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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Apr 14. 2018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이자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이자
  
  
함무라비 법전은 토지 소유권, 인부의 고용, 민사 관께, 토지 임대, 신용, 기타 다양한 사항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채권자가 채무 상환을 독촉하려면 수확기까지 기다렸다가 해야 한다. 폭풍이나 가뭄 때문에 흉작이 됐을 때는 토지 대출에 대한 해당 연도의 이자가 탕감된다. 토지는 이자 지급 대출의 담보 대상이 될 수 없으나 임대는 가능하며 이때의 임대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이다. 임대료는 수확한 농작물로 지급할 때도 있고 금속 화폐로 지급할 때도 있다.
  
농장뿐 아니라 도시의 가옥도 담보로 제공할 수 있다.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문이 달린 집은 매우 드물었고 그래서 문은 가옥 일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옥과 분리된 일용품은 개별적으로 매매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용품을 개별적으로 매매하거나 담보로 제공하기도 했다. 함무라비 법전은 건축비, 즉 가옥을 지은 사람에게 지급해야 하는 대금 수준까지 미리 정해 놓았다. 부실 가옥을 교체해줄 책임은 이 가옥을 지은 사람에게 있으며 만약 이 가옥이 무너져 집주인이 깔려 죽었다면 자신도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가옥을 담보로 대출해준 사람은 이자를 받는 대신에 이 가옥에서 거주할 수도 있다. 
  
신용에 관한 규정들은 수메르 시대 초기부터 페르시아 왕국 시대까지 근 수천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계속 존속했다. 무이자로 소비재를 빌려주기도 했고 이를 되돌려 주지 않았을 때는 일종의 형벌이 가해지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벌이 강제됐던 것은 아니다. 이런 형식의 ‘벌칙성 이자(penalty rate)'는 일반적인 관행이고 약정 이자율과는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은과 곡물 모두에 대한 이자 지급 대출 그리고 담보부와 무담보부 대출 행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모든 유형의 대출에 대해 법정 최고 이자율을 정해 놓았다. 이렇게 정해 놓은 법정이자율은 2000년 동안 단 한 차례 수정됐을 뿐이다.
  
초기 수메르의 금융 관행과 마찬가지로 함무라비 법전은 은 대출보다 곡물 대출의 법정 최고 이자율을 더 높게 설정했다. 이로부터 1200년이 지난 기원전 600년이 되자 곡물 대출의 법정 최고 이자율 수준이 은 대출의 최고 이자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우에 따라 법정 최고 이자율보다 더 높은 이자율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법정이자율보다 낮은 수준에서 대출 이자율에 대한 상호 합의가 이루어졌다. 
  
법정이자율 규정의 위반을 막고자 모든 대출 계약서는 관리 입회하에 작성하도록 했다. 만약 이러한 규정을 어길 시 대출자는 해당 채권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채권자가 상대방을 속여 법정이자율보다 더 높은 이자율을 부과한 경우에는 채무자의 빚이 탕감된다. 채무자가 완전히 이행할 수 없는 경우 당사자 간의 타협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규정도 마련돼 있었다.
  
채권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담보와 보증이 허용됐다. 농지담보에 관한 규정이 상세히 기술됐으며 상세하게 규정돼 있다. 수확기가 되어 채권자가 채무 변제를 받으려 할 때 원금과 법정이자 이외의 것은 취할 수 없다. 부동산과 동산, 사람을 포함한 모든 유형의 재산이 담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내, 첩, 자녀, 노예, 토지, 가옥, 가재도구, 채권, 문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인신 담보의 기간은 3년을 넘지 못한다. 인신 담보의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늘리는 것은 금지된다. 수많은 대출 계약서를 보면 대개 부채에 대한 이자(원금이 포함될 때도 있음)는, 인신 담보의 대상이 된 자녀나 노예의 노동력으로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 채무자 자신이 3년 동안 부채 노예(부채 탕감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함)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배상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채무 이행에 관해 불만이 있는 채권자가 있을 때 양자 간에 법적 합의를 이끄러내는 데 필요한 규정도 마련돼 있다. 대출 계약을 하면서 아내의 서명을 요할 때가 간혹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아내의 재산권도 보호하고 있으며 남편 단독으로는 공동 재산에 담보권을 설정하거나 이를 처분하지 못한다.
  
