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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Apr 13. 2018

원시 시대의 신용과 이자

원시 시대의 신용과 이자
  
역사시대의 신용은 화폐 주조보다 2000년이나 앞서 존재했다. 화폐 주조의 기원은 기원전 10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인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체계적인 신용 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수메르인은 곡물과 금속을 각각 양과 무게 단위로 타인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이자가 부과되기도 했다.
  
가치 척도 혹은 교환 수단이 발달하기 훨씬 전인 선사시대에도 신용은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환 수단 더 나아가 가치 척도가 존재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는 지역에서조차 일종의 신용 행위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민족학적 증거가 많이 있다. 경제 활동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더 나아가 물물 교환이 성행하기 훨씬 전부터 신용은 존재했다.
  
넓은 의미에서 신용 개념을 고찰하자면 원시시대의 신용 형태에서 뭔가를 추론해낼 수 있다. 원시시대의 신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선 고대인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형제 혹은 이웃에게 종자를 빌려주었다가 수확기에 이를 돌려받았다. 또 이들에게 가축이나 가재도구 혹은 곡식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때 나중에 돌려받을 생각 없이 빌려주었다면 이는 그저 증여 행위에 불과하나 나중에 돌려받는다든가 처음 빌려주었던 것보다 더 덧붙여 돌려받는다면 이것은 대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거래에는 화폐도 거래소도 필요가 없다.
  
오늘날 즉각적인 대상물이나 보수 없이 물품을 이전하는 행위는 증여, ,대출, 절도 등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기숙사 생활을 해봤던 사람들은 증여, 대출, 절도 등의 행위를 항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출’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다. 예를 들어,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자신의 넥타이를 가져갔다면 자신도 그 친구의 물건 중에서 하나를 가져오는 것으로 ‘대출’ 행위는 성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 즉,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신용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원시시대에도 절도 행위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발달하기 전에는 절도에 대한 논리적 대응은 바로 ‘맞절도’ 혹은 ‘보복 절도’였다. 그러니까 소를 도둑맞았으면 자신도 역시 소를 훔쳐 오는 것으로 대응했다. 부족장 간의 ‘증여’는 평화적인 거래의 기본 형태였다. 한 부족장이 다른 부족장에게 뭔가를 ‘증여’할 때는 상대방이 당연히 그에 대해 답례를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이때는 대개 처음의 물품보다 더 값어치가 나가는 물품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증여 물품의 교환기간이 지연되는 경우 이를 일종의 대출 행위로 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원시시대에도 이자 없이 빌려 주는 일이 흔히 있었다. 호의를 표하려고 혹은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친척이나 이웃에게 뭔가를 빌려주는 일이 많다. 이러한 유형의 대출은 대개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잔디 깎는 기계를 빌려주거나 설탕 한 컵을 준다. 거액 혹은 소액의 돈을 빌려준다. 비어 있는 집을 사용하도록 허용한다. 등등.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자가 오가는 대출 그리고 그 이자의 정도다. 고대의 기록을 보면 원시시대에도 이자가 있었으며 이자는 대출 행위에 당연히 수반되는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이웃에게 어떤 도구를 빌려 줄 때는 이자가 오가지 않는다. 단지 빌려 주었을 때의 상태 그대로 되돌려주면 되고 혹시 나중에 자신에게 물건을 빌려준 그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때 자신도 그 물건을 빌려줄 것이라는 묵시적 언약만 지키면 그만이다. 궁핍한 친구나 친척에게 음식물을 주거나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에도 이자는 부과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대출은 호혜주의 성격을 띤 관례상의 ‘증여’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대출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자가 오가는 대출 행위도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자와 가축의 대출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생산적 목적의 대출 행위였다. 종자는 이후 더 많은 종자로 불어난다. 그래서 수확기가 되면 원래 빌려왔던 종자에 이자를 붙여 되돌려 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가축도 마찬가지다. 빌려온 가축이 새끼를 낳으면 이 중 전부 혹은 일부를 이자 명목으로 되돌려 줄 수 있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오늘날의 이자 개념은 이러한 형태의 생산적 대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사시대 초기부터 이러한 형태의 생산적 대출 행위, 즉 상호 합의한 수준의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빌려 주는 일이 일반화됐다. 또 선의에 따라 비생산적인 물품을 이자 없이 빌려 주는 일도 보편화했다. 이처럼 ‘이자가 있는 생산적 대출’과 ‘이자가 없는 비생산적 대출’이 혼용되면서 ‘이자가 있는 비생산적 대출’형태가 등장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다. 이러한 대출 유형들이 고대 법전에 기록됐다.
  
