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펭귄뉴스> 전 작품 감상평
*소설집 전체의 이야기를 다루었기에 길이가 상당히 깁니다.
<무용지물 박물관>
김중혁의 이 소설집의 문제는 너무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가진 의미나 교훈성, 그리고 흥미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 비슷하다 보니 지친다. 여기에 그렇다고 확 빠져드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첫 이야기 <무용지물 박물관>을 볼 때만 해도 ‘이 작가, 매력 있는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띄엄띄엄 김중혁의 작품을 읽었다면 더 재미있게 느껴졌을 것이고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자제품 업체에서 일을 하다 레스몰이라는 회사를 따로 설립했다. 그는 그때 회사에서 배운 가르침 ‘예술은 집에서 하고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하자’를 모토로 하고 있다. 디자인은 분명 예술의 영역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제품이 판매되지 않고 고객의 편의를 생각할 때에야 제품이 판매가 된다. 이 회사에 직원이라고는 질문에 ‘그러게요’를 반복하는 여직원이 전부다. 어느 날 덥수룩하게 수염이 난 남자가 레스몰을 찾아온다. 후에 알게 된 메이비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라디오 PD로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줄 라디오를 주문하기 위해 찾아왔다. 회사 이름 ‘레스몰’의 ‘스몰’처럼 현대사회에 맞춰 제품은 작고 휴대하기 간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주인공은 안테나 모양의 자그마한 휴대용 인터넷 라디오를 만들고 대박이 난다. 그리고 그와 메이비는 술 한 잔 기울이며 친구가 된다.
메이비는 주인공에게 이번에는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라디오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알고 보니 근사한 목소리를 가진 이 남자는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라디오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번에는 주문 내용이 특이하다. ‘크게 만들어 달라’ 주인공은 시각 장애인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에 휴대용 라디오를 넣어 만들 생각을 하지만 메이비는 큰 것을 원한다. 주인공은 메이비가 하는 라디오를 듣는다. 메이비의 근사한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설명하는 사물의 모습. 메이비는 목소리로 사물을 디자인하며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주인공은 눈을 감고 메이비가 말하는 ‘노란 잠수함’을 떠올려 본다. 이 작업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다. 볼 수 있기에, 이미 본 것이 많기에 메이비가 말하는 ‘그 무언가’가 아닌 ‘기존에 있던 것’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이내 메이비의 라디오에 빠져든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라디오 디자인을 포기한다. 이 작품의 핵심은 김중혁 작가의 사물을 바라보는 상상력이다. 그는 라디오라는 사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이지 않기에 상상할 수 있고 새로울 수 있다. 보이는 디자인은 제품이 출시되는 순간 낡은 것이 되지만 보이지 않는 머릿속의 디자인은 계속 썩지 않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
라디오 DJ 메이비의 이름은 ‘어쩌면, 혹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상상력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 물체는 어쩌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디자인이란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어떻게 하면 생활에 편리하고 도움이 되고 예쁜 물건이 탄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 머릿속으로 그려낸 그 무언가를 현실로 옮겨내는 것. 그게 디자인이 아닐까 하고 말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발명가 이눅 씨의 설계도>
아마 <무용지물 박물관> 다음에 이 작품이 자리 잡은 이유는 앞선 생각의 심화를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려면 앞선 작품보다 더 깊고 선명한 색체를 보여줘야 하지 않았나 싶다. 흐릿해도 너무 흐릿하다. 개인적으로 작가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작가 지망생의 범작 정도로 생각할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한 잡지사에서 ‘기상천외한 우리 시대의 발명가 6인’이라는 기획을 한다. 자기 발명품을 들고 기싸움을 벌이는 6명의 발명가들 때문에 고생하는 주인공. 그는 그 발명가 중 한 명이 ‘생각 발명가’이며 발명한 것은 없지만 설계도는 있다는 것을 후배에게 듣는다. 그 발명가가 먼저 가면서 찍고 돌려 달라 맡긴 설계도를 술에 취해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 놓은 주인공.
