료였다.
  
하지만 <조선경제 연보>에서 나타난 재정상황은 심히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재정은 세수가 확보되지 않아서 조선은행 차입금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블룸필드 측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현상을 조속히 해결하지 못하면 금융 통화 시스템이 붕괴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중앙은행 제도만으로는 한국의 모든 금융적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신기한 치료책이 못 된다"라며 중앙은행 법 제정 노력과 함께 재정건전화 노력을 함께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민간부문 역시 희망이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업 이외에 이렇다 할 산업 생산이 없었고 물자는 부족했다. 만성적인 무역적자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전혀 예측하기 힘들었다. 미 연준이 중앙은행 설립을 지원해주었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사정이 열악했다. 신생 독립국 한국은 최빈국 그 자체였다.
  
그들이 내린 첫 번째 결정은 화폐개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같은 상태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떨어내기 위해 새 돈을 찍는 것은 사치였다. 자산과 부채 실사를 통해 조선은행의 재무 건전성이나 확인한 다음, 정부 대출에 통제장치를 만드는 것 정도가 블룸필드 일행이 제안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보고서 제목을 <남한의 금융 개혁안>이라고 정했다. 다른 연준 직원들이 과테말라, 우루과이, 필리핀, 실론, 에티오피아 등에 파견되어 의례적으로 작성했던 보고서의 <화폐 및 금융 개혁안>이라는 제목에서 ‘화폐개혁’이 생략됨으로써 ‘화폐 없는 금융개혁’이 추진된 것이다.
  
블룸필드 일행이 연준을 출발할 때 가져온 매뉴얼에서 한국적 상황을 감안해서 바꾼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블룸필드 자신은 케인즈와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도에 관하여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훗날 로버트 트리핀 등과 함께 가격-정화-플로 메커니즘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논문을 다수 남기기도 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화폐가치의 안정이나 대외균형이 금에 의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금 보유액이 많지도 않고 파라과이, 온두라스, 과테말라처럼 광산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은 한국이 금본위제도를 따르는 일은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금본위제도 대신 관리통화제도를 실시하되 통화신용 정책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금융 통화위원회는 7인의 위원과 7인의 대리위원으로 구성했다. 재무부 장관이 의장을 맡는 가운데 한국은행 총재를 포함하여 총 4인의 위원을 정부 측에서 추천 또는 직접 참석하도록 하였다(재무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농림부 장관·기획처 추천 인사). 이는 당시 다른 신생 독립국에 비하여 정부 측 추천 위원의 비중이 가장 작은 것이었다. 본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발권력의 통제장치가 없는 상태에서는 통화신용정책의 독립성을 기하기 위해서 정부 측 위원 비중을 낮추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금융 통화위원회의 구성이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정부의 대출 압력과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입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부 인사의 참여폭을 더 줄여야 하겠으나 경제활동에서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컸고 민간의 인적자원은 형편없었다. 결국 “정부의 통제권밖에 있는 사람을 찾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렵다"라는 이유로 정부의 추천권을 그 정도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장관이나 민간 이익단체에게 추천권을 허용하는 경우는 외국에서는 사례를 찾을 수 없는 희한한 방법이었다. 블룸필드는 이런 고육지책을 뉴욕 연준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해서 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조선은행 직원들은 금융 통화위원회가 설치되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정부가 비록 중앙은행의 단독주주라고 하더라도 주주로서의 권한은 제한되어야 하며, 그것이 상법의 원리와 중앙은행 제도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는 설명을 듣고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는 인사권만 행사할 수 있되, 금융 통화위원회 위원들의 임기가 가급적 보장되어야 하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임명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그제야 알아들었다. 그리고 총재의 자격을 규정한 제22조를 번역하는 데에 있어서 “person of integrity and recognized experience(충분한 경험과 성실성을 갖춘 인사)”를 “고결한 인격과 금융에 대한 탁월한 경험을 가진 자”라고 번역했다. 다분히 구용서 조선은행 부총재를 의식한 번역이었다. 신병헌 조사과장은 초대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될 것이 예상되는 구용서를 향해 지극히 문학적인 표현으로 존경심을 표시했다.
  
