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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의 심리로 풀어본 <단지 세상의 끝>

이야기가 아닌 인물 심리의 추측으로 풀어본 <단지 세상의 끝>


                                                                                                    

영화계에는 항상 ‘천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혜성처럼 나타나 데뷔작으로 충격을 주고 그 뒤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 역사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 쿠엔틴 타란티노, 대니 보일 등의 감독들이 그렇게 등장했고 대한민국에서도 나홍진 감독이 장편 데뷔작부터 강렬함을 보여주었고 <황해>와 <곡성>으로 한국 영화계에 없었던 문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천재 중 한 사람이 바로 자비에 돌란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부러운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겨우 20살 때 <아이 킬드 마이 마더>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을 때 나이가 겨우 27이다. 7년 만에 전 세계 감독들이 꿈꿔온 자리에 오른 것이다. 

                                                                                                     

돌란의 재능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다른 천재감독들처럼 자신만의 문법을 확립해가고 있다는 점이고 이 문법을 하나씩 확립시킬 때마다 평단의 극찬을 받는다는 점이다. 돌란의 경우 '가족' 특히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이야기에 있어 지적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작품 자체의 색은 작품마다 차이를 보인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한 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 <단지 세상의 끝>은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인물 간의 묘한 ‘관계’를 통해 풀어가는 작품이다.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답게 대사 하나하나에 큰 의미가 담겨 있으며 주연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에게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면의 심리에서 깊게 요동치는 감정의 골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특명이 떨어졌던 영화다.

                                                                                                

장뤼크 라가르스가 세 번을 고쳐 쓴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의 특징은 작가 스스로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점에서 주인공에 자신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는 부분이다. 작가가 많이 투영된 작품들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주인공의 감정이 과하게 부풀러져 있다는 거, 다른 하나는 겉으로는 그리 크게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자기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주인공 루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 죽음을 알리기 위해 집으로 간다. 그는 유명 작가이며 12년을 가족들과 만나지 않았다. 그가 보낸 것이라고는 엽서 뿐. 여기서 루이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유명 작가. 작가란 직업은 자신의 예술세계에 있어 주관이 강하고 취향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기준이 뚜렷하다. 또 어울리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도 다르다.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하고 연구하지만 그들의 삶을 모방해 글로 옮길 뿐 모두를 이해하고 취향을 맞춰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두 번째는 12년 간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에 김미경 강사가 한 말 중 이 말이 떠올랐다. ‘자식들이 너무 효자면 성공하지 못 한다’ 참으로 좁은 시각을 가진 말이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루이의 이 12년은 가족에 대한 분노 혹은 환멸에서 온 것이 아닌 개인의 성공을 위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루이는 이기적인 사람인가? 그는 가족과의 연을 완전히 끊고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괴물인 걸까? 그리 묻는다면 좀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집에 돌아온 그 순간 가족들에게 사랑을 ‘구걸’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루이는 사랑을 구걸하지도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이야기할 타이밍만을 보고 있다. 그의 집에는 네 명의 가족이 있다. 어머니 마르틴, 형 앙트완, 여동생 쉬잔, 그리고 처음 보는 형수 카르틴. 이 영화에서 그와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누는 사람은 카르틴이다. 이 점이 궁금증을 가져온다. 루이는 왜 가족 중 카르틴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대화가 많은 상대의 특징은 정서적인 편안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왜 가족이 아닌 카르틴을 택했을까? 난 이 이유를 두 가지 중 하나라고 본다. 하나는 가족을 대하기 껄끄러운 과거가 있기에, 다른 하나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차라리 덜 미안한 만난 적 없는 형수를 택한 것이다. 헌데 그런 껄끄러운 과거는 딱히 없어 보인다. 쉬잔과 마르틴 둘 다 루이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있어서 루이가 집을 떠났다면 그들이 굳이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런 앙금이 없었기에 쉬잔과 마르틴은 비교적 쉽게 루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두 사람이 루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쉬잔의 경우 오빠에 대한 동경이다. 쉬잔은 온몸에 문신을 하고 딱히 마땅한 직업도 없어 보이는 외형을 보여준다. 정확한 나이가 나오지 않았지만 아직 자신에 대해 찾아가는 나이인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런 나이가 지났을 수도. 그런 그녀에게 루이는 원망의 존재라기보다는 섭섭한 존재, 그리고 그 섭섭함의 이유는 루이의 사회적 성공에 있다. 그는 루이가 쓰는 언어에 대해 ‘함축적 언어’라고 말한다. 작가인 오빠가 쓰는 글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집안에서 가장 성공한 존재로 오빠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원망보다는 섭섭함이라는 감정이 어울릴 것이다. 반면 마르틴은 ‘모성’만으로 루이를 껴안는다. 그런데 그 모성이 편한 모성은 아니다. 마르틴은 모성에 확실한 거리를 둔다. ‘너는 내 조카야!’라는 이유로 불량한 디카프리오를 껴안았던 <마빈스 룸>의 다이안 키튼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그 모성에는 섭섭함이 서려있다. 12년 만에 아들을 보면 참았던 감정이 폭발할 거 같지만 그녀는 섭섭함보다는 조금 더 큰(원망보다는 훨씬 작은) 감정과 아들에 대한 모성이 섞인 감정으로 그를 대한다. 그래서 루이와 마르틴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은 약간 불편한 느낌을 준다. 

