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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30. 2018

네덜란드와 최초의 증권거래소

네덜란드와 최초의 증권거래소
  
17세기, 회사의 지분이 대규모로 거래되고 파생상품까지 거래된 사례는 암스테르담이 유일했지만, 다른 도시들에도 하나둘, 지분을 발행하며 주식회사들이 설립되었다. 1600년 영국에서는 영국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 EIC)가 창립되었고, 이탈리아의 제노아나 베니스 같은 도시국가에서는 지분을 발행하는 회사의 역사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영국의 이러한 회사들의 지분은 시장에서 거의 거래되지 않았다. VOC에 비해서 회사의 규모가 훨씬 작은 데다, VOC처럼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운영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EIC의 주주들은 단기간만 지분을 보유하면서 회사에 새로운 자본이 필요할 땐 다시 새 주주들을 모아 지분 청약을 받았는데, 이런 형태는 1657년까지 지속되었다. EIC의 주주들은 지분을 샀다가도 금세 투자금을 돌려받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VOC의 주주들처럼 굳이 시장에서 지분을 트레이딩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파생상품의 경우는 암스테르담 밖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런던에서 주식 관련 파생상품이 등장한 것이 1690년이니,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당당하게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이 얻은 이익이 있을까?
  
간단하게 대답하면 ‘아니요’다. 암스테르담이나 네덜란드 공화국은 VOC 지분 트레이더들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부유해졌을 것이다. VOC의 지분을 사거나 파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돈을 이러 저리 옮기는 일에 불과하다. 한 트레이더의 수익은 곧 다른 트레이더의 손실이었다. 주식 가격이 오르면 전체적으로 트레이너들의 수익도 올라가지만, 그것은 VOC가 영업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로, VOC의 지분들이 얼마나 잘 거래되는가 하는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분 거래 그 자체만으로는 경제적인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7세기에는 심지어 VOC 지분 거래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번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상인들이 이쪽에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쏟다 보니 다른 실물 경제 화동을 등한시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비판론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예로니무스 펠터르스의 경우를 보면, 그는 한평생을 트레이드를 했다. 담 광장에 가는 날도 있었고, ‘행동주의자들의 모임’에는 거의 매일 나갔다. 트레이딩 파트너나 정보원들을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받는데 들어가는 시간도 상당했으며, 거래소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거나 불확실성이 커지는 때면 하루 종일 트레이딩에 매달렸다.
  
하지만 펠터르스가 지분 트레이딩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뭔가 다른. 사회적으로 좀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암스테르담에는 운하 옆 대저택 한 채. 근교에 별장 한 채가 있었다. VOC 지분 트레이딩에 뛰어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상인으로서 아주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고 난 다음이었다. 그에게 있어 트레이딩은 일종의 흥미진진한 취미생활이었을 수도 있다. 주식시장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그저 여유 있는 삶을 즐기는 신사로 살았을 것이다.
  
물론 펠터르스처럼 부유한 투자자들, 트레이더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트레이딩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들이 좀 더 생산적인 직업을 찾아서 공화국 경제에 더 보탬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비즈니스는 그들 개인에게는 분명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주식시장이 존재했기에 VOC의 지분이나 파생상품에 돈을 단기간 혹은 장기간 투자해서 돈을 벌 수 있었고, 파생상품을 이용해 포트폴리오 리스크를 조절할 수도 있었다. VOC 지분 거래 시장은 투자자 개개인에게 이익을 주었고, 결국 간접적으로 공화국 경제에도 도움을 준 셈이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이 트레이딩 시장은 VOC뿐 아니라 지분을 공개하지 않은 다른 기업들에게도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기업들이 지분 청약을 받았더라면 많은 투자금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 특히 황금시대를 맞은 홀란트 지방은 돈이 넘쳐나고 있었다. 빠르게 부가 축적되어 사람들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고민할 지경이었다. 데 라 베가는 <혼란 속의 혼란>에서 “돈의 홍수”가 났지만 그 돈을 놓아둘 곳이 많지 않다고 적었다. VOC처럼 큰 다른 기업들도 지분을 대중들에게 팔았더라면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VOC를 제외하곤 그렇게 한 기업이 없었으며, VOC 역시 1602년의 최초 지분 청약 이후엔 추가 청약을 받지 않았다. 회사가 돈이 필요할 때는 대출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1672~1673년을 제외하면 지분 가격은 1640년대 이후 400 이상을 유지했다. 신규 청약을 시도했더라면 큰돈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VOC의 이사들은 주식시장을 이용해 자본금을 더 늘릴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 같다. 17인의 이사회 회의록을 뒤져봐도 이에 대해서는 논의된 바가 없다.
  