대출은 또 대출의 대상물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동물, 도구, 농지 등과 같이 동일성을 증명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대출이고 또 하나는 종자, 화폐, 식량 등과 같은 일용품의 대출이다. 동일성이 확인되는 물품은 빌려온 그 물품을 그대로 되돌려 주어야 하지만 일용품은 비슷한 종류의 물품을 되돌려주면 된다. 동종 물품으로 상환하는 대출은 대상물의 품질을 평가하는 기준과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필요하다. 사실 원시시대의 측량과 화폐 제도는 바로 이러한 대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고대 동양에서는 곡물을 교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이 일반적이었고 이러한 습관은 아주 오랜 기간 유지됐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상환 수단의 공통분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화폐다. 이자가 있든 없든 간에 곡물이나 토지, 가축, 심지어 화폐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출에 대해 화폐가 상환 수단이 될 수 있다.
  
토지의 대출 혹은 토지를 담보로 한 대출은 역사시대 이전에 발달했던 신용 유형이다. 대출 대상물에서 얻은 첫 번째 수확물(곡식이나 가축의 새끼 등)이 바로 이자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출 대상물과 같은 종류의 것을 이자로 지급하다가 이후 점차 화폐로 이자를 지급하게 됐다. 원금의 상환은 이자와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토지 대출은 토지 자체를 반환하거나 수확물로 분할 상환하는 것도 가능했다. 원금을 반환하지 않고 매년 일정 금액을 영구히 지급하기도 했다.
  
원시시대의 신용 형태를 들라면 이외에도 많다. 몸값, 지참금, 물품 선적 비용, 헌금, 전쟁비용 등을 조달하기 위한 대출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신용의 유형으로는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a) 장기 생산적 대출 (b) 단기 운전자본 대출 (c) 비생산적 소비 대출 (d) 정부에 대한 대출 등이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에 유럽과 아시아 간에 원시적 현태의 물물교환이 시작됐다. 호박, 진주, 부싯돌 그리고 물물 교환하기에 적당한 기타 물품이 그 대상이었다. 홍해에서부터 스위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패총(조개무지)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구석기인들이 조개를 화폐로 사용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태평양 지역의 부족 가운데 지금도 조개를 화폐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가설이 더욱 힘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물물 교환과 조개 화폐의 사용만으로 신용의 적절한 토대가 마련됐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구석기시대의 신용은 기껏해야 부족 간에 가족 간에나 이루어진 것이 전부일 것이다.
  
자본과 신용이 중요해지고 이것이 인류 진보의 동력을 제공하게 된 것은 중석기시대인 기원전 8000년 이후, 특히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5000년 이후에 비로소 가능해졌다. 구석기인은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했다. 신석기인은 농경과 가축 사육을 통해 스스로 식량을 생산했다. 신석기인의 자본은 처음에는 종자의 형태를 취했고 이후 도구와 가축으로 그 범위가 확대됐다. 자본 축적은 아시아와 유럽 지역에서의 인구 급증과 시장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본은 더 많은 재산의 축적과 족장의 세력 강화, 도시의 건설 등을 가능케 했다.
  
가축의 사육은 이후 화폐 경제에서 사용된 수많은 금융 용어의 기원이 됐다. 예를 들어, ‘금전의’라는 의미의 ‘피쿠니어리(pecuniary)'는 ’가축 떼'를 의미하는 라틴어 ‘페쿠스(pec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메르어 ’마스(mas)'는 송아지와 이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자를 뜻하는 이집트어 ‘ms'는 ’낳다‘를 뜻하는 동사 ’msj'에서 파생된 단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은 소의 수를 기준으로 귀금속의 가치를 평가했다. 호머의 장편 대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율리시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재혼을 청하던 구혼자 가운데 한 사람이 황소 열두 마리에 해당하는 청동과 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소는 부족이나 개인이 소유했던 최초의 생산적 자산 혹은 자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됐으며 아프리카와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지금도 이런 식으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 잉여 노동력은 소의 형태로 축적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자본 축적을 가속하기 위해 하인과 노예를 고용할 수도 있었다.
  