단지 세상의 끝 : 네이버 영화                                                                                                                

반면 원망의 감정만이 강한 인물이 앙투완이다. 그는 루이가 집에 돌아온 것을 대놓고 싫어하는 인물이며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다. 난 이 앙투완이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전에 두 가지 점을 집고 넘어갈까 한다. 하나는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정확한 정보가 없는 아버지의 부재와 옛날 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루이의 동성친구다. 루이는 집에 찾아와 예전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앙투완은 우리가 가난하게 살던 시절의 그 집을 왜 찾아가고 싶어 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이 가난한 과거는 유독 앙투완에게 적대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루이가 집을 떠난 12년 전, 그들은 어디에 살았던 걸까? 가난한 과거 집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이었을까? 또 궁금증이 있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없었다면 언제부터 부재였던 것일까? 만약 이 시점이 12년 전, 루이가 집을 떠났던 시점이라면, 그때 그들은 옛날 집에서 살았고, 아버지가 없었다면 앙투완이 유독 루이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점이 설명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추측대로라면 앙투완은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루이의 사회적 성공과 12년의 공백이 그에게는 분노를 키우는 이유가 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루이가 과거 동성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난 이 부분이 루이와 가족 간의 관계, 그리고 작품이 가지는 시점이 왜 이렇게 좁을 수밖에 없는지를 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동성취향을 숨기고 살아왔다. 이 ‘숨긴다’라는 부분이 그가 가족들에게 자신을 많이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과 연결된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가진 비밀이 크기에 자신을 잘 보여주지 않았고 이 점이 소통의 단절, 마치 이방인과 같은 본인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은 카트린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립적인 존재다. 왜냐하면 완벽한 가족이 아니고, 루이가 있을 당시의 추억이 전혀 없으며 루이란 존재를 처음 만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는 카트린을 편해한다. 하지만 이 ‘편한’ 소통이 쭉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가 형에 대해 형수에게 이야기할 때 카트린은 대화를 피한다. 자신의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다. 루이가 그녀를 너무 편하게 여긴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난 이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카트린 역시 이방인일 뿐이라고. 만약 쉬잔이라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는 쉬잔과 카트린처럼 긴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즉, 카트린은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에 편하지만 동시에 가족이 아니기에 그의 본심을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카르린은 ‘완벽한 소통’의 의미가 아닌 결국 루이가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집에서 아무도 없음을 보여준다.

                                                                                                                               

                                                                   

<단지 세상의 끝>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루이는 앙투완과의 대화 중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세상의 끝도 아닌데 왜 그래?’ 라고 말이다. 감독은 잔인하게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다, 이 빙구 자식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격정적이다. 앙투완은 강제로 루이를 보내려고 하며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거조차 방해한다. 이에 반발하는 쉬잔, 그리고 루이. 이를 참지 못한 앙투완은 루이를 때리려고 하나 마르틴은 이를 말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광명과 함께 루이스 주먹을 내려놓는 순간, 루이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마치 ‘세상의 끝’에 도착한 듯 말이다. 난 이 제목에서 말하는 세상의 끝에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는 가족이다. 탄생이 가족과 함께하듯 결국 종착역도 가족, 즉, 가족이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다. 두 번째는 소통이다. 이 작품은 루이의 시점만으로 전개가 되는데 오직 대사만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다른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다. 그리고 이 적은 정보는 관객들이 등장인물에 대해 잘 모르는 거처럼 루이의 주변 인물들 역시 루이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부분과 연결된다. 세상의 끝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어쩌면 루이에게 가족들과의 단절을 경험한 이 집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그래서 앞에 ‘단지’를 넣었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세 번째는 회귀본능이다. 작품의 초반, 루이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대사를 한다.


 “인생엔 누가 뭐라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수없이 존재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수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끝에 

 내 발자취를 되짚어가기로 했다. 

 나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여정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연어는 죽기 위해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 역시 12년 간 집을 떠나 마치 ‘타인’처럼 존재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단지’ 그곳이 집이기에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과거 <그랑 블루>를 보고 누군가 ‘자궁회귀본능’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더 이상 그 추억으로 갈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다가온다. 그래서 루이가 ‘옛날에 살던 집’을 그리 가고 싶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허면 그는 왜 결국 그 옛날 집에 가지 않았나? 그 이유는 ‘단지’ 지금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세상의 끝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루이가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의 끝. 어쩌면 소통이 되었다면, 서로가 서로를 알았다면 그 예전에 살던 집을 향하는, ‘단지’가 아닌 ‘진짜’ 세상의 끝을 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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