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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사이에 둔 대화

영화 그리고 세상 - 24. 그리피스/ 네이튼 파커  <국가의 탄생>


초창기 미국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D. W. 그리피스이다. 그가 미국 영화의 아버지이니 말이다. 가족에 대해 소개할 때 아버지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듯 미국 영화의 역사에는 항상 그리피스의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위대하다’는 이유로 그의 모든 작품들을 ‘위대하다’ 소개할 수는 없다. 레니 리펜슈탈이 혁명적인 촬영기법으로 칭송받지만 그의 영화들은 나치 정권 하에 선전영화로 활용되었다. 즉, 기술적인 의미, 영화사적인 의미와 영화 그 자체의 의미는 따로 떼어서 가르치는 것이 영화교육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그저 ‘획기적이다’ ‘진보되었다’라는 이유로 그 영화 자체를 ‘위대하다’고 한다면 예술가는 정말로 천둥벌거숭이가 되고 만다.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은 그 영화사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영화 그 자체의 내용으로는 욕을 먹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KKK단이며 흑인들은 악역으로 등장한다. 즉, 주인공은 백인들을 공격하는 흑인들을 처단하는 정의의 용사이며 흑인들은 백인들을 공격하는 악마 같은 존재들이다. 아주 편협하고 좁은 시각이다. 누군가 몇 년 뒤 박 대통령을 탄핵시키려는 사람들이 악이고 이를 지키기 위한 태극기 부대의 이야기를 만든다고 하면 얼마나 손가락질을 당할까. 이런 역겨운 백인 우월주의 작품에 ‘국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인 저의가 궁금하다.

                                                                                                          

무려 102년 만에 똑같은 제목의 작품이 등장했다. 배경은 같다. 차이라면 약 100년 전의 <국가의 탄생>은 대립 이전부터 링컨 암살 이후까지를 다루었다는 점이고, 약 100년 이후의 <국가의 탄생>은 노예제도의 갈등이 존재했던 1831년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피부색은 완전 바뀌었다. 100년 전, 백인이 선, 흑인이 악이었다면 100년 후에는 흑인이 선이고 백인이 악이다. 마치 100년 전 이름이 똑같은 자신에게 보라는 듯 아주 선명하게 선과 악의 경계를 분류했다. 이는 현대의 영화 트렌드와는 다르다. 지나친 이분법적인 사고와 표현. 하지만 감독 네이트 파커는 배우라는 생업을 2년간 쉬면서 이 작품에 매달린 이유를 여기서 보여준다. 과거와의 대화. 이 잘못된 과거의 말을 뿌리부터 잘라내기 위해서는 ‘네가 악이다’라는 것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영화는 1831년 버지니아 주에서 발생한 흑인 노예 폭동을 주도한 넷 터너의 실화를 다루고 있는데 이 넷 터너라는 인물은 전도사이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다. 와, 흑인이 읽고 쓸 줄 아는 건 물론 전도도 해. 이거 완전 특권계층 아니야? 아니지, 이 흑인, 완전 주인한테 특혜를 받고 살고 있는 걸? 아쉽게도 아니다. 만약 이 작품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 네이트 파커 감독이 과거와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주인인 사무엘의 캐릭터는 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넷을 그저 이용할 뿐이다. 당시 백인들에게 흑인은 그저 도구와 같았다. 쓰고 버리는 도구. 쓸모가 있으면 더 오래 사용하고 애지중지하는 도구. 넷은 흑인들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종교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이 아닌 신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믿음. 생각해 보라. 백인들이 운영하는 농장에는 흑인노예들이 가득하다. 그들이 마음먹고 폭동을 일으킨다면 몇 안 되는 백인 주인들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혹하고 폭력적으로 흑인들을 대해왔으나 그들의 눈에 분노가 서리는 것만을 보았고 결국 다른 방법으로 넷을 이용해 흑인들에게 종교를 전파, 그들을 좀 더 복종하는 존재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흑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분노에 빠지는 건 넷이었다.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그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눈에 가득 차 있는 고통을 느끼면서 넷은 점점 마음의 동요를 받는다.                                                                                                           

이 영화는 잔인하다. 아니, 잔인할 수밖에 없다. 100년 전 <국가의 탄생>이 어땠는가? 흑인이 백인 소녀를 강간하려고 하고 그 소녀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가? 잔뜩 몰아치는 흑인 군대는 집 안에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카메론 일가를 공격한다. 그 잔인한 살상의 모습을 보고 ‘캬, 이 기법은 이게 참 대단했지’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감독 네이트 파커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캬, 그래, 이 기법 참 위대해. 그런데 말이야, 이야기는 이게 정답이야. 그때 강간당했던 건 백인 소녀가 아닌 흑인 여인들이었다고’ 라고 말이다. 


우리가 <요코 이야기>에 분노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피해자’였던 우리가 ‘악’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왜 탄압과 핍박을 당한 건 우리인데 ‘너희 중에 이랬던 사람도 있었을 거 아냐?’ 라면서 왜 우리가 가해자인 책이 등장해야 하는가? 역사적 맥락의 생략은 그 어떤 예술에서도 이뤄져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예술가는 정말 천둥벌거숭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네이트 파커 감독은 이 100년 전 작품과 대화를 시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세상에 <문라이트>가 세계 영화제를 휩쓸고, 흑인과 백인의 사랑을 다룬 <러빙>이 등장하고, 흑인 노예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혼혈 소녀 <벨>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오늘날 영화계에 가장 원초적이고 이분법적인 영화가 무슨 말이냐.


감독은 ‘국가의 탄생’의 의미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백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세상을 ‘국가의 탄생’이라 의미했던 그 작품에서 벗어나 ‘흑인의 피가 흐르는, 다른 인종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가 진짜 미국이고 그들의 무덤으로 탄생한 것이 이 나라다’라고 앞선 작품을 부정하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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