그는 그 망가진 설계도를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며 그 발명가의 집을 찾아간다. 가정부를 따라 들어온 거대한 지하의 연구실. 그는 그곳에서 괴팍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웃음이 가득한 발명가 이눅을 만난다. 그의 연구실 벽에는 온갖 생각, 그리고 연구가 적힌 글만이 가득하다. 그는 말한다. 만들기는 했는데 발명은 안 할 거라고. 필요하면 발명을 하는데 필요한 게 없으니까 안 할 거라고 말한다. 발명은 세상에 없는 걸 만드는 건데 이미 다 있다고. 그리고 벽에 적힌 종이들을 찍으려는 주인공이 불쾌한 듯 찍지 못하게 하고 그를 쫓아낸다. 주인공은 나중에 그 설계도, 그러니까 ‘하늘을 나는 방주’가 마치 그의 집, 그리고 연구소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의 경우 ‘발명’이라는 것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무언가를 발명하는 설계도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개념’ 그 자체로도 발명이 된다는 설명은 세상에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할 때 이것은 의미가 있다. 아니면 그건 베끼는 것이다는 명제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생각의 깊이를 끌어올릴 이야기가 너무 약하다. 대략적인 개념과 이야기만으로 ‘야, 내 생각 참 깊지?’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마치 이 작품의 설계도처럼 말이다. 일부러 이런 느낌을 주고 싶어서 이리 작품을 만든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과 ‘깊이’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김중혁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지도’라는 소재를 다룬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와 닿지 않았던 작품이다.) 주인공은 지도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해수면의 오차를 측정하는 것이다. 애인 없는 후배랑 같이 일에 매진하는 주인공. 그의 인생은 항상 무언가 변화의 시기(그가 꿈을 향해 내딛는) 때 일이 생겼다. 삼촌이 캐나다로 떠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프로젝트에 돌입할 즈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삼촌에게 소포가 하나 온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삼촌이 보낸 건 에스키모가 쓰는 지도다. 소포가 배달 오고 일주일 후, 그것을 풀어본 주인공은 그 나무 막대에서 어머니의 까슬까슬한 손등과 같은 촉감을 느낀다. 그는 느껴야만 떠오르는 어머니의 손의 촉감을 생각하며 아쉬워한다. 존재의 상실이 기억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에스키모 지도의 사용법을 알아낸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지도가 아닙니다. 상상하는 지도입니다.’ ‘손가락을 틈새에 넣고 그 굴곡을 느껴야 합니다.’ ‘촉각과 상상력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당신은 당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키모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기 위해 이런 지도를 만든다고 한다. 소리와 기억만으로 만든 이 지도는 실제 항공 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삼촌이 주인공에게 이 지도를 보낸 이유는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서라도 한다. 이 작품은 대놓고 슬픔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야기에 깔린 슬픔이 상당한 작품이다. 부모를 잃었지만 어디 마땅히 슬픔을 풀어낼 곳이 없는 주인공. 그는 그저 지도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며 슬픔을 잊어보려고 자신을 혹사시킨다. 그리고 이 슬픔에 처한 자신의 상태가 ‘세상의 끝’이라 여긴다. 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만드는 해안 측량 지도와 에스키모의 지도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안 측량 지도는 아무리 철저히 만든다 해도 오차가 발생한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주인공 역시 그런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길을 갈 때마다-그러니까 나이가 들고 무언가 선택을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떠나간다.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인생의 길은 갈수록 슬퍼진다.
인생을 ‘지도’라 봤을 때 과연 선명한 지도는 있을 수 있을까? 아무런 오차 없이 완벽한 지도는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삼촌은 주인공에게 에스키모의 지도를 보낸 것이다. 그 지도는 눈이 아닌 감촉으로 읽는, 손이 아닌 마음으로 그리는 지도다. 에스키모의 말에는 ‘훌륭한’이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훌륭한 인간이 없듯 훌륭한 지도도 없다. 즉, 사람은 그 자체로 훌륭한 존재이며 그가 가는 길에 등급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에 등급이 없듯이. 삼촌은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외로운 조카에게. 자존감이 무너진 그를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에스키모 지도를 연구하기 위해 삼촌이 있는 캐나다로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좌절 속에 살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얻었고 그 동력으로 나아갈 것이다. 완벽한 지도가 없듯 완벽한 길이란 없다. 김중혁 작가는 지도를 ‘보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보고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꿔버렸다.