블룸필드가 금융 통화위원회 구성 다음으로 신경 쓴 것은 외화보유액의 효율적인 관리였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원조해주는 잉여농산물로 경제를 꾸려나가는 가운데 역시 미국 정부가 원조해준 약간의 달러를 외화보유액으로 가지고 있었다. 금액이 얼마나 적었던지, 500달러 이상의 지출이 있을 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승낙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다른 궁핍한 신생국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외환 집중제를 도입하고 그 관리를 중앙은행에 맡기는 방법을 생각했다. 
  
외환집중제도하에서는 관리자가 둘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블룸필드는 한국 정부가 가진 외화자산까지 한국은행이 매입하고 이를 관리하는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즉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최초의 한국은행법 제3조)으로 통화 기치의 안정 및 은행, 신용 제도의 건전화와 함께 “정상적인 국제무역, 외환 거래의 달성을 위한 국가의 대외결제준비자금의 관리”를 포함하고 한국은행만이 유일하게 보유하도록 하였다(제101조, 102조). 나아가 정부가 보유하는 외화자산도 전부 한국은행에 팔도록 하였다(제104조). 그렇게 되면 민간기업을 상대로 외화를 대출하거나 파는 데서 오는 정부의 영향력은 한국은행으로 옮겨지게 된다.
  
한국은행의 힘은 외화자산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본법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한국은행에 부여되니 재무부와 그 관하국에 속한 모든 권한, 의무, 기능은 한국은행에 이양된다(제109조)”는 조항에 따라 재무부 이재국이 행사해오던 감독 업무까지 한국은행으로 이관된다. 이것은 조선은행이 수행하던 상업은행 기능을 포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선물이다. 이런 위상의 강화에 맞추어 조선은행이 받아오던 재무부로부터의 검사나 예산통제가 폐지되고 정부기관과 마찬가지로 심계원(오늘날의 감사원)의 검사를 받게 된다(제33조). 또한 한국은행의 재산과 업무에 대한 정부,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세금과 부과금도 면제된다(제110조).
  
블룸필드 일행은 한국의 실상을 관찰하고 미국에서 가져온 매뉴얼과는 다른 권고안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대로 따라 한 것도 많았다. 통화안정증권과 조사부가 대표적인 예였다. 중앙은행 법에 공개시장조작을 아무리 잘 규정하더라도 미국과 달리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신생 독립국에서는 공개시장조작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과테말라 등 여러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이 직접 은행들에 채권을 발행하여 유동성을 흡수하는 장치를 중앙은행 법에 못 박았는데, 한국은행 법도 통화안정증권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모방했다.
  
또한 신생 독립국이 발전하려면 경제 전문가들이 필요한데, 대체로 정치 질서와 재정이 부실한 후진국에서는 정부가 우수한 자질을 가진 고급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미 연준은 외국에 자문할 때 보통 중앙은행에 조사부를 설치하도록 권고했다. 블룸필드도 경제조사업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조사부를 법정 부서로 격상시키는 한편, 일반인뿐만 아니라 정부에도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제정 한국은행법 제38조, 현행법 제86조).
  
나아가 한국은행의 장래를 심고원려하여 “한국은행은 경제, 통화 은행 분야 전문 인력의 연수를 장려·후원하고, 뛰어난 직원 또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 학업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안 제42조)”는 조항을 마련했다. 또한 자신과 같은 사람이 또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한국은행은 필요시 외국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다(안 제43조)”는 조항도 만들었다.(이 조항들은 나중에 정부가 삭제하였다.)
  
블룸필드 주변에서 그를 돕던 조선은행 직원들은 이런 조항들이 “중앙은행의 힘은 행정적 규제 권한이 아니라 조사연구 기능에서 나오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들은 블룸필드로부터 중앙은행 제도에 관한 이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 조사부 직원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까지도 전수받았다. 그리고 장차 조사부를 한국은행의 핵심 조직으로 키울 것을 다짐했다. 그것은 동방박사의 보이지 않는 선물인 동시에 진정한 선물이었다.
  
