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화폐
화폐는 서양에서 우여곡절 끝에 화려하게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머나 먼 동양에서 화폐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일본의 화폐 문화는 초기에 중국에서 유입되었다. 일본의 화폐 박물관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폐를 소장하고 있다. 상면에 또렷하게 쓰인 한자는 이 지폐가 중국에서 왔음을 알려준다. 중국 북송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이 지폐를 당시 사람들은 ‘교자交子’라 불렀다. 교자의 고향은 천부지국(天府之國, 토지가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한 곳)이라 일컬어지는 중국의 청두다. 청두는 예로부터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고 산물이 풍부했으며 북송 시대에는 이미 비단 제품의 주요 산지였다.
교자를 발행하기 전까지 쓰촨 지역은 철로 만든 쇠돈을 썼다. 당시에 비단 1필을 사려면 쇠돈 2만 문이 필요했다. 하지만 2만 문의 무게는 무려 130근에 달해서 휴대한 채 거래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자 민간에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재력이 막강하고 신용이 두터웠다. 상인들은 이들에게 금속 화폐를 맡기고 특수 제작한 영수증을 받은 뒤 시장에 가서 장사를 했다. 이 영수증이 바로 교자이고, 교자를 발행하는 상가를 교자포라 불렀다.
중국의 화폐는 조개껍데기에서 칼 모양의 화폐인 도폐, 안에 사각형의 구멍이 난 원형의 금속화폐, 쇠돈을 거쳐 매미 날개처럼 얇은 지폐인 교자로 발전했다. 형태상 가장 철저하게 변신한 교자는 신용 화폐의 출현을 알렸다.
994년 청두의 철전감은 화폐를 찍는 업무를 중단했다. 이후 1005년까지 장장 11년 동안 화폐를 찍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에는 화폐가 부족하지 않았다. 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멀리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간 마르코 폴로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든 지폐는 엄격한 심사와 권한 아래 발행되었고, 지폐마다 담당자가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황제의 도장이 찍히면 지폐는 황제가 부여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관리를 소홀히 해서 도장을 찍지 않은 담당자는 사형에 처했다.”
중국의 교자는 서양의 지폐보다 600여 년 빨리 세상에 등장했다.
사람들이 종이를 돈처럼 쓰게 하려면 반드시 기준이 되는 실물 상품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쌀과 보리를 실물 상품으로 삼았다. 그럼 교자를 발행한 상가에 쌀과 보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했을까? 교자에 곡식 창고를 그려 넣었다. 우리 집 곡식 창고는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최초의 지폐 송나라 교자(交子)
북송시대 교자
중국은 세계 최초로 신용 화폐를 사용했다. 하지만 왜 화폐 문화가 널리 퍼지지 않았을까? 최초로 교자를 발행한 교자포는 왜 현대적인 은행으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왜 화폐는 상공업과 결합해 자본으로 탈바꿈하지 못했을까?
고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에 대한 구분, 사회 계급에 대한 구분이 있었다. 이윤과 부를 추구하는 상공업자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고 차별 대우를 받았다. 서한 초기부터 상인은 비단옷을 입거나 수레를 타거나 토지를 사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상인의 후손은 정부의 관료가 될 수 없었다.
상인에 대한 중국 사회의 배척은 근본적으로 ‘의義’와 ‘이利’의 싸움이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유가는 시장과 화폐가 아니라 의로써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규정하라고 주장했다.
상인에 대한 배척이 있었지만 중국 역사에도 거상이 등장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진나라의 여불위,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심만삼, 청나라의 호설암은 천하를 호령할 정도로 부유한 거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상업의 귀재들을 부를 때 관상(정부 관료에게 의탁해서 돈을 버는 상인)이라는 호칭을 썼다. 중국 역사에서 상업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독립된 상업 문명을 가질 수 없었다. 상업이 번영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화폐 문화는 중국의 기나긴 역사의 강에서 우담화처럼 잠깐 피었다가 금세 사라질 운명이었다.
