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가 작품을 내놓으면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오롯이 감상자의 몫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먼저 볼 수 있는 시사회 자리는 좋아하지만 감독과의 대화는 싫어한다. 창작자는 감상자가 비판을 가하면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걸 이렇게 의도했는데 상대는 모르고 싫은 소리를 하니 섭섭한 게 당연하다. 그러면 감상자는 감독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되고 생각을 고친다. 이 순간, 감상자의 ‘오롯한’ 해석은 무너진다. <유리정원>의 신수원 감독은 어쩌면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이 글을 보고 경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예술작품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는 과학도 재연과 소설가 지훈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재연은 어린 시절의 일로 한쪽 다리가 성장하지 않았으며 지훈은 뇌에 문제가 생겨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두 사람은 모두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재연은 성치 않은 다리와 가족사 때문에 얼굴에 그늘을 달고 산다. 지훈은 작가는 작가지만 실패를 한 작가다. 그는 이혼은 물론 표절을 일삼는 선배 문인에게 대들었다가 출판이 취소된다.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목소리는 낮다. 멀쩡한 도로를 퍼 엎어버릴 돈은 있지만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이동로는 없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문인은 열 손가락에 뽑을 정도로 극소수다. 겸업을 하지 않고서야 먹고 살기 힘들다. 또 예전처럼 문인이라고 사회적인 명성이나 대접을 받는 시대도 아니다.
재연과 지훈의 잔혹동화는 사회적인 버팀목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지훈에게 사회적 버팀목은 아내였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작가에게 안정적인 창작활동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건 집안의 수입이다. 아내는 그런 역할을 해주었고 그 속에서 지훈은 창작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이혼을 선고하자 그는 단칸방으로 쫓겨나듯 이사 간다. 재연에게는 정교수가 있었다. 그는 다리가 아픈 재연을 위해 천천히 걸어줄 줄 아는 배려가 넘치는 남자였다. 하지만 연구가 지체되자 재연의 연구를 수희에게 넘긴다. 그리고 연인의 관계 역시 폐기해 버린다.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사랑의 상실의 인생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남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못 사는 사람들은 더 못 살게 된다. 목소리는 작아지고 묻히며 힘을 잃게 된다. 이런 두 사람 앞에 나타난 희망은 뜻밖의 형태를 지닌다.
놀랍게도 그 형태는 ‘녹조’이다. 재연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한다. 허나 높은 단계의 연구결과인 생명을 위한 연구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정교수는 재연의 아이디어를 베낀 수희의 화장품 연구를 허락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녹조는 정교수의 생명을 앗아간다. 재연이 인공혈액을 가지고 숲속의 유리정원으로 숨어버리자 이를 훔치기 위해 밤에 냇가를 건너다 빠진 것. 헌데 재연은 정교수를 이 인공혈액으로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품에서 녹조는 돈과 생명의 대립된 의미를 지닌다. 재연은 녹조를 생명을 지키는데 쓰고 싶어 하지만 사회는 돈을 버는데 이용하길 바란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업에만 집중하며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이윤을 얻는 ‘저비용 고효율’에 심취해 있다. 연구실을 떠난 재연이 돈을 버는 것도 녹즙을 팔아서이다. 사회에서는 ‘녹색’조차 돈이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돈이 되는 유기농 푸드는 각광받지만 녹지를 지키자는 그린벨트 운동은 산업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꺼려한다.
생명의 상징인 ‘녹색’이 ‘죽음’의 상징이 되어버린 건 MB의 4대강 사업을 통해 알 수 있다. 전 대통령의 무모한 사업은 강바닥에 사는 생명들을 죽여 버렸다. <유리정원>의 배경은 아름답다. 쪽빛보다 푸른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맑게 만든다. 허나 중간중간 드러나는 강에 낀 녹조들, 그리고 그 녹조 때문에 생명력을 잃어버린 물의 모양은 슬픔을 자아낸다. 4대강 사업의 실패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녹조를 없애기 위해 로봇 물고기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또 많은 국고를 소비했으나 연구 성과는 이뤄내지 못했다. 이 강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자본이 소비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녹조가 꿈꾸었던 생명은 MB의 당선 당시의 분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도덕성이 무슨 상관이냐, 우리가 잘 먹고 살 사는 게 중요하지!’