소와 곡물에 대해 소비량을 웃도는 수요가 발생하면서 이것이 원시 화폐의 역할을 하게 됐다. 다시 말해, 소와 곡물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상품이 됐고 다른 상품과 교환할 때 이것이 교환의 표준 척도로 사용됐다. 그리고 이자를 부과하여 이를 타인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기원전 5000년경 중동지역에서는 농노나 가난한 농민, 하인 등에게 올리브, 무화과 열매, 견과류, 곡식의 종자 등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동종 수확물로 되돌려 받았다. 현대 원시 종족들이 아직도 이러한 형태의 물품 교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가축 화폐는 대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대출의 대상이었으며 스스로 증식하는 특성이 있다. 식량과 가축은 수메르족, 인도유럽족, 샘햄족 등이 사용한 가장 중요한 화폐 유형이었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미국, 인도 그리고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전의 중국 등지에서도 화폐로 사용됐다.
  
고대 동양에서는 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 신용의 중요성이 커졌다. 광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무생물 특히 금, 은, 납, 청동, 구리 등과 같은 광물을 이자를 부과하여 빌려주는 일이 성행했다. 결국, 고대 동양인들은 무생물 혹은 광물을 마치 번식력이 있는 유기체처럼 취급했다는 의미가 된다. 주조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 무게 단위로 금속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자본은 매우 강력한 경제적 동력이 됐다. 고대 수메르의 문헌과 이집트의 일부 문헌을 보면 금속을 대출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고대 힌두 법전에도 금속 대출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있다.
  
주조 화폐의 기원은 국가가 무게와 순도를 보증한다는 내용의 표식을 새긴 금속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또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토큰(상징표)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측도 있다. 어쨌거나 주조 화폐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경 소아시아로 추정된다. 따라서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이보다 수천 년 전에 이미 천연 금속을 화폐로 사용했었다. 트로이, 소아시아, 미노스, 미케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시리아, 이집트, 이란 등지에서 이러한 유형의 금소 조각들이 발굴됐다.
  
화폐와 신용이 발달하면서 이에 대한 남용과 편견도 함께 늘어났다. 지금도 이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고대 법전들 대다수가 신용의 남용을 금지하거나 신용 행위 자체를 아예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인은 이자를 받고 빌려 주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기원전 450년경의 이란인은 대출에 대해 이자를 받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고대 인도 문헌에서도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면서 이자의 최고 한도를 정해 놓았다. 그럼에도, 성경과 젠드 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 경전), 베다(고대 인도의 성전) 등은 부동산담보 대출과 전당 대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로마에서는 신용은 허용했으나 금리는 제한했다. 그리스인들은 금리 제한이 없는 신용을 독려했으나 인신 담보 등은 금지했다. 
  
