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글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식량은 산술(등차)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인구는 기하(등비)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자연대로라면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은 피할 수 없다’는 명제를 주장하며 과잉인구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인구는 줄어들어야 하며 세계는 효율적으로 인구를 줄일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는 출산율 부족을 이유로 노동력 빈곤을 호소하며 출산을 장려한다. 그런데 장려하는 ‘귀한 노동력’은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며 마치 쓰고 버리는 소모품처럼 취급당한다. 또 미래에 식량문제가 화두가 되며 ‘동물이 아닌 곤충’이 미래식량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면 인구를 줄여야 되는데 또 의학기술은 발전을 거듭하며 수명을 연장시킨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대체 어느 장단에 손발을 맞춰야 되는 거야?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다. 환경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환경운동가들은 지구에 대한 오염이 지구의 자정작용을 넘었다며 환경보호를 촉구한다. 헌데 반대편에서는 지구의 자정작용에는 문제가 없으며 환경오염이 우리의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재활용부터 물 절약까지 철저하게 교육을 시킨다. 반면 미국의 경우 재활용을 지키지 않는다. 세계에서도 우리나라만 유독 철저하게 재활용을 지킨다. 그럼 환경문제는 생각보다 별로 심각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쓰레기 섬 문제나 오존층 파괴는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이 심각한 문제를 왜 세계는 손 놓고 있는 건가. 환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환경을 내세우는 것일까? 이는 인간의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자신들을 이루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엇이 실체고 허상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필립 K.딕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의 30년 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생소한 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는 리플리컨트고 다른 하나는 블레이드 러너다. 리플리컨트는 복제인간이고 블레이드 러너는 잘못된 복제인간을 찾아 체포 또는 폐기하는 직업이다. 2019년, 너무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가진 복제인간들이 지구를 향했고 이들은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자신들을 만든 사람을 찾아간다. 리플리컨트 로이는 ‘조금 더 살고 싶다’고 말하나 잔인할 정도로 진실을 말하는 제작자를 눈물을 흘리며 죽여 버린다. 이런 인간과 비슷한 리플리컨트들은 폐기되고 새로운 리플리컨트들이 제작된다. 그들은 이전의 버전과 달라 더 순종적이며 덜 감성적이다.
허나 아직 완전히 폐기되지 않은 이전 버전의 리플리컨트들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 K는 이들을 찾아 제거하는 일을 한다. 그 역시 리플리컨트이나 이전 버전들과 달리 더 명령에 종속을 받는다. 그는 통제 밖의 리플리컨트를 제거하던 중 그에게 이상한 말을 듣는다. 자신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식의 발언. 그리고 K는 나무 아래에서 유골을 발견한다. 그 유골은 다름 아닌 리플리컨트 레이첼의 것. 레이첼은 자신이 리플리컨트인지 모르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레이첼이 ‘임신’을 했던 것이다. 복제인간이 임신을 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왜 이 작품의 핵심이며 획기적인 발견인 것일까?
이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니안더 월레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리플리컨트를 제작하는 회사의 총책임자다. 리플리컨트는 철저한 상업적인 용도를 지니는데 이는 그들이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필요에 의해 소멸되기 때문이다. 헌데 그들이 성관계를 통해 출산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과정 하나로 그들은 인간과 같은 ‘존엄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리플리컨트를 생산할 수 있는 니안더는 뭐가 되는 걸까. 한 마디로 신이다. 인간이 풀지 못한 하나의 숙제인 생명을 다룰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는 신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헌데 이런 내 의견에 반기를 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속 세계관은 인간과 복제인간이 얽혀 사는 세계인데 인구가 더 필요하면 복제인간을 만들면 그만 아닌가? 복제인간이 출산을 한다는 게 그리 큰 의미는 없어 보이는데? 물론 출산을 통해 인간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 말할 순 있겠지만 그 아이들 역시 차별의 위치에 올라서면 똑같지 않나?’ 이 순간 영화가 중심으로 삼고 있는 내용은 혼란을 겪는다. 과연 저게 의미가 있는 발견일까?
여기서 주인공 K에 대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조이라는 여자. 그녀는 <그녀>의 ‘그녀’처럼 인공지능이다. 다만 차이라면 여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이 조이는 판매되는 상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토이 스토리>의 버즈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게 된 이유가 자신이 아닌 수많은 버즈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처럼 조이 역시 수많은 조이들이 있기에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없다. 허나 K는 마치 연인처럼 조이에게 애정을 느낀다. ‘허상’인 조이에게 마치 ‘실체’와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느낌은 K의 기억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는 레이첼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기억 속에는 장난감 말을 숨긴 기억이 있다. 리플리컨트는 생산과 동시에 가짜 기억이 심어진다. 그는 그 기억이 가짜라 생각했다. 헌데 기억 속 장소를 찾아가 보니 어린 시절 그가 숨은 장소에서 장난감 말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전의 K, 그러니까 리플리컨트인 K는 허상이었던 걸까. 그리고 기억이 진짜라 여기게 된, 자신을 인간이라 여긴 이 순간 그는 실체가 된 걸까.
