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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본 일본영화 3편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  <휴가> 그리고 <종이 달>

가해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


당신은 작가다. 이제부터 살인사건을 소재로 각본을 쓸 것이다. 당신은 어떤 시점으로 작품을 쓸 것인가? <살인의 추억>처럼 형사들의 시점? <복수는 나의 것>처럼 살인자의 시점? 아니면 <데드 맨 워킹>처럼 살인자와 피해자의 가족들, 그 양쪽을 아우르는 감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는 앞서 말한 세 가지에서 벗어난, ‘가해자의 가족들’이라는 독특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다.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그들에게 남겨진 사람들과 맞닿는 영화는 종종 있어왔다. 그런데 오직 가해자의 남겨진 가족에게 시점을 맞춘 영화는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사오리는 오빠가 살인범으로 경찰에 붙잡히면서 기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 그녀. 아픔을 간직한 형사 타쿠미는 ‘가해자의 가족’을 지켜주게 된다. 일본 방송을 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놈들은 매스컴에서 가해자의 부모를 찾아가고 그들이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낸다. 여기에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후 가해자들은 사람들의 괴롭힘을 계속 받고 있다.(출소 후에 그랬다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연좌제는 폐지되었다. 살인을 저지른 건 사오리의 오빠지 그 가족들이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매스컴의 취재 열기와 네티즌들의 신상털이로 사오리의 아버지는 자살하고 사오리는 형사 타쿠미와 기자들, 그리고 그녀를 노리는 네티즌들로부터 도망을 친다. 


<어바웃 케빈>은 한 어머니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들에게 다가설 수 없고 결국 그 아들이(알게 모르게 어머니의 모성을 받지 못해) 총기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살인자’는 누군가 키워내는 것이 아니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면 ‘악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이해할 수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느 누구도 ‘살인범’을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런 아이를 키워냈느냐고 가족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행동은 ‘어떻게 악을 만들어냈느냐’라는 누구도 답을 낼 수 없는 질문과 같다. 그래서 경찰은 보호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가해자의 가족들을. 하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 가해자의 가족들을 보호하는지. 


이 영화도 참 많이 이용해먹는 영화인데 예전에 글을 썼을 때 빼먹었던 부분이 있다. 바로 이들을 지나치게 쫓는 기자와 네티즌들이다. 타쿠미와 사오리를 지나치게 쫓는 기자는 학교 폭력으로 아들이 히키코모리가 된 남자다. 그는 가해자 아이들을 보호한 학교 측에 큰 분노를 느끼며 ‘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보호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유영철 사건 당시 지나치게 유영철을 보호하며 피해자 가족들을 내동댕이친 경찰에 대한 비난여론이 분 적이 있다. 이 기자는 자신의 아들은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못한 채 고통 받는 반면 가해자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세상의 모든 가해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향해 푼다.

네티즌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뉴스 중 판결에 대해 만족하는 댓글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이 낮은 형량에 분노하며 언젠가 세상에 나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그들에 대해 염려하고 분노한다. 이 작품 속 네티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악마를 길러낸’ 사오리의 가족들을 용서할 수 없다. 가해자의 가족들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자의 가족들은 ‘고통’이라는 굴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고통을 가해자의 가족들도 받아야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자. 가해자의 가족 역시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 <클랜>처럼 가족이 다 한통속으로 범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건 후 피해자의 가족들은 가해자의 가족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면서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큰 울림을 받게 되는 부분은 피해자 부모의 외침이다. 타쿠미는 예전에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느냐 눈앞에서 범인이 한 소년을 죽이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고 그 피해자의 부모에게 매년 찾아와 소년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는 사오리를 데리고 이곳으로 도망을 온다. 하지만 네티즌들의 엄청난 정보력에 이곳 역시 들통 나고 이에 팬션 주인은 화를 낸다. 그는 억울했던 것이다. 피해자는 지켜주지 못하면서 가해자의 가족을 지켜주는 경찰에게. 자신의 아들의 죽음은 지켜보았으면서 살인범의 동생은 세상 끝까지라도 지켜줄 거 같은 타쿠미가 원망스러운 것이다.