선사시대의 대출 이자율을 연구하고자 할 때는 간접적 증거를 활용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인류 최고(最古)의 기록들을 보면 곡물과 금속에 대한 대출 이자율은 연 20~50%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법정이자율의 최고 한도를 정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하는 수단을 마련하고자 애쓴 흔적을 보건대 아마도 실제로는 이보다 높ㅇ은 이자율로 대출 행위가 이루어지는 일이 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곤궁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고 법정이자율의 10배 혹은 20배나 되는 높은 이자를 받아 챙기려는 이른바 고리대금업자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자금 능력이 있는 자본가들 간에는 더 낮은 이자율로 대출 행위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이나 추측 외에 현존하는 원시 부족의 생활 습관을 살펴보는 것에서 유용한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유사한 거래 혹은 대출 행위라는 차원에서 크게 뭉뚱그리면 각각의 이자율 사례가 고대 이자율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추정이 자칫 고대 이자율의 실제 역사를 왜곡할 우려도 있으므로 여기서는 각각의 사례를 개별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썼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특정 시대에 혹은 특정 지역에서 금전적 속성이 부여된 대상물, 즉 화폐로 사용됐던 물품이나 재료로는 크게 173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것은 구슬, 소, 직물, 구리, 금, 곡물, 철, 쌀, 소금, 조개껍데기, 은, 가죽, 노예, 담배 등이다. 그런데 화폐로 사용되는 것이 이렇게 제각각이면 채무자가 빚을 갚아야 할 때 동종 동량으로 정확하게 상환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화폐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게 됐다고 추정할 수 있어진다. 그래서 법이나 관습을 통해 모든 물품 가치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상환 수단이 정해지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법정 화폐’이고 이러한 유형의 화폐가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 됐다. 그런데 민족학적 자료를 보면 물품화폐를 사용하는 원시 경제에서도 대출, 상환, 이자 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가 적지 않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지금의 인도의 미개발지역에서는 곡물이 중요한 교환 수단이자 연지급의 기준이 되는 물품이었다. 인도에서는 다음 수확기에 돌려받기로 약속하고 종자와 식량을 빌려주었다. 대개는 애초 빌렸던 양의 두 배를 상환해야 한다. 이를 금융 용어로 말하자면 이렇다. 수확기까지 남은 개월 수가 x라면 이자율은 연 100% ⨉ 12/x가 되는 셈이다. 동일 지역에서 루피(화폐단위)로 부과되는 대출 이자율이 연 24~36%이므로 곡물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자율이 이보다는 더 높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곡물의 가격은 파종기보다 수확기에 더 싸다는 점 그리고 종자를 빌려 가는 사람들은 직접 루피를 빌릴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기록을 보면 인도 곡창지역은 볍씨 대출에 대한 이자율은 60%로 나타나 있다. 나가족 중에는 소와 들소를 빌려주었다가 이듬해 두 배로 돌려받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의 이자율은 100%인 셈이다. 같은 나가족 간의 대출인데도 화폐를 빌려줄 때는 이자율로 50%로서 이보다 낮았다.
  
2. 20세기 초 인도차이나에서는 쌀 대출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듬해에 50%의 이자를 지급해야 했다.
  
3. 필리핀 오지에 거주하는 원주민 이푸가오족은 동종 물품 상환을 기준으로 대출 행위를 했다. 쌀을 빌려 주었을 때는 다음 수확기에 그 두 배를 상환해야 했다. 이때 이자율은 100% ⨉ 12/x가 된다. 돼지를 빌려주었을 때는 같은 크기의 돼지 두 마리로 갚아야 한다. 법정 화폐를 빌려줄 때에도 이자율은 100%였으며 복리로 계산하여 갚았다. 장례비 마련을 위해 3페소를 빌린 사람은 3년 후에 24페소를 갚아야 한다. 이푸가오족에게도 ‘파탕’이라고 하는 할인 제도가 있었다. 가축 대출에 이자를 선지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4. 서남태평양 연안의 뱅크 섬에는 소도로 발달한 신용과 화폐 제도가 존재한다. 조개껍데기 꾸러미를 기준으로 한 이 섬의 금융 제도는 사교 클럽이나 비밀 결사 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의례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클럽에 가입하려면 상당량의 조개 화폐를 내야하고 클럽 내에서 더 높은 서열로 올라서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조개 화폐를 내야 한다. 조개 화폐는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또 필요도 없으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면 클럽에 가입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 조개 화폐가 있어야 한다. 상환 기간을 불문하고 조개 화폐의 대출 이자율은 100%였다. 클럽에 내야 할 조개 화폐가 부족할 때는 자신이 소유한 물품 등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로 가입비를 충당할 수 있다. 이 제도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 위 사람이 가입비 충당을 위해 뭔가를 빌려주려고 할 경우 상대방은 별로 빌리고 싶은 생각인 없더라도 그 물품을 빌리고 이자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액을 벌금으로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채무가 강요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른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강요된 채무상황은 고대와 중세에 성행했던 선물 경제의 특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상대방에 뭔가를 선물할 때 그 상대방이 그보다 더 큰 선물을 줄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다. 고대와 중세의 왕들은 귀족들이나 이웃나라 왕에게 상당량의 선물을 안겼지만 사실 이런 식의 선물을 받는 사람에게 부담만 될 뿐이었다.(나중에 그보다 더 많은 혹은 더 값비싼 선물로 보답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도 이런 식의 응보적 증여의 관습이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생일 선물, 결혼 선물 등을 줄 때 나중에 똑같이 혹은 더 많이 돌려받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가.
  
