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건우 Apr 06. 2018

메디치 가문의 시작

메디치 가문의 시작
  
  
900여 년 전에 베네치아는 이미 유럽 대륙에 인접한 수상 무역의 중심이었다. 세계 각지의 화물은 이곳으로 운송되었고, 화물과 함께 세계 각지의 화폐도 이곳에 도착했다. 1157년에 세계 최초로 현대적인 개념의 은행이 베네치아에 세워졌다. 은행업은 베네치아는 물론이고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피렌체까지 상업을 발달시켰다.
  
피렌체는 지금도 6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모든 건축물과 동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어떤 사문의 옛이야기를 품고 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토스카나 북부에서 피렌체로 이사를 왔을 때 피렌체의 경제는 이미 상당히 발달한 상태였었다. 메디치 가문은 양모 사업을 했는데, 양모 사업은 은행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은행업과 대부업 간의 협조적인 관계를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면 상업은행이라 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원래 양모 사업을 했지만 은행을 운영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욱이 은행을 운영하면 목장을 관리할 필요도 없고, 양들이 전염병에 걸릴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은행 운영은 손쉽게 돈을 버는 장사였다. 하지만 은행을 운영하면 돈을 벌 수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는 없었다. 은행가는 부유하지만 지위가 없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의 2대 수장은 코시모 데 메디치다. 현재 소상화 1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초상화 속의 코시모는 소박하지만 잘 만든 도포 같은 빨간 모피를 입고 있다. 피부가 누렇고 검으며 볼이 움푹 패여, 높은 코와 커다란 귀를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꼭 쥔 매우 거칠어 보이는 두 손이다. 두 손을 꼭 쥔 그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이 느껴진다.
  
코시모의 불안은 그의 직업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화폐를 이용해 돈을 벌었는데,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가문을 부유하게 키워냈다. 하지만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 일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음식을 땀 흘리고 힘들게 일해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일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회성을 상징했다. 돈으로 돈을 버는 일은 자연의 규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16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고, 심하게는 범죄로까지 여겼다. 중세의 위대한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는 그의 대표작 <신곡>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을 7층 지옥으로 보냈다. 
 

7층 지옥

  
<신곡 - 지옥 편> 제7층 - 광폭한 자들
  
미노타우로스가 지키며 끓은 피로 가득한 플레케톤이 둥글게 감싸는 이곳은 지옥 7층이다. 과격한 자들, 암살자들, 폭군들, 그리고 주전론자들이 강물 속에서 자신들의 냉혹한 행위를 후회하며 도망치려는 자들은 켄타우로스들이 화살로 쏜다. 이곳의 악취는 고약하다. 또한 자살자들의 숲이 있으며, 이곳은 자라다 말고 비틀어진 나무들이 있고 배배 꼬인 나뭇가지에는 독과일이 매달려 있다. 신성모독자들과 남색가들은 고통에 몸을 비틀며 그들의 혀는 이제는 비통함을 울부짖고 있으며 눈으로부터는 슬픔이 쏟아져 나온다. 자연과 예술 그 어느 쪽도 따르지 않는 고리대금업자들 역시 지옥 7층에서 함께한다.
  
  
이탈리아 교회는 지금까지도 “로마 카톨릭교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교의를 매우 중시한다.
  
325년 로마 교회는 모든 성직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금지했고, 얼마 뒤 이 금지령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했다. 1179년 로마 교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신자들을 출교하겠다고 발표했다.
  
최초로 교의와 도덕적 속박을 깨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허락한 민족은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교리는 유대인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이자를 받으면 안 되지만 비유대인에게 빌려줄 때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규정했다. 교리의 차이로 유대인은 최초로 대출 이자를 받는 민족이 되었고 사회적으로 질책을 받았다. 
  
