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건우 Apr 13. 2018

신용의 역사

고대의 신용
  
  
신용은 근대적 금융 도구(device)이면서 더 나아가 근대의 악습(vice)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진다. 말장난으로 들리는 측면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신용’에 대해서는 이처럼 양면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근데 들어 새로운 신용 형태가 등장한 것이 사실이고 최근 수십 년 동안 신용 거래량이 급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금융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신용’이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라는 생각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사실 신용은 고대에도 있었고 중세에도 있었다. 신용은 산업과 금융은 물론이고 심지어 화폐 주조보다 훨씬 앞서 등장했으며 아마 가장 원시적인 화폐보다도 그 기원이 더 오래됐을 것이다. 이자부 대출, 즉 이자를 받고 뭔가를 빌려주는 행위의 기원을 찾자면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석기시대의 농부들이 친척에게 곡식의 씨앗을 빌려주고 수확기가 되면 원려 빌려줬던 것보다 더 많은 씨앗을 돌려받았던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요 문명의 법제사는 바로 신용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면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800년경에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성문 법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법전의 주요 조항이 채무자와 채권자에 관한 내용을 규정한 것이었다. 곡식 대출의 연간 최고 이자율은 33.33%이고 은 대출은 연간 20%로 정해 놓았다. 이때 곡식 상환은 동종 곡식으로 하고 은을 상환할 때는 무게를 기준으로 한다. 대출 행위를 할 때는 관리 입회하에 서면 계약서를 작성하여 교환했다. 상대방을 속여 법정이자보다 더 많은 이자를 받았으면 채무 원금이 완전히 탕감됐다. 토지 등의 부동산이나 가재도구와 같은 동산을 채무의 담보로 제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아내나 첩, 자식, 노예를 담보로 제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신 담보는 그 기산이 3년으로 제한됐다.
  
고대 그리스의 법제사는 이로부터 약 1,200년이 지난 기원전 600년경에 솔론 법이 제정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 아테네의 경제 위기로 말미암아 부득이 과감한 개혁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경제 위기는 부분적으로는 과도한 부채 그리고 점점 확대되는 인신 담보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과는 달리 솔론 법은 이자율에 관한 모든 제한을 철폐했다. 솔론 법은 수많은 부채에 대해 이를 감소시켜주거나 완전히 탕감해 주었다. 담보 계약은 허용했으나 인신 담보는 금지했다. 이러한 형태의 법률 규정이 수 세기 동안 유지됐다.
 

솔론(Solon, BC 640~560)

법을 제정하는 솔론의 모습

   
  
로마의 법제사 역시 신용 규제와 함께 시작됐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도 과도한 부채로 말미암은 경제 위기가 이러한 법전의 제정을 부추겼다. 기원전 450년경에 제정된 12표 법은 신용 관련 규정은 솔론 법보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규정과 더 유사하다. 모든 대출에 대한 이자율은 연간 8.33%를 넘지 못하게 돼 있었다. 법정이자보다 높은 이자에 대해서는 4배로 배상을 해야 했다. 인신 담보는 허용됐으나 노예의 신체적 안녕에 대해서는 법적인 보호를 받았다.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등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역사시대 이전에 이미 신용 행위가 널리 행해졌으며 신용이 주요한 정치적 문제들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사시대에 해당하는 5,000여 년의 시간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살았던 총 기간의 0.5%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류가 역사시대로 돌입하기 오래전부터 우리 인류에게 신용과 이자에 관한 지식을 축적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던 셈이다.
  
서기 800년경에 제정된 샤를마뉴 법령집에도 신용 관련 규정이 담겨 있다. 샤를마뉴 법령집은 이자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1,000년 이상 계속된 증세 기간 내내 고리대금을 죄악시하는 풍조 그리고 고리대금을 허용하는 법적 예외 사항을 찾아내려는 열망이 수많은 이론적 및 법적 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종교 개혁 이후 이자 부과 행위가 허용되자 경제 학자와 금융 중개인 그리고 정치가들 간에 벌어졌던 이자율 논쟁은 주로 ‘자유방임 대 국가의 통제’라는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 궁극적으로 영국은 솔론 법을 취해 이자율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했다. 미국의 각 주에서는 고리금지법에 최고 이자율 수준을 정해 놓았다. 따라서 이 부분에 관한 한 미국은 함무라비 법전이나 로마법을 따르는 셈이다.
  