작품은 단 하나의 장면을 통해 놀랍게도 사오리의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남자친구에게 속아 남자들에게 당하게 생긴 사오리를 타쿠미는 구해낸다. 그는 온몸으로 사오리를 해하려는 남자들을 막고 사오리는 타쿠미의 코트 깃을 꽉 붙잡는다. 그렇다. 가해자의 가족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 사오리는 작품 내내 침묵하지만 사실 그녀는 타쿠미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살인자의 여동생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봐줄 사람은 없다. 감정적 교감이 없더라도, 그저 방패 같은 역할일지라도 사오리에게 있어 타쿠미는 그 누구보다 크고 강한,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살인자의 아이를 키우게 된 교도관의 이야기 - <휴가>


살인자와 교도관. 제목만 들어도 참 매력적인 소재다. 감옥 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은 참 많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교도관의 괴롭힘과 이를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는 죄수들의 이야기(대표적으로 <펠론> 혹은 누명을 썼으나 감옥 안의 시스템에 의해 그걸 벗을 수 없는 <쇼생크 탈출> 같은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또는 <그린마일>(물론 이 작품은 죄수와 교도관 그 자체에 초점을 둔 작품은 아니다.)처럼 죄수와 교도관 사이의 우정을 다룬 영화도 있다. 헌데 <휴가>는 죄수와 교도관 사이의 가장 기묘한 이야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교도관이 재혼을 앞둔 상대가 다름 아닌 죄수의 전 아내라는 점이다.


죄수와 교도관은 좋던 싫던 서로간의 관계가 쌓일 수밖에 없다. 매일 보는 얼굴이면 그 사람이 사회에서 아무리 큰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이라도 추억이 쌓이고 연민이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다. 가네다는 살인범이라기에 너무나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이다. 그래서 교도관들은 그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 끔찍한 살인범임에도 점잖고 조용하며 성실히 할 일을 다 하는 성격. 그런 가네다에게 사형선고일이 정해지고 교도관 히라이는 그 사형집행에 지원한다. 왜냐하면 일주일의 휴가가 그 사형집행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히라이는 일에 있어 우직한 성격이다.(어떠한 순간에도 철도를 지켰던 <철도원>의 다카쿠라 켄처럼 말이다.) 그는 모범적인 성격의 가네다와 일정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그가 사형집행에 참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재혼을 앞둔 상대 때문이다. 아무리 선을 보고 결혼하는 사이라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감정이 쌓일 수 없다. 더군다나 결혼하기로 한 상대에게는 6살 난 아들도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은 그리 편하지 않다. 히라이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자신이 ‘포상휴가’를 얻은 것에 말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이익을 챙기는 건 명제 그대로 본다면 참 끔찍하고 인간 이하라는 생각이 들 행동이다. 물론 사형집행은 교도관 중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집단 사이에서 유대감을 맺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주변인들이 화를 내는 것도(혹은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히라이에게 이 휴가는 꼭 필요한 ‘휴가’다. 이는 단순히 그와 결혼을 앞둔 여인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그녀의 아들 때문이다. 어린아이 같지 않은 표정을 가진 아이. 아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그림만을 그린다. 마치 가네다처럼. 가네다 역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표정. 마치 세상의 모든 외로움과 고독을 간직한 듯한 그 표정에서 두 사람이 ‘부자 관계’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여인은 남편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감옥에 있는 가네다는 이미 ‘죽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가 재혼을 앞둔 히라이는 그녀의 전 남편을 죽여야 한다. 그래, 가네다는 자신의 죽음으로 이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토록 조용했던 가네다가 죽음을 앞두고 폭주하는 장면이다. 세상 누가 죽음을 원하겠는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사형집행 날,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못했던 강동원이 사형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던 걸 생각해보라.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면 결국 초조해지고 울분이 뿜어져 나온다. 어쩌면 가네다의 노부부의 살인 역시 이런 충동에 의해 이뤄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이 역시 이런 충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휴가의 온천여행 중 히라이는 밤중에 눈을 뜬다. 아이가 바지에 오줌을 싸고 울고 있는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서럽게, 내면의 울분을 다 토해내듯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히라이는 그런 아이를 안고 달래준다. 만약 가네다에게, 내가 모르는(그리고 그 누구도 모르는) 가네다의 어린 시절에 히라이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면 그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지 않았을까? 그런 내면의 아픔을 토닥여주고 달래주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네다는 히라이에게 결혼 선물로 그가 결혼한 모습을 그려서 준다. 옆의 신부의 모습은 그의 여동생. 마지막 그를 면회 왔던 여동생이다. 가네다는 감정이 없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그걸 어떻게 표출해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픔을 ‘죽음과 맞바꾼 휴가’로 남겨진 이들에게서 지워버린다. 그의 아내도, 그를 닮은 아이도 자신과의 추억 때문에 고통 받지 않게. 그라는 ‘살인범’을 세상에서 지워버린 히라이처럼 그가 남긴 고통도 히라이가 지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심에 사기를 저지른 여자의 이야기 - <종이 달>


‘은행 계약직 직원인 주부, 수억 원 사기를 치다’ 자, 이런 헤드라인의 뉴스가 떴다. 당신이 작가라면 이 뉴스를 보고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 은행 돈을 훔쳐 흥청망청 쓰는 여자의 이야기, 철저하게 사기를 준비하는 스릴러 요소가 가미된 여자의 이야기,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여자의 범죄를 바라보는 이야기. 누군가 이런 아이디어를 낸다. ‘여자가 동정심에 남자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는 어떨까요?’ 누군가의 눈에는 이 아이디어가 참 한심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로 만든 영화, 은근 재미있다.