이런 실체와 허상에 대한 의문을 생각할 때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세 장면 있다. 첫 번째는 러브가 조시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리플리컨트에게는 이름이 없다. K처럼 일정한 코드명으로 불릴 뿐이다. 헌데 러브는 이름이 있다. 니안더는 수족인 그녀에게 너는 특별하다며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리고 러브는 레이첼의 진실을 알기 위해 K의 상관인 조시와 대립한다. 조시는 ‘인간’이다. 분명 인간은 리플리컨트보다 우월한 존재다. 리플리컨트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태어났고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러브는 조시가 손에 쥔 유리잔을 깨뜨리고 악력을 쥐어 그녀의 손에 유리가 박히게 만든다. 그리고 말한다. ‘너희 인간은 너무 약하지’ 인간이 끊임없이 도구를 발명하고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뭉친 이유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라는 객체는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실체인 인간은 허상이라 여긴 리플리컨트에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실체가 무조건 허상에 앞서며 실체의 존재가치만이 우월한가라는 질문에 감독은 러브의 강함과 조시의 나약함을 통해 잔인한 답을 내놓는다.
두 번째는 러브에 의해 조이가 소멸되는 장면이다. K는 니안더의 부하들에게 당한다. 그리고 러브는 조이가 담긴 장치를 부셔버린다. 이 순간, 조이는 K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사랑한다고. K와 조이의 관계는 단순한 소비자와 서비스의 관계였을까? 사회는 애니 캐릭터나 연예인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한 이들이라며 동정을 표한다. 허상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구름 위를 허우적거린다 생각하는 것이다. 헌데 내 곁에 있는 사람이야 말로 ‘실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목적을 위해, 내 밝은 면만 보고, 필요에 의해 사랑이라는 명제를 택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단순 사람이라는 이유로, 형태를 가졌다는 이유로 실체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이는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와 레이첼의 관계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데커드는 레이첼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허나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레이첼에 대한 사랑이 실체였다. 그리고 그 실체에 대한 답을 보여주기 위해 속편에서 레이첼의 임신과 출산이 등장했을 것이다.
헌데 이런 실체라 여긴 ‘사랑’에 대해 니안더는 참으로 묘한 질문을 던진다. 세 번째 장면은 데커드와 니안더의 만남이다. 러브에 의해 니안더에게 끌려 온 데커드는 그곳에서 다시 레이첼을 만나게 된다. 이 레이첼은 니안더가 만든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진실된 것이라 말하는 데커드에게 니안더는 말한다. ‘혹시 그게 다 우리가 계산한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사랑의 설계’는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쓰인다. 상대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을 꾸미며, 상대와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기도 한다. 만약 레이첼이 계획적으로 데커드에게 접근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모두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뤄졌다면 그 감정은 실체인가. 어쩌면 가장 정확한 실체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피어오르게 계산을 했고 결과를 냈으니 말이다. 허나 그 계산을 몰랐다면, 그게 계산인 걸 안 후 감정에 배신을 느꼈다면 실체는 허상으로 바뀌고 만다. 계산으로 만들어진 리플리컨트 K와 프로그램 조이. 이 두 사람 역시 조이의 상품성을 위해 사랑에 빠지도록 계산되었고 이 계산에 K가 빠진 거라면 그의 감정은 명확한 실체일까, 아니면 허상일까.
감독은 이런 질문에 대해 ‘뭣이 중헌디?’라는 의문으로 끝을 낸 <곡성>과 달리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해답이 바로 결말이다. 왜 결말에서 K는 데커드를 구한 걸까. 그는 자신과 같은 리플리컨트들을 만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니안더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며 데커드를 죽여 달라 K에게 부탁한다. 같은 리플리컨트들의 미래를 위해 K는 데커드를 죽여야 했다. 그게 종이 택하는 이기심이고 기계가 택하는 합리성이다. 헌데 K는 정반대를 택한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데커드를 구한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딸에게 보낸다. 잠시지만 K는 자신이 데커드와 레이첼의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환상이 깨지고 마음에 분노와 공허함이 남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선택은 가장 ‘인간’과 흡사한 사랑, 그리고 인류애다. 아버지와 딸을 만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이건 명백한 ‘실체’다.
인간은 돈에 매달린다.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끔찍하게 여긴다. 역시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우정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다 대상이 있는 실체기 때문이다. 종교나 타인의 아픔에 지나치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와 닿지 않는 허상의 느낌이 강하기에 우리 인간은 조금 더 실체에 가까운 가치에 집중하고 헌신한다. K에게 눈에 보이는 가치는 리플리컨트의 미래가 아닌 데커드와 딸의 만남이었다. 그는 실체와 허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영화 속에서 마지막 순간 가장 ‘실체’라 여기는 길을 택했다. 무엇이 실체고 허상인가. ‘뭣이 중헌디’라는 말처럼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리기 힘들다. 허나 하나 확실한 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 사회의 풍속과 관습, 매스컴과 여론이 아닌 인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택하는 선택이야 말로 진정한 실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