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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단편] 우리 어디에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단편 멜로소설 -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기억하는 여자

소설 연재를 앞두고 단편 한 편을 먼저 올려봅니다. 어디 출품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적어서 써 놓고 친구들한테만 보여줬던 작품입니다. 감사합니다.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하였고 왜 벽에 머리를 부딪혀 스스로 자해를 하였는지. 교도관은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고 이내 ‘그 기억’만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게 무엇인지 난 알 수 없다.

 출소를 했다. 철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다. 기억 속에는 부모님도, 아내도, 아이들도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날 맞아주기 위해 나오지 않았다. 그건 파편일 뿐이다.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알 수 없다. 내가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나고 싶다. 날 아는 사람을. 추억을 찾아 기억을 쌓고 존재를 증명해내고 싶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지? 첫 발걸음을 떼기가 난감하다.

 지갑에 들은 것이라고는 주민등록증과 가족사진 한 장, 만 원짜리 몇 장과 다수의 명함이 다이다. 명함에 적힌 번호들을 따라 연락을 해보았지만 나에 대해들은 거라고는 ‘글쎄요’라는 말이 전부다. 어떤 이는 퉁명스럽게, 어떤 이는 요상하게, 어떤 이는 진중하게 그들과 내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말을 자른다. 

-미안한데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누구인지.

이 작은 종이쪼가리에서 추억이 나온다고 생각한 것이 멍청한 걸까? 마지막 명함 한 장 까지 부정당하고 말았다. 

-나는 누구죠?

-당신은 나와 어떤 관계인가요?

-난 기억을 잃었습니다. 믿을 건 당신이 기억하는 내 모습뿐입니다.

-어떤 거라도 좋아요. 제발 말해주세요.

기대는 사라지고 마음은 우울해진다. 이것도 추억이 될까? 잊어버리지 않을까? 아니면 하나의 사진처럼 이미지만 남은 채 머릿속을 떠도는 것은 아닐까? 설령 알아냈다 하더라도 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 여자를 만났다. 이름도 기억도 없는 여자. ‘저기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여자를. 그녀는 여행 칼럼리스트라고 한다. 대한민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을 적는 것이 행복하단다. 

-좋겠어요. 추억이 많아서.

내 말에 그녀는 웃는다.

-좋은 추억이 많으면 행복하죠. 그 반대면 슬프겠지만.

-추억이 없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겠죠?

-오히려 행복할지도 모르죠. 검은 도화지보다 하얀 도화지가 더 깨끗하니까요.

그녀는 말했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찰나의 즐거움을 보기 위해 육체가 느끼는 피로를 감당하고 무시와 조롱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다. 세 달을 여행을 떠나면 한 달은 행복하지만 두 달은 힘들다. 출판사에서 원하는 내용을 뽑아내기 위해 원치 않는 장소를 향해야 할 때도 있으며 쉬고 싶지만 일정 때문에 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녀는 탄산수를 마시며 열을 식힌다. 그러더니 처음에 했던 질문을 반복한다.

-그런데 절 본 적이 있다고요? 우리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나요?


 내 기억은 사진과 같다. 지저분하게 펼쳐진 사진. 그 속에 담긴 이미지만이 떠올릴 수 있는 전부다. 그녀는 저 귀퉁이, 아주 조그마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작은 키에 통통하게 오른 볼, 그리고 새하얀 피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당신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주 작은 거라도 좋아요. 

그녀는 고개를 흔든다.

-전혀요. 당신이 기억나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착각하신 거 같네요.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하셨죠?

정확히 말하자면 지워졌다. 누군가 적어놓으면 잽싸게 나타나 지워버린다. 얄미운 지우개 같으니라고. 대학병원 의사는 몸이 아닌 마음의 문제라고 하였다. 뇌는 우리보다 ‘생각’이라는 것을 더 잘 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주인인 건지. 

-그러면 그쪽이 기억하는 건 저 뿐이라는 거네요? 

-아주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쪽이 분명 보였어요. 

-다른 기억은 전혀 없는 거고요?

-그래서 방랑자가 되었죠. 갈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방랑자.