21세기 금리는 고대 이자율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금리에 관한 한, 미국 정당들과 유럽 정당들은 마치 로마 공화정 시절의 귀족당과 평민당 같은 형태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낮은 금리를 선호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높은 금리를 선호하는 쪽이 있다. 근대 경제 학자들은 오히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의견을 제시하며 좀 더 포괄적으로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주제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이자율의 역사를 조망해보면 금리 수준, 즉 어떤 것이 고금리이고 저금리인지 또 어느 정도가 평균적 금리 수준인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이 많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다수 사람은 금리는 일정한 변동 범위에서 움직여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금리 수준이 너무 높으면 경제 위기의 징후이거나 채권자가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반면에 금리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은 인위적이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근대 시장금리가 비교적 오랫동안 안정적 수준을 유지했던 적이 거의 없기에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금리 추이에 놀라지 않는 일 또한 거의 없다. 예상치 못했던 수준으로 금리가 치솟기도 하고 또 떨어지기도 한다. 이자율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금리 변동 폭에 크게 동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금리 추세에 관한 과거 자료를 들여다본다고 미래의 금리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 자료를 보면 평균적 금리 수준에 빗대어 해당 금리의 변동 폭이 정상적인 수준인지 아닌지 정도는 가늠할 수가 있다. 
  
이에 관한 사례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사실 최고 금리와 최저 금리 사례를 찾아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0,000%에 달했던 베를린의 금리와 0.01%에 불과했던 뉴욕의 금리 수준을 살펴보라. 이 두 사례는 극히 이례적인 단기 금융시장 상황에서 나타난 금리 수준이었다. 양 금리는 100만 대 1에 해당하는 격차를 보이는 셈이다. 또 1990년 1월 2일 자 <월스트리트저널>은 아르헨티나의 은행들이 고액의 예금자에게 월 600%의 이자를 지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은 대출에 대한 법정 최고 금리를 연 20%로 정하고 있다. 이것을 오늘날의 금융시장 금리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연 20%는 20세기 때의 우량 기업 대출, 저축 채권, 저축성 예금 등에 대한 금리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다수 주에서 행해지는 소액 개인 대출의 실제 금리 그리고 법정 한도인 연 30~45%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런 식으로 금리 수준을 비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고대와 근현대 역사 속에 등장했던 신용 계약의 형태와 유형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기원전 2000년경 바빌로니아의 고대 도시 사파르의 태양신 샤마쉬는 사제들을 통해 6.25%의 이자율로 은을 빌려 줬다. 이 정도면 당시로써는 파격적으로 낮은 이자율 수준이었으므로 이는 종교적 차원에서 자비를 베푸는 행위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아시리아에 있는 아르벨라 신전(기원전 732~625년)은 25%의 이자율로 은을 빌려줬다. 기원전 4세기경 데모스테네스(고대 그리스의 정치가)는 법정 수수료의 지급을 유예해주는 대신에 연 12%의 이자율을 추가로 요구했다. 당시로써는 이 정도면 아테네의 ‘정상적 이자율’ 범위의 상한 계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한때 카이사르의 친구였던 로마의 귀족 브루투스가 살라미스에 대해 48%의 이자율을 부과하려고 했다. 한편, 키케로는 브루투스에게 법정 최고 이자율이 12%라는 사실을 늘 일깨워주었고 따라서 브루투스의 이러한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로마의 대출 이자율은 연 4%로서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고대인들의 금융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 바로 고리대금업자에 관한 것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고리대금업자들이 월 48%의 이자율로 돈을 빌려 주었다. 이 정도면 단순하게 따져도 이자율이 연 576%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뉴욕 법원의 사건 기록에 언급된 무면허 고리대금업자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이들 고리대금업자는 주 25%의 이자율로 대출 행위를 했다. 주 25% 면 이론적으로 이자율 수준이 연 1,300%라는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고리대금업자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난 고리로 테오프라스토스(기원전 287년)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고리대금업자다. 이 사람은 하루 25%의 이자율을 부과했는데 1년으로 치면 이자율이 9,125%나 된다. 20세기에 이처럼 높은 금리가 형성됐던 경우로는 1920년대의 독일과 1980년 말경의 아르헨티나 정도를 들 수 있다.
  
중세의 이자율은 더욱 기묘하고 극단적인 양상을 나타냈다. 12세기 영국에서는 담보물에 따라 52~120%의 이자율로 개인 대출이 이루어졌는데, 같은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장기 대출 이자율이 8~10% 선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상한 담보물도 많이 등장했다. 예루살렘의 오아 보두엥 2세는 일시적을 닥친 금전적 압박 때문에 자신의 수염을 담보물로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13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보두엥 황제는 가시 면류관을 담보로 하여 베네치아(베니스)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보두엥 황제가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돈을 갚고 이 담보물을 회수했다. 14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표시 이자율이 5%인 채권은 수년 동안 액면가 이상으로 거래되었다.(채권 가격의 상승은 곧 금리의 하락을 의미한다.)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공정왕 프레드릭은 80%의 이자율로 돈을 빌렸다는 기록이 있다. 15세기에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원정에 필요한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최대 100%의 이자율로 돈을 빌렸는데,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5~10%의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는 표시 이자율이 8.33%인 국채를 3.75% 국채로 차환했고, 상인들은 이보다 더 낮은 1.75%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스페인 왕실은 단기 대출금에 대해 40%의 이자율을 부담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금리의 역사 -제4판 ’, 시드니 호머·리처드 실라, 리딩리더,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원시 시대의 신용과 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