1182년 프랑스는 직업적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유대인을 추방했으며, 1275년 잉글랜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범죄 행위로 선포하고 1290년에 추방령을 발표해 잉글랜드에 사는 모든 유대인을 추방했다. 대출 이자에 금지령을 내린 종교와 대출을 해야 하는 사회의 모순적인 관계 사이에서 유대인은 희생양이 되었다. 사람들은 금전 거래에 따르는 죄책감을 모두 유대인에게 돌렸다.
  
코시모는 돈에 대한 욕망을 가득 채웠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고, 이자를 챙겨 부자가 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부의 유혹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는 한편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숙독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수시로 은행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부유해질수록 하느님과 거리가 멀어질까 걱정한 코시모는 죄를 덜어낼 방법을 생각하다가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는 창구를 찾았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도 또 다른 해방 창구를 찾는 중이었다. 중세 유럽은 엄격한 종교가 사회 전체를 속박하는 암흑기였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와 이에 따른 이성의 각성은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신앙심을 뒤흔들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옛 로마 시대의 자유와 평등을 그리워하면서 옛 로마 문명의 부흥을 외치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계승했다. 고대 그리스는 인류를 몸으로 태어난 신이자 지상에 태어난 신의 계승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동시에 인간의 새로운 발견은 사회의 각 방면, 특히 문화와 예술 영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후대 사람들은 이 운동을 ‘르네상스’라 부른다.
  
예술은 다양한 시각으로 현실 세계를 관찰한다. 예술 작품에는 추함과 아름다움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공존하는데, 이는 관찰자들이 자신의 시각에 따라 세계를 서로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 속에서 코시모는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영혼의 해탈을 얻었다. 하느님 외에 누가 공짜로 남에게 돈을 빌려 주겠는가? 남에게 돈을 빌릴 수 없으면 어떻게 빈곤과 위기에서 벗어나겠는가? 예술을 통해 영혼의 해탈을 얻은 코시모는 예술 작품에 돈을 투입하면 영혼이 정화되고 이런 돈은 하느님도 허락하실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재력을 동원해 문예부흥을 돕기로 했다.
  
르네상스는 코시모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인류 사회 전체의 문명 발전도 촉진했다. 르네상스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천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요컨대 인성의 아름다운 면뿐 아니라 추악한 면도 포용해야 하고, 인권과 신권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신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는 인식이다. 인식의 전환은 화폐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부를 추구하는 것이 더는 난처한 일이 되지 않았다. 부는 탐욕과 이기심의 상징이 아니라 부지런한 노동과 지혜의 열매였다.
  
메디치 가문은 인권을 신권의 속박에서 해방시킨 문예부흥운동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이들이 후원한 인사 명단에는 다빈치, 단테, 미켈란젤로, 조토, 라파엘,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같은 위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갈릴레이도 메디치 가문의 귀빈이었고, 자신이 발견한 행성에 메디치라는 이름을 주어주기도 했다.
  
르네상스는 한 은행 가문을 권력의 최고봉에 올려놓았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정치권력을 손에 넣은 뒤 교황 3명, 황후 2명, 대공 3명을 탄생시켰다.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은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후 더는 종교와 왕권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않았고, 부유한 상인이 권력을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되었으며, 은행가도 사회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1543년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대출 이자를 받는 것을 합법이라고 발표했고, 1545년 종교개혁운동을 벌인 신교의 지도자 장 칼뱅(Jean Calvin)은 다른 사람이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돈을 빌려준 사람은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선포했다.
  
중세의 지중해 연안에서 17세기 유럽까지 화폐의 역사는 새롭게 쓰였다. 1347년 이탈리아 제노바의 상인들은 화폐를 제일의 보험 증권으로 바꿨고,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화폐를 제일의 주식으로 전환했다. 유럽의 공상계층은 자본의 힘에 기대 거대한 부를 쌓고 독립적인 자산 계급을 형성했다. 1867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이 주도하는 사회경제와 정치제도를 ‘자본주의’라 불렀다.
  
  
  
참고 자료
  
‘화폐 경제 1’, 중국 CCTV 다큐멘터리 <화폐>제작팀, 가나출판사, 2014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진흙판에서 시작된 화폐의 역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