출소 후 첫 날은 찜질방에서 잠을 청했다. 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 잠에 빠져 온몸이 불어 터졌다. 둘째 날은 구청에 찾아갔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뽑았고 부모님의 주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두 분 다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PC방을 향했다. 연예인이라도 된 양 검색창에 내 이름을 검색해보았으나 나오는 건 다른 이들에 대한 정보뿐이었다. 오늘은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향했고 마땅한 소득 없이 길을 걷던 중 당신을 보았다. 마치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는 거 같은 당신을.

-뭐, 그쪽의 유일한 기억이 날 향해있다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갈 곳 없다고 그랬죠? 돈은 쥐뿔만큼 줄 건데 한 번 일해 볼 생각 있어요?

 그녀는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한산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아침저녁으로 청소를 하며 서빙을 하는 일이라고 한다. 친구와 둘이 돈을 모아 연 곳인데 전에 일하던 알바생이 취업을 해 그만둬 마침 일할 사람이 없던 참이라고 한다. 이곳을 집처럼 쓰는 대신 월급은 짜게 줄 테니 각오하란다. 

-계약기간은, 어디 보자, 좋아! 그쪽이 기억을 찾을 때까지로 하죠. 어때요? 좋죠?

여자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제 이름은 도희에요. 한도희. 앞으로 잘 지내봐요, 수수께끼씨.


 한 남자를 만났다. 나보다 한 뼘 더 큰 키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를. 그날 아침 세영이는 신문을 펼치고 운세란을 보았다. 내 운세를 보더니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의 말을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 햇빛이 밝고 바람이 선선한 것이 정말 사랑을 하고 싶은 날이었다. 예전처럼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누군가의 미소를 보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저기, 혹시 우리 어디에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하필이면 오늘-이런 운세가 나온 날- 기억을 잃은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자신의 기억 속 내 얼굴이 남아있다고. 설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듣는다면 비웃을 것이다. 모르는 남자를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인 것은 물론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까지 하다니! 하지만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다면, 떠나는 발걸음을 지켜만 본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제 이름은 진석입니다. 김진석.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남자는 아침 일찍 일어난다. 테이블과 바닥을 청소하고 화장실 변기까지 깨끗하게 닦아놓는다. 청소를 끝내면 조깅을 나간다. 러닝셔츠가 묽게 물들 즈음이면 돌아와 샤워를 한다. 그 물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깰 즈음에 언제나처럼 내 자리에는 노트북과 커피가 놓여있다.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수염을 깎은 말끔한 그 모습은 어느 곳에서나 볼 법한 반듯한 회사원 같은 느낌을 주고,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은 자상한 남편의 분위기를 풍긴다. 

-모르겠어요. 왜 감옥에 있었는지. 

그는 몇 번이나 이유를 들었지만 그때마다 기억은 자해와 함께 자신을 떠났다고 한다. 목에 남은 밧줄자국과 손목에 그어진 피부의 자국이 선명하다. 이유를 알고 싶다. 하지만 알게 되면 그가 나를 떠날 까봐 두렵다. 그마저 떠나 버릴까봐.


 습관이라는 것은 무섭다. 머리는 잊어버린 것을 몸은 어떻게 아는지. 내 명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알아서 움직인다. 사람도, 차도, 건물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반쯤 달릴 때 즈음이면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맞아. 난 어떤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그 여자는 정체도 모르는 남자를 자기가 운영하는 카페에 들였다. 그곳은 작고 아담하며 따뜻한 곳이다. 테라스의 창문을 모두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능숙한 하모니를 이룬다. 그럴 때면 행복하다. 그때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시 외곽에 위치한 카페를 찾는 손님은 많지 않다. 한산한 오전, 난 계산대 앞에 앉아있고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바리스타라는 그녀의 친구가 찾아오면 우리는 함께 또 따로 시간을 보낸다. 그럴 때면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그 순간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만큼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카페의 구석구석을 알아간다. 바리스타 아가씨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고 나와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본다. 아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시간은 천천히 움직인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태엽을 붙잡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기억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녀의 기억 저편에도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밤이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바라본다. 계단을 두드리는 손가락 하나의 모습마저 추억으로 담아두고 싶다. 

-혹시 도희 좋아해요?

그녀가 출판사에 간 날, 바리스타 아가씨가 물어보았다. 

-왜요? 제가 좋아하는 거 같나요?