5. 캐나다 밴쿠버 섬의 콰키우틀족은 모피와 조가비 구슬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자리를 외투가 대신하게 됐다. 그 당시 50센트면 살 수 있었던 이 값싼 흰 외투가 콰키우틀족의 교환 수단이자 가치의 척도가 됐고 무엇보다 이것이 연 지급의 기준이 됐다. 그리고 신용 제도가 상당히 발달했는데 이 또한 경제적인 부분보다는 의례적인 부분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외투 다섯 벌을 6개월 동안 빌리는 경우 이후 일곱 벌을 돌려줘야 하고 1년 동안 빌리면 열 벌을 되돌려 줘야 한다. 현대의 금융 용어로 표현하자면 외투에 대한 6개월 만기 대출 이자율은 80%이고 1년 만기 대출 이자율은 100%인 셈이다. 젊은 콰키우틀족은 성인 되어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된 기념으로 외투를 빌린다. 이때 빌린 외투에 대해서는 1년 안에 두 배로 갚아야 한다. 이 젊은이는 친척들에게 빌린 외투를 나눠준다. 친척들은 이렇게 받은 외투에 대해 2,3개월 안에 300%의 이자율로 되돌려 줘야 한다. 콰키우틀족은 이를 ‘프틀래치’(선물 교환 축제)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강제된 대출’행위에 불과하다. 포틀래치가 너무 성행한 관계로 캐나다 정부가 이르 금지하기까지 했었다. 부유한 인디언들은 누가 친척들에게 외투를 더 많이 나눠줄 수 있는지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어차피 이렇게 나눠준 외투는 나중에 더 크게 불어나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포틀레치가 고대 선물 관행의 극단적인 사례로 알려지게 됐고 더 나아가 ‘인디언 기빙’(답례를 바라고 선물을 주는 행위)이라는 말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6. 서남아프리카의 나말랜드에서는 소와 구슬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했다. 대출도 소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는데 나중에 이를 되갚을 수 없게 되면 이웃나라 소를 습격하는 일이 빈번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연 지급의 기준으로서 황동봉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지역 신용 거래 업자들이 신용 행위를 주도했고 법은 채권자에게 채무를 회수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프랑스령 수단(현 말리)에서는 최근까지도 소를 주요 교환 수단으로 사용했다. 소 대출에 대해서는 원래 이자가 부과되지 않지만 빌려준 소가 새끼를 낳았을 때는 어미 소와 새끼에 대한 소유권이 빌려준 사람에게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간다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서는 소와 양이 신용의 기준이 됐다. 우간다에서는 소나 양을 빌려주고 새끼를 세 번째 낳을 때마다 이를 이자로 챙겼다.
  
7. 북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적어도 최근까지 순록(가축화된)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대출도 순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베리아의 키르키스인 중에는 말과 양을 화폐 대용이자 신용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의 이자율은 대개 100%였다.
  
이상의 이자율 사례는 분명히 고대 혹은 선사시대의 이자율이 아니라 현대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과거의 이자율 역사를 추론하려 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상의 자료는 고대 신용의 실제 작용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편 당시 채권자가 기대했던 이자의 수준과 대출 형태에 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위 사례 대부분이 일반적 의미의 연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이 부분도 조정할 필요는 있다. 요컨대 딱 12개월을 기준으로 했다기보다는 파종기에서 수확기까지의 기간 같은 실질적 대출 기간을 바탕으로 연리를 산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자 대출이라고 해도 대개는 1년에 단 한 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실제 기간이 6개월이든 1년이든 종자를 빌려주는 쪽이나 빌리는 쪽이나 연리를 계산하는 데 있어 큰 차이는 없다. 자신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문명국 가운데 대부분이 아니 아마도 거의 모든 문명국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충분히 발달한 복잡하고 성숙한 국가였다. 최초의 원시 가축 경제시대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시대 사이에는 오랜 시간적 틈이 존재하며 이 기간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사실, 현존하는 가축 경제의 특성과 관습 가운데 선사시대의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생산적 대출 유형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참고 자료
  
‘금리의 역사 -제4판 ’, 시드니 호머·리처드 실라, 리딩리더,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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