재연은 자신이 ‘나무’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몸에 녹색 피가 흐른다고 여긴다. 한 마디로 자신이 ‘인간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리고 지훈은 왜 이 생각에 빠져든 걸까? 빈부격차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느끼게 만든다. 같은 인간임에도 사는 환경, 수준, 미래가 너무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그들’을 서로 다른 종이라 여긴다.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생각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수록 인간은 ‘노력’이 아닌 ‘믿음’에 의존하게 된다. 높은 부동산 가격과 해마다 오르는 대학원 등록금, 경제지표와는 유리된 개인의 삶은 누군가에게 강하게 의존하는 믿음을 이끌어냈다. MB가 BBK라는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지닌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 당선되었던 이유는 마치 신을 섬기는 거처럼 MB에 열광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믿음 덕분이었다.
당시에 대한민국은 참으로 ‘순수’했다. 대체 저 사람이 뭐기에 우리 모두를 희망의 낙원으로 이끌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인간은 순수하다. 그래서 쉽게 오염된다. 지훈도 그런 존재다. 그는 재연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그 바탕에는 작가적인 욕망 혹은 출판사 사장 현의 협박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소설을 쓰게 된 마음에 한 구석에는 강한 ‘이기심’이 있었다고 본다. ‘난 이 작품을 꼭 쓰고 싶어’ ‘난 성공해야 해’ ‘내가 중요하지 남이 중요한가’ 이런 생각들이 그를 합리적으로 만들었다. MB의 당선 때도 그랬다. ‘도덕성이 뭐가 중요해, 나라만 부유하게 만들어서 우리도 좀 잘 살게 만들면 그만이지’ 이런 이기심이 잘못된 사람에게 힘을 주었고 나라를 생명력 잃은 녹색으로 물들게 만들었다. 지훈이 소설을 발표한 순간, 재연의 ‘판타지’는 끝났다. 필자는 이 지점이 국민들이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잔혹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연의 녹색은 생명의 상징에서 죽음의 상징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해석에 있어 가장 큰 의문은 결말일 것이다. 이 작품이 MB 정권에 대한 풍자라면 결말은 비극으로 끝을 내야 한다. 하지만 작품은 녹색의 인공혈액을 통해 새 생명을 부여받은 새를 보여주고 나무에서 태어난 재연이 나무가 된 듯한 결말로 희망을 부여한다. 개인적으로 이 희망의 핵심은 ‘나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무는 단단하다. 뿌리를 바닥에 박아 움직이지 않는다. 단단한 줄기와 넓게 퍼진 가지는 웅장함을 주기도 한다. 나무는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지나가는 바람에, 즉 헛된 희망에 귀를 기울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마음대로 숲을 이동하지 않는다. 재연이 정교수에게 인생을 맡기고 배신을 당한 이유, 그건 그녀 자신이 나무처럼 바닥에 박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한쪽 다리가 성장하지 못했기에 흙에 몸을 고정할 수 없어 달콤한 목소리에 이리저리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 마지막 결말은 각각 두 사람의 ‘판타지’를 이루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지훈에게는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며 죽음을 앞두고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인간세상에서 상처만을 받은 재연에게는 나무가 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그 아픔을 안아준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은 쉽게 오염된다.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않은 인간일수록 더. 사회가 할 일은 아스팔트를 늘려 나무나 설 수 없게 만드는 게 아닌 흙을 뿌려 양분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흙속에서 나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단단하게 자신을 고정시켜 매혹적인 봄바람이나 시린 겨울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말이다. 또 다시 아까운 희망을 강바닥에 쳐 박아두어서는 안 된다. 이 영화가 기괴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영상만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이유. 그 이유가 마치 동화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달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