해가 바뀌어 1950년이 되면서 한국은행법 초안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블룸필드와 젠센은 법률가가 아니었고, 한국은 법률체계도 미국과 달랐다. 심사숙고 끝에 블룸필드 일행은 ECA 법률고문으로 한국에 와 있던 에른스트 프랭켈에게 자문을 받기로 했다. 프랭켈은 대륙법 계통의 독일 법을 전공하고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간 정치학자였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법까지 공부하여 법학으로만 두 개의 박사학위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ECA 법률고문으로서 헌법과 국회법 초안을 다듬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한국 법률체계에 정통했던 그는 블룸필드 일행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크고 작은 문제를 전부 집어냈다. 가장 많이 지적한 것은 법조문으로는 적절치 못한 단어와 표현 들이었다. 금융 통화위원회 위원은 반드시 공무원의 신분을 갖도록 해야 한국의 다른 법률과 마찰이 없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전부 33개 조문에 대해 토를 달고 수정을 권고했다.
  
이 제정안을 본 정부는 기분이 틀어졌다. 거의 모든 조항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했다. 블룸필드는 “이럴 바에는 왜 우리를 불렀느냐, 돌아가겠다"라며 짐을 싸는 시늉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간은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진행되는 한국은행 법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정부 측의 법조문 변경 시도를 제압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예상외로 블룸필드의 저항이 큰 상태에서 김도연 장관의 채근이 계속되자 송인상 이재국장은 처음의 반대 의사를 누그러뜨리고 체념했다.
  
국회는 4월 18일 한국은행 법을 본 회의장에 올리고 찬반 토론을 시작했다. 3월 18일 법안을 접수한 지 정확히 한 달 뒤였다. 처음에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금융 통화위원회의 권한이 대통령의 권한보다 더 커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껍데기 대통령이고 조선은행 총재는 알맹이 대통령이다(김주선 의원)”라는 의견도 나왔다.
  
결론이 나지 않자 4월 21일 다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날 표결을 앞두고 김도연 재무장관이 발언대에 섰다. 그는 5월 말로 예정된 의회 해산과 더불어 장관직을 그만두는 것이 예정된 사람이었다. 한국은행 법이 재무부 장관으로서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을 안 그는 “위헌 여부를 충분히 심사한 결과 다른 법률에 저촉되는 면이 없다는 것을 확언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표결이 시작되었다. 표결에는 200명의 재적의원 중 102명이 참석했다. 참석인원이 적었던 것은 5월 말로 제헌의회가 해산될 예정이라서 모두들 지역구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102명 중 78표의 찬성 표로 한국은행 법이 가결되었다(반대 6, 기권 18).
  
이후 한국은행 법은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5월 5일 법률 제138호로 공포되었다. 건국 직후 국방, 치안, 사법, 조세, 재정 분야에만 매달려왔던 국회가 드디어 금융에 눈을 돌리고 통과시킨 최초의 금융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은행 법을 계기로 상법이 아닌 특별법에 의해 등기되는 최초의 법인이 출현하게 생겼다. 이 문제를 접한 대법원은 대법원 규칙 제1호로 ‘한국은행 등기 처리규칙’을 제정하고 한국은행이라는 독특한 조직에 설립에 필요한 특별 등기절차를 마련했다.
  
6월 5일에는 예상대로 조선은행 초대 총재에 구용서가 임명되고 제1차 금융 통화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구용서 총재가 조선은행과 한국은행의 총재로서 자산 부채 양수도 계약 양쪽에 서명을 했다. 이로써 한국은행 출범에 필요한 모든 조치가 끝났다. 그리하여 6월 12일 창립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한국은행 본관, 사적 제280호


  
  
참고 자료
  
‘숫자 없는 경제학’, 차현진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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