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심오한 질문
예전에 한 교회의 주보에서 이런 만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만화는 한 아이와 목사님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는데 아이가 기도를 해도 하느님이 자기 기도를 이뤄주지 않았다며 목사님에게 불평을 한다. 이에 목사님은 우리는 주가 뜻하시는 길로 가야하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고 들어달라고 보채면 안 된다고 답한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주께서 주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 기도하라. 그러면 묻고 싶다. 주여, 왜 그런 고난과 시련을 주시나이까. 항상 행복과 안정을 위해 기도하면 안 됩니까, 주여.
<사일런스>는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17세기 일본의 가톨릭 탄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이시이 데루오 감독의 <도쿠가와 여자의 형벌> 3번째 에피소드의 가톨릭 신자들을 고문하는 장면처럼 잔혹한 처벌 장면을 도입부에서 보여준다. 십자가에 매달린 서양 신부들은 피부에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물이 조금씩 뿌려지는 고문을 견뎌낸다. 그리고 페레이라 신부. 독실한 신자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사라졌다는 말에 그의 제자였던 로드리게스와 가르페는 스승을 찾기 위해 일본을 향한다. 로드리게스는 스승이 믿음을 버렸을 거라는 추측을 믿을 수 없다.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은 고통스러우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에게 바치는 일이다. 헌데 그런 수련을 견뎌내고 자신들을 이 길로 이끌어준 페레이라 신부가 하느님을 버렸다니.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몰래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 로드리게스와 가르페. 그들이 머무르는 마을에 관료가 등장하고 그는 마을 이장을 잡은 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 마을이 기독교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마을에 숨어있는 신부들을 내놓아라. 아니면 너희 마을 사람 네 명을 잡아가겠다. 어찌 주님과 가장 가까운 신부님들을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한 세 명의 마을 사람들. 이에 로드리게스는 말한다. 주를 부정하라. 중요한 건 너희들의 목숨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주를 부정하라. 아니, 이게 신부님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주를 부정하라니?
그들은 주를 부정한다. 하지만 2차 시험에서 주를 부정하지 못하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로드리게스는 절망한다. 그저 단 한 번, 한 번 주를 버리면 살 수 있는데. 그리고 다시 주 앞에 회개하면 될 텐데. 주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을 텐데. 로드리게스는 기도를 드린다. 주여, 제발 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릴 수 있다는 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기도는 점점 질문으로 바뀐다. ‘주여, 왜 침묵하십니까?’ 내가 봐 온 서구권의 기독교 영화들은 ‘신’을 통해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주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주여, 주께서 주신 이 시련 앞에서 저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합니까?’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고난 앞에서 주를 찾고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오랜 대화 끝 인간의 선택을 한다. 즉, 세상을 만든 건 신이고 인간사의 고난과 고통을 주관하는 것도 신이지만 그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결국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헌데 이 영화의 질문은 조금 다르다. ‘주여, 왜 침묵하십니까?’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만 실컷 기도드리고 이뤄지지 않자 생떼를 쓰는 사람의 기도 같다. 그런데 이 작품의 질문은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이라는 사람은 왜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주며, 왜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아니하며 왜 그들이 고통스럽고 죽어갈 때 이겨낼 힘과 기적을 보여주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은 이런 위험한 명제와 연결된다. ‘신이 침묵한다면 우리가 그에게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는가?’ 로드리게스는 끝없이 주를 찾는다. 죽어가는 일본의 신자들을 바라보며 주를 찾고 또 찾는다. 그런데 기적은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기독교에 반기를 드는 영화일까? 잡신이 유행하는 일본 작품답게 ‘기독교는 유일신을 찬양하는 이기적인 종교이며 그 신은 막상 자신을 섬기는 신도들의 죽음에는 아무런 응답도 해주지 않는 이기적인 신이다’라며 비난하는 영화일까? 작가 엔도 슈사쿠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 문학을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간 가톨릭 신자다. 만약 이 작품이 내가 위에 쓴 명제만을 다루고 있었다면 명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각색만 15년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원작이 담고 있는 ‘의미’를 영화라는 영상에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굉장한 심혈을 기울였다. ‘신이 침묵하는 지옥에서 인간은 과연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명제를 공간에 담아낸 후 ‘나약한 인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믿음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앞서 내용 중 장난을 친 부분이 있다. 네 명이 잡혀갔는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은 세 명 뿐이다. <GO>, <란도리>, <핑퐁>을 통해 주목받는 배우로 우뚝 섰지만 한 동안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등장했던 쿠보즈카 요스케는 작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인 키치지로로 등장한다. 이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며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할이다. 키치지로는 가톨릭 신자다. 하지만 그는 신을 부정한다. 가족들이 모두 사형을 당할 때, 그는 혼자 하느님을 부정해 살아남는다. 그리고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그리고 3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잡혀갔을 때 홀로 2차 시험까지 신을 부정하면서 살아남는다. 후에는 신부를 팔아먹고 또 고해성사를 한다. 키치지로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헌데 그는 선택의 순간마다 신을 부정한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자라 할 수 있는가? 아니, 반대로 생각해보자. 저 순간 신을 부정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인간이 나약한 이유는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맞으면 아프고 찢어지면 고통스럽다. 또 죽음이란 그 무엇보다 두려운 순간이다. 키치지로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신을 배신하는 일본인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예수는 간음을 저지른 여자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하셨다. 과연 우리 중 누가 키치지로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늦잠을 자서, 약속이 있어서, 전날 과음을 해서, 너무 피곤해서 주님을 잊었던 주말들을 떠올린다면 누가 키치지로에게 주님을 부정했다 욕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일본 관리들이 신부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가장 잔혹한 방법은 그들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자, 봐봐. 네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그들은 기독교가 이기적인 종교라고 말한다. 자기들의 신만을 정답이라 하고 다른 신들을 부정한다는 것이 이유다. 그리고 그 ‘이기심’에 당하라는 듯 너희들의 이기적인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헌데 난 자꾸 이 부분에서 영화 <곡성>이 떠올랐다. 곡성 역시나 성서의 구절을 앞에 넣었고 신부와 악마를 등장시켰던 거처럼 종교적인 질문이 담겨 있는 영화다. 이 작품의 유행어, ‘뭣이 중헌디?’ 는 (내 생각으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믿는 부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믿는 부분, 보이는 세상에서 믿을 수 없는 부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믿을 수 없는 부분 등 결국 인간이 맞닿아 있는 모든 세계에 관해서 ‘너희가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 구분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일런스>에서 로드리게스가 처한 고난 역시 이 질문에 해당한다고 보여 진다. 보이지 않는 믿음, 눈으로 보이는 죽음. 이 두 가지 앞에서 과연 그는 무엇이 ‘중하다’고 생각하고 택할 것인가. 나약한 인간이기에 인간인가, 신에게 전부를 바친 신부이기에 신인가. 어쩌면 모든 종교인들이 봐야할 영화는 예수님의 기적을 다룬 신성한 작품보다는 그들의 믿음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종교란 것이 과연 나에게, 그리고 인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이런 작품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