VOC 외에, 공개적으로 거래되는 주식(지분)을 발행한 또 다른 회사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Geoctroyeerde Wesindische Compagnie, WIC)였다. 네덜란드 공화국 정부는 VOC에는 동아프리카 / 아시아 지역과 거래할 독점권을, WIC에는 서아프리카 / 북남미 지역과 거래할 독점권을 주었다.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을 경계로 동과 서를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1621년, WIC의 지분 청약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회사가 설립되기 전, 스페인과의 ‘12년 휴전 시대(1609~1621)’동안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미 카리브 해를 비롯한 북남미 지역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다. 1621년 스페인과 전쟁이 다시 시작됐을 때, 상인들은 굳이 새로운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 이미 갖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정부가 WIC에게 서아프리카 / 북남미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민간 상인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VOC의 주주들 역시 회사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을 때였다. 그러니, VOC와 여러모로 비슷한 WIC에 투자하고자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WIC는 결국 실패했다. 1674년 무렵 채무가 너무 커져서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졌다. 결국 WIC는 파산을 선언하고, 곧바로 다시 ‘제2의 서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오리지널 WIC의 주주들은 의무적으로 새로운 자본을 투입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2의 WIC는 잠시 성공한 듯 보였으나 곧 다시 빚이 쌓여갔고, 제1, 제2의 WIC의 재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상인들은 이 회사의 지분을 거래소에서 따로 사려 하지 않았다. 거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회사가 존속되는 내내 지분 거래 가격은 아주 낮게 형성됐다. 심지어 장부 가치에도 못 미치는 때도 많았다.
  
17세기를 통틀어 공개적으로 지분이 거래되니 회사가 VOC와 WIC 단둘뿐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만 해도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산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장에 들어가는 값비싼 장비들은 아직 발명되기 전이었고, 양조장 정도가 나름대로 큰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었으나 대부분 소유주의 재산에 은행 빚을 보태서 운영 가능한 정도였다. 수천 명의 직원과 거대한 창고들, 그리고 많은 수의 상선과 함선이 필요한 VOC, WIC는 당시로서는 특이한 기업이었다.
  