당시의 사원(혹은 신전)은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금융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 사원은 주로 은과 곡물을 비려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빌려줄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다. 법정이자율보다 낮은 이자율을 적용할 때도 있었고 최고 이자율의 2분의 1 혹은 3분의 1을 적용할 때도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신전은 노예들이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남녀 사제를 대리인 삼아서 활동했던 ‘태양신’이야말로 최고의 은행가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원들은 정의를 논하는 법정이자율 문서와 귀중품의 보관 장소이기도 했다.
  
예금, 이체, 대출 등을 포함한 금융 행위의 기원은 기원전 약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전문화된 금융 기관은 아시리아와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초창기에는 왕실과 사원 그리고 민간인들이 다른 경제 활동을 하면서 곁들여 소규모로 금융업을 시작했다.
  
함무라비 시대부터 아니 아마도 그 이전부터 환어음 형태로 대출이 이루어졌고 또 이 어음이 유통됐다. 최초 채권자에게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도 있었고 어음 소지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또 그날 지급 어음도 있었고 확정일 출금 어음도 있었다. 환어음은 서면 요청에 따라 채무자 지급으로 하여 발행됐다. 예금도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즉, 귀중품 등 금전적 가치가 있는 물품이나 문서를 맡아 두었다가 특정한 시기에 혹은 당사자의 요청이 있을 때 돌려주었다. 차익을 노리고 금전을 바꿔주는 이른바 환전 사업이 발달하면서 실제 현금이 오가지 않는 상태에서 계좌 간에 금전을 이체하는 방법도 생겨났다. 사전 예치금 없이 대금을 지급하고 받는 것도 가능했다. 전당물, 부동산, 신용증권(지폐를 제외한 장단기 채권 채무 관계를 증빙하는 증서) 등을 담보로 한 대출도 있었고 담보물이 수반되지 않는 일반 신용 행위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금융 거래 가운데 일부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가 간에도 이루어졌다. 당시 설형 문자를 보면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 시리아인, 히타이트족, 엘람인 간에 이러한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이집트인은 빠져 있다. 권위주의 경제의 성격이 강했던 이집트는 자국 내에서 유통되는 금전만으로 경제가 운용됐기 때문에 신용이나 이자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용 관행이 수천 년에 걸쳐 그대로 유지됐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전쟁, 파괴, 침략, 정복 등으로 점철된 장구한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관행에 큰 변화가 있거나 더 대단하게 발전해 있어야 타당할 것 같다. 그런데도 기원전 1800년 혹은 이보다 이전 시기에 금융 관행을 대략 살펴보면 기원전 6세기의 관행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기원전 600년 이후 민간 금융 부문에서 좀 더 진보된 금융 거래 형태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바빌론의 상인 은행가(환어음의 인수와 증권 발행 업무 등을 주로 하는 사람) 에기비선즈와 무라슈는 거액을 정부와 개인에게 빌려 주고, 상인 고객의 요청에 따라 상인 간에 계좌 이체를 해주고, 예금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고, 토지 담보부 대출 채권을 사들이고, 조합원의 자격으로 벤처사업에 참여하는 등의 복잡한 업무를 대규모로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의 모습을 현대적인 금융 용어로 기술했다고 해서 바빌론의 금융 환경이 현대와 같았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동양의 절대 군주는 그야말로 신적인 권위를 지닌 통치자였다. 21세기 금융이 신 바빌로니아의 금융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기원전 600년의 신 바빌로니아 금융은 적어도 원시시대 금융보다는 훨씬 앞서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전문 금융 기관들이 등장했다. 당시 법에 따르면 사업 계약에 따른 법적 행동을 시작하는 자는 그러한 행동이 지속되는 동안 상당 금액의 금전을 예치하게 돼 있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사업 관련 서류 몇 가지를 발췌 번역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금융 거래 유형에 관한 대략적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1. 기원전 2040년경 “X의 옆집은 한쪽이 길가에 면해 있는데 이 집의 소유권이 S의 아들 본인으로부터 K의 아들 X에게 이전됐다. X는 은 10온스를 총 계약 대금으로 지급했다. 거래는 완료됐으며 매수자는 만족스러워했다. 양 당사자는 앞으로 이 거래에 대해 어떠한 배상 청구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양 당사자는 신과 삼수 일루나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입회인의 성명과 계약 일자]
  
2. 기원전 2000년경 “Adml 아들 마스-샤마흐가 Wdml 딸이자 태양신의 사제인 아맛-샤마흐한테서 은 0.5온스를 빌렸다. 채무자는 태양신이 정한 이자를 지급할 것이다. 수확기에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것이다.”
  