<멍청한 유비쿼터스>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속도감 있고 깔끔하며 유머러스하면서 매력적이다. 이 작품에는 중요한 명제가 따라온다. ‘컴퓨터가 빠르면 사람이 게을러지고, 컴퓨터의 속도가 느려지면 사람들의 성질이 급해진다. 정확히 반비례 한다.’ 정보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된 컴퓨터는 그 존재로 사람들을 밀고 당긴다. 그래, 컴퓨터란 신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빠른 스피드로 일을 해결해주면 사람은 컴퓨터만 믿고 게을러진다. 반면 자신의 의도와 달리 너무 느린 속도로 일을 처리해주면 성질머리가 나 성질이 급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신을 믿고 그에게 기도를 드리던 시절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래,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 주인공은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이 컴퓨터를 통해 장사를 해먹는 사람이다. 회사의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는 일을 하는 그는 U사에 잠입, 파트너 파이버와 그곳의 보안 시스템을 단 번에 뚫어버리고 이를 회사에 보고한다. 헌데 이 과정이 흥미로운 건 단순히 ‘컴퓨터 vs 컴퓨터’로 보안을 뚫는 게 아닌 주인공이 직접 회사에 잠입, 그들의 시스템을 뚫어낸다는 점이다. 내부에 잠입하기 위해 없는 약속을 잡아 안내 데스크의 직원을 이용하고, 회사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신입사원에게 전화를 걸어 보안 팀인 척 한다. 또 고객지원팀에 직접 잠입, 컴퓨터를 수리하기 위해 온 기사인 척 하고, 자연스럽게 휴가 간 팀장의 컴퓨터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통해 컴퓨터에 접속한다.
회사 사장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라는 말을 하며 ‘완벽한 보안’을 추구한다. 이에 대해 시니컬한 주인공은 단호하게 말한다. 완벽한 보안이란 없다고. 제목이 ‘멍청한 유비쿼터스’인 이유는 이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자원’인 유비쿼터스가 결국 ‘사용하는 인간’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시스템이라는 점 때문이다. 완벽한 보안이 이뤄질 수 없는 이유는 이 ‘유비쿼터스’라는 시스템은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사용하는 인간 역시 ‘완벽해지지’ 않고서야 시스템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즉, 우리는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고 컴퓨터의 발달이 그 존재를 ‘신’으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컴퓨터를 뜯어보면 그 안이 허무하게 텅 비어있는 거처럼 완벽한 유비쿼터스 시스템 역시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진보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멍청한 유비쿼터스’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그 어원처럼 기술의 발전은 기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주변 인간과 연계되어 발전한다. 그러니 인간아, 너도 발전해라, 멍청하게 있지 말고!
<회색괴물>
난 이 작품의 제목에 대해 작가한테 묻고 싶다. ‘왜 하필 회색괴물이냐?’ 난 제목만 보고 이 작품이 타자기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두 사람의 파국을 그린, 그래서 타자기가 욕망의 괴물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호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타자기를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그는 친구 우주인(별명)과 함께 골동품 가게서 새로 들어온 DLX1000 타자기를 산다. 헌데 먹지만 어떻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던 타자기가 제대로 찍히지 않는 것이다. 결국 타자기를 만든 회사에 전화를 해보지만 이미 망한지 오래인 회사. 그래, 컴퓨터의 시대에 누가 타자기를 쓰겠어? 그런데 그 번호로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누군가 했더니 어린 시절을 타자기와 함께 살아온 남자였던 것이다.
나이가 든 이 남자는 타자를 치는 일을 했었다. 타자기의 시대가 끝나고 컴퓨터의 시대가 다가오자 그는 예전에 타자기로 썼던 글들을 보며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타자기로 종이를 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낭비입니까? 아니면 컴퓨터처럼 종이를 아끼면서 생각을 지우는 게 낭비입니까?’ 작가는 이 한 줄의 글을 통해 타자기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남자에게 타자기를 빌려준다. 막상 타자기를 가지라고 하니 두렵다는 남자를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랑니를 빼서 어금니에 집어넣는 수술을 한다. 이 장면이 타자기와 큰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거’ 이런 의미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의미도 그렇고 이야기가 주는 효과가 상당히 적었던 작품이었다.