살다보면 유독 ‘동정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봉사활동도 하고 기금 모금도 하면서 이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래, 동정은 쓰잘데기 없는 감정이라고들 하지만 난 동정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동정이 없다면 세계는 오직 1%를 위한 장소로 변할 것이다.) 여기, 참 동정심이 많은 여자가 있다. 남편과의 무료한 삶을 보내고 있는 리카.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은행의 계약직 사원이 된다. 그리고 보험을 팔던 중 한 까다로운 고객의 손자인 코타와 만나게 된다. 유학갈 돈이 없어서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코타. 그런 코타에게 리카는 돈을 대주겠다고 한다. 그녀의 돈이 아닌 ‘은행돈’을 말이다.


삶에 있어서 균열은 아주 작은 순간에 일어난다. 예전에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1시간 헬스를 하고 수업을 가던 내가 단 하루, 나와의 타협을 한 순간 다시는 아침에 헬스장을 가는 일이 없어졌다. 리카는 자신을 위해 비싼 화장품을 사고 이 과정에서 돈이 부족하자 그날 받은 고객의 돈 만 엔을 쓴다. 그래, 겨우 만 엔. 다시 자기 돈으로 채워 넣으면 그만인 돈 만 엔. 그런데 그 ‘만 엔’이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한 번 자신과 타협을 해버리면 그 달콤함에 빠져들게 된다. 처음에 리카는 생각한다. 은행의 돈은 자신이 다시 채워 넣으면 된다. 하지만 그 다시 채워 넣는다는 액수가 커지고 커져 결국 수억 원에 이르게 된다. 마치 늘어난 내 아침잠의 시간처럼 말이다. 

그래, 이 영화는 그저 한 아줌마가 젊은 남자에게 빠져 은행 돈을 횡령한 이야기다. 헌데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다. 첫 번째는 종이 달, 두 번째는 리카의 어린 시절, 세 번째는 유리코다. 리카는 ‘종이 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날, 그녀는 손에 붙은 종이를 ‘달’로 착각한다. 거짓된 허상.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과 아름다움. 리카는 ‘남의 돈’으로 ‘다른 인생’을 살았다. 그 허상은 마치 종이 달과 같다. 종이로 만든 달은 가짜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달을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완전한 허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순간의 감정만은 진심이니까. 자신의 돈이 아니라도, 그것이 거짓된 삶이라도 그 순간, 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 기쁨을 느끼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면 그게 ‘거짓’이라도 쫓게 되기 마련이 아닐까. 이런 리카의 동정을 채움으로 기쁨을 느끼는 성격은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리카는 성금모금함에 아버지의 지갑에서 훔친 거액의 돈을 넣는다. 담임선생은 누군가 거액을 넣었다며 성금모금을 금지한다. 이에 리카는 항의한다. ‘그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을 뿐인데 왜 막느냐’고 말이다. 담임선생은 리카가 모금한 ‘돈’ 그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 돈은 리카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리카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 돈이 ‘거짓’이더라도 자신이 만든 그 거짓 때문에 다른 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행복으로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종이 달’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리카의 행동을 부각시켜주는 존재가 그녀를 이해하는 존재인 유리코다. 유리코는 한 평생을 은행에서 성실히 일했으나 주어진 건 나이로 인한 권고사직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해 왔으나 남은 것은 강제에 의한 퇴직. 그런 그녀에게 ‘거짓된 삶’을 살아온 리카는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리카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알게 된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는 밤길을 밝혀주는 달은커녕 종이 달조차 없었음을 말이다. 달은 어둠을 비춰준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둠을 맛보게 된다. 길은 계속 펼쳐져 있는데 그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모르겠고 즐거움이나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리코는 그런 어둠 속을 계속 걸어왔다. 차라리 거짓이라도 좋으니 종이 달이라도 있었으면 그녀는 이런 무료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한 무료한 삶을 보내던 주부의 사기극은 그저 젊은 남자에게서 행복을 찾는 쾌락에 눈 먼 아줌마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 ‘동정’이 있다면, 무료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살기보다는 ‘거짓’이지만 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정말 감성적인 변명이지만 조금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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