3. 기원전 1800년경 “N의 아들 카-엔릴라가 샤마시(태양신) 신전이 정한 이자로 부르-신한테서 은 1파운드를 빌렸다. [상환일]에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것이다. [입회인 5명의 성명]”
  
4. 기원전 595 바빌론 “O의 아들 나부-사르-아헤수는 N의 아들 나부-우삽시한테서 은 8온스를 빌렸다. 이자는 연 5온스(16.66%)로 한다. 채무자의 전재산을 담보로 제공해야 한다. 채권자 나부-우삽시가 채무 금액 전액을 돌려받을 때까지 다른 채권자는 채무자의 재산을 멋대로 처분하지 못한다. 바빌론의 왕 네브카드네자르 9년 울루루(바빌로니아력으로 6월) 11일, 우르크 시[입회인 자격으로 사제 4명 성명]”
  
  
기원전 3000~400년, 메소포타미아의 이자율
  
기원전 3000~1900년, 수메르 시대에는 보리 대출에 대한 관습이자율(관행에 따라 굳어져서 일반적인 이자율로 인식되는 것)은 연 33.33%였고 은에 대한 관습 이자율은 연 20%였다. 하지만 은 대출 이자율로 25%가 적용된 사례도 있고 무이자를 포함하여 이러한 관습이자율보다 낮은 이자율이 적용된 사례도 있었다. (기원전 24세기에 인도의 마누 법전은 24%를 법정이자율로 정해놓았다.)
  
기원전 1900~732년 바빌로니아 시대에 함무라비 법전은 옛 관습이자율을 인정하여 이를 법정 최고 이자율로 정했으며 이 법정이자율이 1200년 이상 그대로 유지됐다. 이때의 법정 최고 이자율은 곡물 대출은 연 33.33%였고 은 대출은 연 20%였다. 은 대출에 대해 25%의 이자율이 적용된 사례도 있었지만 이보다 더 낮은 이자율을 적용한 자본가(대금업자)들이 더 많았다. 국가에서는 12%의 이자율로 은을 빌려 주기도 했고 사원은 이보다 훨씬 낮은 이자율을 적용할 때도 있었다. 시파르의 태양 신전은 보리는 20%, 은은 6.50%의 이자율을 적용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은 대출의 명목이자율이 10%에서 25% 선이었고 곡물의 명목이자율은 20%에서 33.33% 선이었다. 주변국들의 명목이자율 수준은 이보다는 좀 높았다.
  
아시리아의 통치 시절인 기원전 732~625년에 바빌로니아의 법정 최고 이자율은 여전히 곡물이 33.33%, 은이 20%였다. 명목이자율 수준에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아시리아에서는 무이자 대출이되 이를 갚지 못했을 때 벌금이 부과되는 형태의 대출 행위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때의 벌금, 즉 벌칙성 이자율은 40%, 100%, 141% 등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당시 아시리아의 은 대출 이자율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르벨라 신전이 적용한 이자율 25%
성명 미상의 채권자가 적용한 이자율 30%
기원전 667년 네르갈-샤르-우트신이 은 2.5온스를
빌려주고 적용한 이자율 20%
기원전 608년 수카라가 은 1파운드를 빌린 데 대한 이자율 40%
  
아시리아에도 관습이자율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테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서 당시의 관습이자율 수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곡물 이자율이 50%였던 적도 있고 또 어떤 문서에는 이자율이 30%로 기록된 때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자료를 보면 아시리아의 이자율 수준이 바빌로니아보다 더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625~539년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는 은의 법정 최고 이자율이 여전히 20%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보리 대출에 대한 이자율은 20%로 낮아졌다. 대출 거래의 실제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 618~581년 전문 대금업자가 11.66%의 이자율로 대출했다.
기원전 595년 N-S가 전 재산을 담보로 하여 N-U한테서 은 0.5파운드를 빌렸고 이때 이자율은 연 16.66%였다.
기원전 555년 N이 자신의 집을 담보로 G한테서 은 0.5파운드를 빌렸고 이때 이자율은 20%였다.
기원전 544년 대금업자한테서 20%의 이자율로 대출을 받았다.
기원전 542년 에기비 은행에서 은 0.5파운드를 빌렸다. 한 달 내에 갚지 못하면 연 20%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기원전 540년 20% 이자율로 대출했다.
기원전 518년 나부-무킨이 20%의 이자율로 대출했다.
  
  
  
  
참고 자료
  
‘금리의 역사 -제4판 ’, 시드니 호머·리처드 실라, 리딩리더,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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