<바나나 주식회사>
한 병사가 전쟁터에 나갔다. 허리춤에는 칼을, 등에는 도끼를, 한쪽 팔에는 화살을, 손에는 창을, 반대편에는 방패를 끼고 있다. 여기에 발목에는 단도도 가지고 있다. 무기는 참 많은데 어느 무기도 제대로 보여주기 전에 상대가 쏜 화살에 죽고 만다. 가진 것만 많지 뭐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꼴이다. 난 이 작품 <바나나 주식회사>가 딱 그런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시작은 자전거다. 주인공은 자전거 박물관에서 자전거를 하나 빌린다. 그는 죽은 친구가 남긴 약도를 따라 ‘바나나 주식회사’라는 명함에 적힌 회사를 찾아 나선다. B라는 별명의 친구는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살을 했다. 그 친구는 B연필 같은 이미지의 친구였다. 그는 주인공을 H라고 불렀으나 단짝의 의미가 강했지 주인공은 H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라고 본인이 말한다. 주인공은 바나나 주식회사의 힌트로 쓰레기호수를 찾아간다. 하지만 이 중심에서 그려진 힌트는 너무나 개판이다. 특히 약도는 알아보기 힘든 정도. 주인공은 26이라는 숫자와 그 옆에 괄호로 적힌 숫자를 풀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그것이 26사이즈의 자전거 바퀴, 그리고 옆의 숫자가 그 바퀴가 돌아간 횟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약도에 표시된 곳은 쓰레기 호수에서 그만큼 거리가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너무나 뻔한 인생에 대한 멘토 같은 말. B가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 보나마나 앞으로만 가니까. B가 그런 힌트를 남긴 이유.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거니까. 소리로, 느낌으로 느끼며 나아가는, 마치 인생과 같은, 이미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에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
그래서 찾아간 곳에서 발견한 텐트,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쓰레기호수에서의 노인. 그는 연필을 깎으며 ‘완벽한 연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완벽한 연필은 없다고 한다. 볼 때마다 흠집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B는 그 별명처럼 완벽해질 자신이 없어서, 완벽히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닐까? 뭐, 이건 말도 안 되는 추측.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노인이 말한 ‘일회용 인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남자가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아, 그 유명한 <기생수>의 말.......... 여기서 볼 줄이야) 그래서 그 사람은 인간을 진화시키기 위해 모든 물건을 일회용으로 만든다. 도구의 진보가 인간의 진화를 막는다고 생각, 일회용이면 물건들이 진보해 나갈 도리가 없으니 인간이 진화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이 만드는 발명품은 과거의 것의 모방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모방할 수 있는 과거가 없다면? 도구는 발달할 수 없다. 그래서 남자는 얼음 호텔을 만든다. 모든 것이 얼음으로 된 일회용 호텔을. 하지만 남자는 아들의 죽음으로 알게 된다. 모든 인간은 ‘일회용’이라고. 죽으면 끝이니 진화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인생은 한 번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어설프고 아리송하다. 인간이 일회용인데 도구마저 일회용이라면? 아, 참 끔찍한 세상일 것이다.
이는 결말부에 이르러 결국 ‘앞으로만 가는’ 자전거와 이어진다. 우리의 인생은 자전거와 같아. 앞으로만 가니까.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바나나 주식회사의 정체. ‘바나나 현상’ 어디에도 아무것도 짓지 마라. 모든 사람들이 바나나를 외친다면, 그것은 혁명이 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일회용 인간’이며 결국 B가 말했던 바나나 주식회사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전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내 글에서도 봤겠지만 주제의식이 뭉쳐지는 느낌보다는 중구난방이다. 정말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가져왔는데 뭐하나 제대로 융합되지를 못한다. 마치 이 글의 쓰레기호수처럼 말이다.(이 역시 의도했던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 좀 소름이 돋는다.)
<사백 미터 마라톤>
주인공은 몸 중독자다. 그는 잘 빠진 몸매의 민영과 애인 사이지만 어느 날 민영에게 드가의 명언, ‘나의 여자들은 매우 단순하고 정직하다. 자신들의 신체를 움직이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라는 말을 했다가 헤어진다. 멍청하게 가슴을 만지고 한 이야기가 그 이야기니 말이다. 꼴에는 자신의 해석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걸 민영이 성급했다 말하지만 전형적인 허세가 넘치는 고등학생 캐릭터다.
그에게는 400M 달리기의 고수인 ‘녀석’이라는 친구가 있다. 녀석에게 달리기를 배우고 매니저를 해주기로 한 나. 그런데 녀석은 이제 400M를 넘어 더 달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 마라톤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녀석은 특이하게도 400M 이상을 달리지 못한다. 예전 400M 달리기에서 선생님의 실수로 10M를 더 달리게 해놓자 그 10M를 남기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는 아예 달릴 수가 없다. 400M만 달릴 수 있는 녀석을 비웃었건만 아예 달릴 수 없는 나.
