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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로 풀어낸 현대의 가족해체현상

영화, 그리고 세상 - 9. <크리피-일가족 연쇄 실종사건> 

고전 로맨스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대사들이 종종 나오고는 한다. ‘안 돼요. 당신과 나는 이뤄질 수 없어요! 우리 부모님이 당신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이 대사들은 종종 현대 작품에서도 차용되는데 앞으로는 이 대사를 바꿔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요, 부모님이 당신을 허락해주실지 말지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 우리 부모님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가족이 분화되고 있다. 이제는 단독가구들이 대세일 만큼 혼자 혹은 자식이나 부모 없이 사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작은 단위로 분리되고 있으며 양보와 인내보다는 개성과 행복을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아, 오늘날 가족의 형태를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이 영화, <크리피>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진정한 ‘공포’를 이야기하는 감독이다. 생각해 보라. 진정한 ‘공포’란 어떤 인과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친구가 오늘 무서운 이야기를 했더니 귀신이 나왔다거나 폐교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귀신이 달라붙었다 같은 게 아니라 갑자기 나타나는,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나타나는 것이 공포다. 이 작품, <크리피> 역시나 이런 맥락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가정에 갑자기 침입한 악마 같은 남자. 어디서 왔는지, 과거가 어떤지 전혀 없이 그저 갑자기 일가족을 해체시키는 그 남자에 대해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하지만 공포가 인류에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거기에는 어떤 강박이 있으며 현상이 있고 배경이 있다. 이 영화 <크리피>는 그 배경을 ‘가족’에서 찾는다. 먼저 사건을 보자. 6년 전 있었던 히노시 일가 실종사건. 형사를 은퇴하고 심리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다카쿠라에게 후배였던 노가미가 찾아와 이 사건의 재수사를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 일가족 중 딸을 제외한 전원이 사라졌던 것. 엄마에게 걸려왔다는 수상한 전화, 그리고 마치 증발한 듯 사라진 가족. 그리고 옆집에서 발견된 가족의 시체. 경찰은 옆집 남자를 수사대상에 올려놓으나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리고 이사 온 다카쿠라네 옆집. 다카쿠라의 부인 야스코는 옆집 남자 니시노가 너무 이상하다고 말한다. 어떨 때는 시크하고, 어떨 때는 분노에 치를 떨며, 어떨 때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또 어떨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 그 알 수 없는 남자에 대해 야스코는 처음에는 경계와 혐오를 느끼지만 딸을 데려와 요리를 배우고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낀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매력적이지 않냐며 들이대는 니시노. 그것도 모자라서 남편보다 자신이 더 멋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니시노의 딸은 야스코에게 말한다. 그 남자, 내 아빠 아니라고.

                                       

팔색조 같은 배우 카가와 테루유키는 니시노라는 캐릭터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남자로 포장한다. 대체 이 남자 누구지? 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말이다. 놀라지 마라. 이 남자의 정체는 ‘악인’이다.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냥 ‘악한 남자’ 그는 옆집의 일가족들을 죽이고 이제 다카쿠라네 집까지 자신이 차지하려고 든다. 부동산을 먹는다는 게 아니다. 그저 약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그들 가족을 해체시킨다. <계부>의 주인공처럼 과거 가족에 대한 원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가족을 해체시키고 망가뜨리는 ‘악’이다.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가? 그러면 왜 악령이 있다고는 믿지 못하는 것인가? 그는 가족 사이에 퍼져서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악이라는 존재다. 하지만 50대에 작은 키를 가진 아저씨가 대체 무슨 수로 가족을 파멸시키는 것인가? 얼굴로 여자를 꼬시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총으로 협박하기에는 은밀하지가 못한데. 그 비밀은 바로 현대 사회의 가족 구성원들의 공포에 있다. 자, 먼저 니시노라는 캐릭터를 보자. 앞서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참 다양하다. 헌데 이 다양한 얼굴은 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다양한 얼굴이다. 집에서는 엄격한 아버지가 직장에서는 주눅 들어 있을 수 있고, 집에서는 해맑은 엄마가 친구들과 만나기만 하면 푸념을 하고 다닐 수 있다. 즉, 니시노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다양한 얼굴은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 낯설지 않은 캐릭터의 느낌이 그와 야스코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니시노는 ‘어떤’ 얼굴이라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전 광고 중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까지 쫓아오기에 범죄자인줄 알았건만 이웃이었다는 광고가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웃에게 자신의 얼굴을 ‘조금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소통을 생각하지 않으며 누군가 소통을 시도하면 피하기 마련이다. 야스코가 이사 온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이 동네는 원래 이웃 간 교류가 없어요’ 라며 이웃집 여자는 선을 딱 잘라버린다. 자연스레 야스코가 소통하는 인물은 비록 과격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상냥한 얼굴이라도 있는 니시노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왜 야스코는 이웃 간에 ‘소통’을 바라는 것일까? 단순히 아이가 없어서? 아니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서? 원인은 다름 아닌 주인공 다카쿠라에게 있다.

                                                                                                               

영화의 시작부분을 생각해 보라. 그가 형사를 그만두게 된 사건. 그는 심리학 교수인 자신의 역량에 과하게 의존,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다 칼에 찔린다. 이 한 장면이 다카쿠라라는 캐릭터 전부를 설명해준다.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넘치며 심리학 교수라면서 다른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그의 성격은 학생들에게 수업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나는데 섬의 숲에서 여자들을 풀어놓고 사냥을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소를 짓는 것이다. 그는 공감능력이 낮다.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그건 자신의 프라이드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 남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는 반증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부부생활은 어땠을까? 다카쿠라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의 생각을 깊이 있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늘 혼자 있다는 생각에 외로움에 시달렸고 니시노라는 악령에게 당한 것이다. 


니시노라는 악령은 이야기만 보자면 단순히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가정을 공격하는 악령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니시노는 사회의 공포다. 갈수록 가족들이 작아지고 분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더 이상 대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가장이 혼자 힘으로 많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쪼개지면 편한가? 그것도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사회적 기반의 약화가 인간을 갈수록 ‘혼자’로 몰아넣고 받침대가 없는 개개인은 아주 작은 계기나 감정에도 쉽게 무너진다. 현실도 힘든데 미래는 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야스코가 마지막에 지른 비명의 의미는 이런 공포가 아닐지 모르겠다. 감정이 격해져 서로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부부가 아닌 공포가 가득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는 부인의 얼굴. 결국 현재의 위기를 이겨내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다포세대에는 인간관계도 포함된다고 한다. 친구들이랑 술 한 잔, 카페에서 대화 몇 마디 나누는 시간과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 20대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아슬아슬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을 포기하는 것. 이 역설이 담긴 작품이 <크리피>가 아닌가 싶다. 일가족이 실종되었다. 아니, 과거의 ‘가족’이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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