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행위와 신용의 등장
인류가 금융행위를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였다. 기원전 629년 이후 약 100년간 신바빌로니아에서 활동한 에지비 가문(the House of Egibi)이 귀금속·집·가축의 거래, 약속어음 발행, 중개무역 과정에서의 신용 제공, 예금 수취 및 대출 등을 기록한 설형문자를 남긴 것을 보아도 상당한 수준의 금융 행위가 오래전부터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도 대출, 이자 수취, 보증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성전 앞에 좌판을 벌이고 장사하던 환전상들을 내쫓았다는 일화가 발견된다.
에지비가문의 임대 계약서, BC494
에지비가문의 약속어음, BC543
에지비 가문의 은 약속어음, BC548
연구에 따르면 가장 기초적인 대출과 이자 수수 관행은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곡물을 빌린 뒤 이를 추수 후에 갚았으며 동물을 빌린 경우에는 새끼로 갚았다. ‘이자’가 수메르어로는 ‘송아지’라는 의미를, 이집트어로는 ‘새끼를 낳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금융위기의 역사도 금융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흔히 최초의 금융위기는 5세기에 그리스 아테네를 구심점으로 한 델로스 동맹의 파산으로 알려져 있다. 델로스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에 포위되면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금융위기는 지폐와 은행이 등장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오늘날 경제 위기나 금융위기를 보면 은행이 항상 위기의 한복판에 있음을 보게 된다. 은행의 등장과 함께 소위 부채(debt) - 돈(money) - 신용(credit)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은행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빌린 돈(예금)을 또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 주는 특이한 회사로, 일반 회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가구회사의 자산은 만들어진 가구, 공장 그리고 가구를 만드는 기계이고 부채 항목에는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빌린 차입금(대출 또는 회사채)과 공장의 설립자금을 댄 주주들의 자본금이 포함된다. 하지만 은행의 부채는 예금과 자본금이고 자산은 대출이다. 따지고 보면 예금주에게 돈을 빌려 차입자에게 대출을 해주는 중개 기관인 은행은 대출의 성격에 따라 수익을 내기도 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먼저 내(예금주)가 은행에 돈을 빌려주고 떼일 위험보다 은행이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주고 떼일 위험이 높다. 이를 신용 위험(credit risk)이라고 한다. 또 예금주는 언제든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요구불 예금인 경우) 할 수 있지만 은행은 기간을 정해 대출해주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를 유동성 위험(liquidity risk)이라고 한다. 은행이 유동성 위험에 처하는 것은 예금주들의 돈을 일부만 보유하면서 대부분 대출 등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시중에 더 많은 돈을 풀게 되는데 이를 신용 창출(credit creation)이라고 한다.
현대 은행업의 특징인 이 신용 창출 기능은 사실 하나의 돈에 두 개의 배타적인 소유권이 부여되면서 가능해졌다. 즉, 은행은 예금을 받으면서 언제든 돌려달라고 하면 내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은행 금고안의 돈은 여전히 예금주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은행은 이 돈을 대출해주고 대출 채권을 소유한다. 초창기 은행들은 금과 은 등 경화를 예금으로 받고 대출할 때는 은행권을 교부했기 때문에 항상 금화 및 은화보다 많은 통화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쟁과 같은 큰 사건이 터져 일시에 예금주들과 은행권 소지자들이 몰려들 경우 지급불능 상황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은행 파산이 잦았고 은행에 대한 불신이 높았다.
이를 극복하고 고객들의 신뢰를 누린 은행들이 있었는데 바로 암스테르담은행과 스톡홀름은행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금을 취급하는 부서와 대출을 취급하는 부서를 완벽하게 분리하고 예금에 기반한 지급 결제 수단을 제공한 금융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다모클레스의 칼’, 유재우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