-그쪽은 창밖을 바라본다고 생각했겠지만 눈이 도희에게 고정되어 있던 걸요? 그거 알아요? 기억은 속일 수 있어도 몸은 속일 수 없대요. 몸은 솔직하거든요.

달콤한 카라멜 마끼야또의 향을 맡으며 그녀는 호기심에 질문을 한다.

-그런데 그쪽이 도희한테 그랬다면서요? 어디서 만난 적 없냐고. 혹시 예전에 도희 좋아했던 거 아니에요? 혹시 알아요? 그쪽이 짝사랑했었는지. 그런 남자들 있잖아요. 혼자서 답답하게 좋아하는 거 숨기고 사는 소심이들. 

정말 그런 걸까? 과거의 어느 시점, 난 도희를 사랑했고 멀리 떨어져 그녀를 지켜봤다. 내 이름도 모르고, 존재조차 모르는 여자를 혼자 마음을 쓰며 사랑이라 여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녀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겠지. 사랑은 남았지만 대상은 사라져버린 그런 시시하고 뻔한 추억으로.


 세영이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남자, 네 남편과 너무 닮지 않았냐고. 수염을 깎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기억 속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와 그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도,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는 모습도, 심지어 샤워할 때 흐르는 물소리까지도 닮았다. 세영이는 장난스럽게 이야기한다.

-네 남편, 환생한 거 아닐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 일수도 있잖아.

남편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나타났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나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여기서 그쪽을 그냥 보내버리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서요.

그는 다정했다. 그리고 사려가 깊었다. 일 년의 반을 가족과 떨어져 있어도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요?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요?

그는 내 가족사진을 보면서 묻는다. 그래, 현실은 달랐다. 아이가 생기자 그는 내 직업을 취미정도로 여겼다. 돈은 자신이 벌어올 테니 제발 집에만 있어 달라 애원했다. 하루가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었다. 1년, 2년 시간이 지나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을 무렵 둘째를 임신했다. 그때 우리 사이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 선이 끝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마음 속 말을 참고 또 참아왔다.

-당신 정말 남편이랑 닮았어요. 

당신은, 당신을 보면 그가 생각난다.

-그래서 말하고 싶어요. 그때 그이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을요. 

지금 말해버리면 당신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웃는 얼굴로 보내줬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야 하는 건데 끝까지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그리고 사랑해요.

그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좋다. 나를 꼭 안아주는 두 팔이,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두 눈이, 그리고 마음을 잡아주는 그 목소리가.

-대역이라도 좋아요.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곁에 있어줄게요.


 그녀와 섹스를 했다. 아침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내 눈을 찌르고서야 그녀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테이블과 바닥을 청소하고 변기를 깨끗이 닦았다. 아침 공기는 따뜻하다. 어젯밤 그녀의 품속처럼. 얼굴을 만지며 키스를 퍼붓는 나에게 그녀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애 둘 낳은 아줌마 몸이 뭐 그리 좋다고.

좋다. 너무 좋다. 그저 너라서 좋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새들이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른다.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 빨리 이 거리를 지나 돌아가고 싶다. 그녀에게 돌아가 입 맞추고 싶다. 밀크 커피 향을 품은 그녀의 입술을 빨리 맛보고 싶다. 그래, 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시간을 달려서 너에게 다가가고 싶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밝다. 출판 계약이 잘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옆에 누구라도 있는 거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한다.

-카페는 세영이한테 맡기고 출판사 쪽으로 와요. 같이 저녁식사 해요.

택시 기사는 뭐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있느냐며 묻는다. 너무 들떠보이나요? 내 얼굴이? 감정이라는 것은 숨길 수 없다. 몸은 진실만을 말한다. 기억은 숨을 수 있지만 몸은 어딘가로 사라질 수 없다. 그래, 기억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왜 몸은 잊어버리질 않는 걸까.

 한 건물 앞에서 발걸음은 멈추었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떨려왔다. 진동을 이기지 못한 다리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도움이 닿기도 전에 내 몸은 아스팔트에 붙어 그날의 기억을 처절하게 되새겼다. 그리고 기억은 마치 자석처럼 떨어져 있던 조각들을 하나로 모았다. 