사농공상은 고대 중국 사회의 가장 안정적인 사회 구조이자 고대 국가들이 몇천 년 동안 신봉한 문화와 전통이었다. 17세기에 일본에서 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사회 구조는 동양의 여러 국가에서 만연했다.
일본 도쿄의 금융지구에는 100여 개의 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 등 여러 금융기구가 들어찬 빌딩이 솟아 있고, 매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한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기업의 자본화가 가장 잘 이루어졌다. 훗날 기업의 자본화는 일본 기업이 세계화를 실현하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금융의 자유화를 추진하고 효과를 얻은 뒤 일본에 진출했다. 그래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유럽계, 미국계 금융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유럽 금융, 미국 금융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이러한 것들 때문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때부터 서양의 공업기술을 배우고 화폐 문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자본화의 촉진으로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사농공상의 계급제도가 철저하게 무너졌다. 사회의 최고 계층인 사무라이는 몰락한 데 비해 최하위 계층인 상공업자는 사회를 지배하는 자산 계급으로 성장했다. 현재 일본은 전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국가 중 하나이고, 도쿄의 금융지구는 세계 3대 금융 중심지이며, 엔화는 세계 3대 국제통화 중 하나다.
화폐 문화는 동서양의 고대 문명사회에서 서로 충동하며 영향을 주고받았고, 300여 년 전에 화폐가 뿌리내린 신대륙은 지금 세계 화폐 문화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뉴욕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70만 명이 넘는다. 금융 서비스업은 이미 뉴욕, 나아가 미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중의 하나가 되었다. 미국의 금융업은 1990년대부터 제조업의 생산액을 앞질렀고, 2011년에는 미국 GDP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누군가는 미국의 자본시장이 튼튼하고 금융업이 발달한 것은 화폐 문화를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북미 대륙을 개척한 것은 유럽 사람들이다. 유럽의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유럽의 문명을 계승하면서 유럽의 화폐 문화까지 옮겨왔다. 이 시기에 화폐는 이미 유럽에서 자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했고, 북미 대륙은 이런 토대 위에서 새로운 화폐 문화를 창조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쇄된 100달러 지폐
100달러 지폐에는 미국의 개국 공신이자 ‘독립선언’을 고안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두상이 인쇄되어 있다. 1748년 프랭클린은 <젊은 상인에게 하는 충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하라. 시간은 돈이다. 기억하라. 신용은 돈이다. 기억하라. 돈은 번식하는 성질이 있어 돈이 돈을 낳는다.”
프랭클린의 충고는 개인, 자본가, 나아가 미국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진리에 관한 말이었다.
1901년에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대도시가 되었고, 월스트리트는 세계 자본시장의 중심이 되었다. 1911년 미국의 어느 노동자 잡지는 노동자, 관료, 자본가 등으로 피라미드를 쌓은 만화를 표지에 실었는데, 화폐는 자본이라는 자태로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300여 년의 미국 역사는 곧 현대 화폐 문화가 발전해온 자취다.
1792년 뉴욕 월스트리트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모인 증권 거래인들이 증권거래법에 서명하면서 뉴욕증권거래소가 탄생했고, 1817년에 첫 번째 인공운하를 개통했으며, 1835년에는 처음으로 철로 30km를 깔았다. 1944년 뉴햄프셔 주의 숲은 세계적인 금융 국가들이 병력을 배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세계 금융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받았고, 파운드 대신에 달러가 세계 제일의 화폐가 되었다. 1971년에 전산망 거래 기반의 나스닥 거래소가 설립된 뒤 1986년 마이크로소프트, 2004년 구글, 2012년 페이스북이 상장되었다.
미국은 지금 명실상부한 세계 금융의 중심이고, 미국에서 현대 금융의 상징이 된 화폐의 흐름에 따라 향후 세계 경제의 흐름이 결정된다.
참고 자료
‘화폐 경제 1’, 중국 CCTV 다큐멘터리 <화폐>제작팀, 가나출판사, 2014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