나는 뛰지도 못하는 자신이 녀석의 고민을 들어주는 걸 참 우스운 행위라 생각한다. 녀석은 나를 어떤 모임에 데려가고 나는 거기서 디제잉을 하고 있는 민영을 만난다. 오토바이를 타고 스피드를 체험하는 나. 하, 그 스피드의 감각이란. 그리고 결말은 너무나 교훈적인 거. ‘선생님이 어린 시절 400M를 뛰게 강요했어. 난 그때 내 한계가 400M라고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렸나 봐’ 라는 녀석의 고백. 나름 청춘 물에 시니컬하지만 코믹한 캐릭터 설정은 좋았건만 어설픈 교훈이 너무나 극악이다. 거리와 인간사를 이야기하기에 이 작품에 담긴 깊이는 너무나 얕다. 그래서 아쉽다.
<펭귄뉴스>
이 책을 택한 이유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펭귄뉴스> 때문이다. 표지를 보면 알겠지만 펭귄이 좀 사악하게(?) 생겼다. 이런 작품이 내 흥미를 제대로 자극한다. 이 작품은 마치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화씨 451>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책 속 배경은 지금이 ‘전쟁 중’이라고 말한다. 지하군과 전쟁을 벌이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전쟁은 아니다. 그냥 뉴스에서 ‘전쟁 중’이라고 나오는 정도? 주인공 동재는 한때 음악가를 꿈꾸었던 비트에 민감한 청년이다. 그는 애인 소희와의 섹스에서도 비트를 중시한다. 그래, 모든 것은 비트, 리듬이야. 어느 날 그는 라디오를 듣던 중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그녀에게 신청곡으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말한다. 헌데 이 곡을 거절당한 동재. 그리고 그는 미지의 존재에게서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한편 유일한 친구 찬기는 군대에 입대하고 동재는 편의점 알바 중 그녀(그가 곡을 신청했던 여자 DJ)를 발견한다. 한동안 라디오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그녀. 그런데 그녀가 덩치 큰 남자 둘에게 끌려가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그녀를 구한 동재. 알고 보니 그녀는 지하군 스파이로 159 채널에 위장취업, 펭귄뉴스의 사회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날 동재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톰 웨이츠를 신청하면서 그녀의 비트에 대한 평형감각이 일시에 와해되어 작전이 실패하고 만 것. 이에 동재와 그녀는 P라는 인물을 찾아가고 그는 모든 TV에 설치된, 똑같은 뉴스만을 반복시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P-칩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그녀에게 맡긴다. 그리고 동재는 그녀를 돕는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그리고 김중혁 작가를 만든 작품 <펭귄뉴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작품이 가진 세계관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비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어설프다. 내용보다는 의미가 큰 작품이지만 이 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관이 명확히 무엇이며 이 비트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비트라는 것을 통제하다, 울림, 리듬 등 어떠한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작품에 내포해두고 결국 ‘너의 리듬을 찾아라’라는 교훈을 던지니 너무 아쉽다. 마치 선배가 인생 이야기를 해준다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펼치면서 제대로 설명은 안 하고 ‘그래서 중요한 건 네 길을 꿋꿋하게 가는 거야!’라는 마치 소년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끝내는 기분이랄까?
여기에 친구 찬기의 캐릭터를 넣었으면 그의 캐릭터를 적극 활용해 양쪽의 세계관을 대립시켜야지, 주인공의 캐릭터성에만 집중하다 보니 비트, 비트, 비트, 비트만 강조하는데 이 비트가 뭔지는 정확히 안 알려주고 끝나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상상은 자유라고는 하지만 방향은 제시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또 <화씨 451>과 비슷한 세계관, 통일된 비트를 추구하는 억압된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이를 타파하는 방법은 너무나 쉽게 설정해 놨다. 한 마디로 흥미가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
김중혁 작가가 가진 장점, 사물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특하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인간을 말하는 이야기, 여기에 유머러스한 문체는 좋다. 하지만 반복되는 이야기의 낭비, 여기에 심화나 비틀기가 아닌 정직한 코드의 변화는 상당한 지루함이 느껴졌던 소설집이었다. 또 이야기간의 격차가 너무 크다. 차라리 아예 색다른 작품들이 있었다면 격차가 적게 느껴졌겠지만 그게 아니다 보니 그의 세계관에 빠져들지 않고서야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