 아내가 떠났다. 내가 지긋지긋하다고 소리쳤다. 우리 사이에 애가 없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한 그녀였다. 부모님은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죽을 거면 혼자 죽지 더 이상 자신들을 끌어들이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휴대폰 속 많은 사람들은 모두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찾아가 봐야 냉소와 조소가 섞인 웃음만을 들을 뿐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모두 떠나갔고 남은 일이라고는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거뿐이었다. 화려하게 피어오를 것만 같았던 창업의 꿈은 마치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처음이었다. 완전한 고독을 느껴본 적은. 누구하고도 소통할 수 없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간처럼 그저 멍하니 서 있는 날이 반복되었다. 

-차라리 죽자.

벽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들의 기억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라 여겼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모두 지웠다. 기록이란 기록은 전부 삭제했다. 그저 날 증명할 몇 가지 증거-예를 들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같은-들만을 가지고 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종종 식사를 대접하던 곳. 비싼 음식을 접대하며 아부와 허풍을 떨던 곳. 그곳에서 처음으로 나를 위한 음식을 주문하였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지? 그래, 삶이 가난하다면 죽음이라도 부유해야 하지 않겠어? 식사를 마친 배를 부여잡고 건물 옥상에 올랐다. 여기서 떨어지면 분명 죽을 거야. 잠시의 망설임에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순간 몸을 내던졌다. 창문 너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던 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과. 아스팔트 위에 몸을 눕힌 내가 본 건 한 여자. 그들의 시체를 부여잡고 울고 있던 그 여자는 도희였다.


 카페의 2층 그녀의 방 캐비닛 위에는 가족사진이 있다. 사진 속 남자와 여자는 각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채 어색하게 웃고 있다. 그들은 풀어야할 숙제를 풀지 못한 채 헤어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밤을 이 침대 위에서 울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흘려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증오와 원한을 토해냈을까. 그녀가 돌아왔다. 불 꺼진 방안에서 나온 내 모습에 짐짓 당황한 표정이다.

-왜 안 왔어요? 연락은 왜 안 받고?

무릎을 꿇는다. 그녀의 앞에서.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앞에서.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나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기억을 찾은 남자가 내뱉는 말이 자신의 가슴에 상처를 줄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내가 당신 남편을 죽였어요. 그리고 아이들도요. 그날 난 그저 죽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나대신 그들이 죽었어요! 내가, 내가 그들을 죽인 거예요.

그녀는 주저앉는다. 고운 두 손이 와이셔츠를 잡아당긴다. 연약한 목소리가 악에 받쳐 소리친다. 마치 송곳처럼 내 마음을 파고든다.

-살인자 새끼.......... 이 살인자 새끼야! 

조그마한 두 손이 목을 움켜쥔다. 서서히 숨이 막혀온다. 그녀가 내 목을 조르고 있다. 그래, 이런 죽음도 나쁘지 않아. 그녀에게는 날 죽일 권리가 있다. 자신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간 이 육체를 마음대로 할 이유가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그날 난 죽었어야 했다. 세상에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그때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뭘 망설이는 거야? 면도칼을 든 손이 떨린다. 싫다. 죽기 싫다. 죽음으로써 이 모든 잘못을 끝낼 수 있다면 죽어야 한다. 그런데 미련이 남는다. 왜지? 그때도 지금도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날 사랑해주는 사람 따위는 없는데 왜 주저하는 거지? 아니, 그럴 리 없잖아. 그녀가 날 용서해줄 리가 없잖아. 거울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시원하게 눈물이 쏟아진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내 안에 남은 모든 감정의 기운들을 소진해버린다. 이제 안녕이야. 나도, 이 세상도, 그리고 그녀도. 약속을 바꾼다. 당신 곁을 떠나줄게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그냥, 애들이랑 고기 좀 먹자고 불렀어.

나는 평소와 다르게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아이들은 처음 가는 고급 레스토랑을 신기해했고 부드러운 함박 스테이크의 맛에 감탄했다. 남편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앉아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했다.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출판사를 찾은 것을 그는 싫어했다. 식사 시간 내내 우리는 아이들하고만 대화를 했다. 우리의 기분을 알았는지 들떠있던 아이들의 얼굴에도 점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첫 아이를 가진 후 단 한 번도 행복했던 날이 없었다. 내 기후는 저기압의 연속이었고 눈치를 보던 남편은 이내 포기한 채 직장생활에만 몰두하였다. 전날 가정부 아줌마를 쓰겠다고 박박 우겼고 말도 없이 출판사를 찾아갔다. 남편은 입이 툭 튀어나왔고 내 말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폭발한 건 내 쪽이었다.