주식 발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회사가 주식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화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회가 기업의 주식 발행 신청을 모두 거부했던 것인지 아니면 기업들이 신청할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후자일 것이다. VOC와 WIC 사례에서 보듯 의회는 지분을 팔게 해주는 대신 회사의 경영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업인들 쪽에서는 이런 상황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주식의 발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1660년경에 이르자 현물 거래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대신 선도거래와 옵션거래 시장이 동시에 꽃을 피웠다. 트레이더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분을 담보로 맡겨서 돈을 빌릴 수 있었고, 매달 말 서로 대금을 정산했다. 또 ‘행동주의자들의 모임’과 같은 회원제 트레이딩 클럽들이 생겨나면서 투기꾼들에게 계약 이행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망이 제공되었다. 시장은 계속 자라나, 1680년대 말 VOC 장부에 나타난 지분의 명의 이전 건수는 1660년대보다 50% 많았다. 하지만 1720년까지는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 공화국 밖의 사정은 좀 달랐다. 오랜 세월 런던의 주식시장은 암스테르담에 비해 크지 않았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분은 상대적으로 소량만이 거래되었다. 그런데 1690년경부터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런던의 시장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1699년 빌럼 3세가 영국에 건너가 왕이 된 것과 관련이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타이밍을 보면 그럴 수 있으리라 짐작이 가능하다. 빌럼 3세와 함께 네덜란드의 금융 노하우도 일정 부분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1690년 런던 시장의 지분 거래량이 치솟으며, 암스테르담 시장과 똑같은 형태의 파생상품들도 거래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그 몇 년 사이 무려 25개 이상의 회사들이 주식을 발행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주식투자 열풍이 불었다. 런던 시장의 빠른 성장에는 일정 부분 ‘9년 전쟁(1688~1697)’이 영향을 미쳤다. 영국이 참여했던 이 전쟁에서 무기산업이 호황을 이루면서, 무기와 각종 물자를 공급하는 회사들 상당수의 지분이 런던 주식시장에서 거래된 것이다. 물론 이 회사들 모두가 성공을 거둔 건 아니어서, 대부분은 17세기가 끝나기 전에 청산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영국인들은 주식시장의 힘을 이용해 큰 자본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영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다소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9년 전쟁에 들어가는 돈 때문에 정부는 엄청난 빚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는데, 민간 기업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지분을 발행해서 큰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주식 열풍을 이용해서, 정부의 빚을 주식회사 형태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남해회사이다. 영국 정부는 채권을 갖고 있는 투자자들에게 돈을 갚는 대신 남해회사 지분을 주는 한편, 이 회사에는 남미 지역과의 무역 독점권을 주었다.
  
초반에는 이런 아이디어가 제대로 통하는 듯했다. 정부는 예전처럼 채권 보유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었고, 남해회사에 대한 투자 열풍이 불면서 주주들은 주주들대로 즐거워했다. 주가가 계속 오르자 런던 사람들은 주식시장이 무한한 돈의 원천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회사들이 아무 계획도 없이 만들어졌는데, 단지 주식시장에서 돈을 끌어모을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이런 전 국민적 투기 현상은 결국 1720년 ‘남해회사 버블’ 사건으로 이어졌다. 1720년 한 해 동안 주가가 10배 가까이 뛰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1720년에는 네덜란드에서 40개 이상의 회사가 느닷없이 설립되어 주식을 발행했다. 대부분은 런던의 주식시장에 상장됐던 회사들처럼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그중엔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해 로테르담에서 설립된 보험회사 중에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현재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는 회사가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공화국 정부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시장을 감독했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주식을 팔기 시작한 회사의 수도 적었고, 거품의 피해도 그만큼 적었다.
  
1720년의 남해회사 버블 사태는 주식시장이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시장을 좀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주식 거품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한 여러 규제들이 도입되었다. 훗날 산업혁명을 겪으며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이 설립됐을 때, 예를 들어 19세기의 철도 열풍이 불었을 때, 사람들은 과거 남해회사 버블 사태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좀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주식투자에 접근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런던의 주식시장은 암스테르담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경험과 지식은 훗날 전 세게 수많은 주식시장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현대의 증권투자는 17세기 암스테르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범위도 넓다. 하지만 펠터르스, 르 매르, 페레이라 같은 암스테르담의 VOC 지분 트레이더들이 만들어낸 증권 거래의 기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VOC가 설립되고, dis 알레츠 토트 론덴과 마리아 반 에그몬트 사이의 첫 지분 거래가 암스테르담 사무소의 서기 바렌트 람프의 회계 장부에 기록된 지 4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트레이더들은 여전히 선도거래, 옵션, 리포 같은 방식으로 증권을 거래하고 있으며, 거래 비용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4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주식시장에서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주식을 사는 ‘투자자’, 매수와 매도를 반복하며 단기적인 가격 차이를 노리는 ‘투기꾼’, 그리고 법의 허점을 노리고 다니는 꾀돌이들이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다.
  
  
  
  
참고 자료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로데베이크 페트람 지음, 2011, 이콘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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