-당신한테 내 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

그이는 현실을 들먹이며 반박했다. 나도 지지 않고 덤볐고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아이들의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대화는 끝이 났다.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던 건 나였다. 강제로라도 웃으면 기분이 좀 풀리지 않을까 했다. 남편은 아이 둘을 찍고 나와 아이들을 찍었다. 그리고 난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남편을 강제로 아이들 옆으로 보냈다. 환하게 웃지 않는 그를 나무랐다.

-제발 이럴 땐 기분 좀 풀면 안 돼? 당신 진짜 왜 그래?

결국 남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와 아이들의 머리 위로 한 남자가 떨어졌을 때, 난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에도 남편은 억지로 웃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안으며 외쳤다. 제발 살아달라고. 내가 다 잘못했으니 제발 살아만 달라고.

 몇 번이고 그를 찾아갔다. 경찰은 환자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면회를 거절하고 또 거절했다. 남편과 아이들을 죽인 ‘살인범’이 재판을 받는 동안 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며칠 간 식사를 거절했고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사건에 대해 조사하였다. 하지만 그때 옥상에서 떨어진, 그 남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감옥’이라는 방에 숨어 있었고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발걸음을 돌리고야 말았다. 

 여행을 떠나자 마음먹은 건 출판계약에 대한 독촉이 들어올 무렵이었다. 세영이는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며 채근했다.

-네가 이럴수록 네 남편은 괴로워할 거야. 그 사람도 아파하고 있었잖아? 네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걸. 그러니까 당당하게 보여줘.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하늘나라에서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란 말이야.

다시 전국을 돌아다녔다. 발톱이 빠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산의 정상에서, 넓게 펼쳐진 해안가에서, 안개가 가득한 풀숲에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 나는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도 힘내요. 그곳에서 우리 애들이랑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내가 갈 때까지 꼭 웃는 얼굴로 있어줘요. 꼭 그래야만 해요!


 그가 떠난 밤은 길었다. 그리고 그가 떠난 밤도 길다. 그는 떠났다. 아니, 떠나보냈다. 죽이고 싶었다. 이 두 손으로 목을 졸라 남편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이놈을 지옥에 떨어뜨렸다고.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은 지독하게 기억한다. 내 감정을. 사랑이라는 그 감정을 차마 지워내지 못했다. 남편과 아이들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난 대체 뭘까. 끔찍한 사실에 직면하고도 어쩜 이리 이기적일 수 있을까. 가족사진 앞에서 빌고 또 빌었다. 용서해달라고. 부끄럽게 내 행복만을 생각한 이기심을 덮어달라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다시 한 번 그를 만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복잡하게 흩어진 감정의 조각을 조립하고 싶다. 

-혹시 김진석 씨 보호자세요? 여기 xx병원인데 지금 오실 수 있나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xx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녀는 그가 공중화장실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다시 잃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또 다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은 결론을 내렸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창피하게 정직한 결론을. 병원을 찾아갔고 그를 보았다. 의사는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으나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호자 분께서 아실 수도 있겠지만 이 환자는 자살기도 후에는 그 전의 일정기간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보호자 분과의 추억을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립니다. 마음 아프시겠지만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는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을. 진한 커피향 사이에서 서로를 바라봤던 순간을. 찬란한 햇빛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을. 같이 살을 비비며 흥분에 취했던 순간을. 그리고 서로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마지막 순간을. 그는 전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의사는 말한다. 내가 자살을 기도했다고. 대체 왜? 그는 전에도 몇 번이나 이유를 설명해주었지만 그때마다 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이내 ‘그 기억’만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게 무엇인지 난 알 수 없다. 병실 문을 나서 공터를 향한다. 내리쬐는 햇빛이 무색하게 발걸음은 길을 찾지 못한다. 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한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우리 어디에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말한다.

-우리 같이 걸어요. 혹시 알아요? ‘우리’의 기억이 돌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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