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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 콜> - 경제적 살인에 주목하라

*주의 : 포스트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00년대 초 미국은 IT 버블 붕괴, 911테러, 아프간/이라크 전쟁 등으로 경기가 악화되었다. 이에 대한 경기부양책으로 그들은 초 저금리 정책을 펼친다. 이에 주택융자 금리가 인하되었고 자연스레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 주택담도대출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대출금리보다 주택 가격이 높은 상승률을 보였기에 파산하더라도 주택 가격 상승으로 금융회사가 손해 보지 않는 구조여서 거래량은 대폭 증가하였다. 증권화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높은 수익률 보장과 높은 신용등급의 상품으로 거래량이 폭증했다. 2004년, 저금리 정책이 종료되면서 부동산 버블은 막을 내리게 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금리가 올라갔으며 저소득층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기업들이 부실화되며 미 정부가 공식적인 개입을 부정하며 대형 금융사, 증권회사들이 파산을 겪게 된다. 이 사태는 세계 경제시장에 타격을 주어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 이어진다.

<마진 콜>의 시작은 리스크 관리 팀장 에릭의 해고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은 에릭. 그는 자신이 헌신한 회사에 버림을 받았다. 짐을 싼 에릭은 회사를 떠나기 전 피터에게 자신이 정리한 usb를 주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밤새 그 데이터를 분석하는 피터. 그 데이터에서 피터는 발견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들의 회사가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죽은 자신의 개를 동물병원에서 데려오던 샘은 부하직원 윌로부터 피터가 조사한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의 권유로 긴급 이사회가 소집된다. 이 이사회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는 법'에 대해 고심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전날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스릴감과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작품일 것이라 여겨지지만 정 반대다. 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하며 정적이다. 그래, 애초에 그들에게는 걱정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들은 상위 1%의 부자다. 정보화 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변화하게 된다. 그 변화 중 하나가 스스로가 가진 자기결정권을 없앤 수동적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이전 세대의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결정을 했다면 정보화 사회의 인간은 '정보'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한다. 이미 자신의 손에 무엇이 더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있는 정보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1%, 회사의 이사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피터가 정보를 다 해석하였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리스크를 가장 줄일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인간이다. 그들이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그 피해를 다른 누군가에게 끼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샘은 그 잔인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세 장면에서 필자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주었다. 첫 번째 장면은 윌과 에릭의 대화다. 윌은 부하직원들에게 자신이 버는 돈의 상당한 부분을 유흥비로 탕진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꾸준히 돈을 벌어야만 하는, 그리고 그 돈이 꼭 필요한 인물이다. 에릭은 앞서 리스크 관리 팀장에서 해고된다. 그는 이 회사의 위기를 미리 피터한테 알려주는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해고당한 사람이 회사의 위기를 알려준다? 어차피 난 회사에서 해고당했고, 6개월 치 월급과 의료보험이 적용 안 되어도 돈은 벌 만큼 벌었다. 이런 인물이 에릭이다. 그는 직장에서 해고된 뒤 잠적하고, 윌은 회사의 요구로 그를 찾아온다. 윌과의 대화에서 에릭은 다리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과거에 엔지니어였고 거대한 다리를 건축해 사람들의 출근시간을 줄였다고. 그 시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는 자신의 노고를 스스로 치하한다. 앞서 필자는 에릭이 회사의 위기를 미리 알려줬다는 점에서 책임감과 의무감이 큰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여기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필요'를 생각한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하나의 부품이다. 그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에서 꼭 필요한 부품이 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도구가 실적, 그리고 이 실적으로 받게 되는 봉급이다. 에릭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과 의무감은 이 부품이 되기 위한 기초적인 도구이다. 회사는 이런 사람을 원한다. 그리고 에릭은 이에 딱 맞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책임감을 다한 것이다. 이에 대한 윌의 대답은 꽤나 인상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길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고. 그는 돈이 필요하지만 딱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마인드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돈은 내 즐거움-나쁘게 말한다면 쾌락-을 채우는 용도면 족하다. 때로는 바쁘게, 그리고 치열하게 부품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보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두 번째는 회장인 존과 샘의 대화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회장 존의 무게감은 상당하다. 단순히 배우가 주는 이름값 때문이 아니다. 존이라는 인물이 자본과 정보가 가진 속성에 너무나 밝기 때문이다. 그는 피터에게 지금 자신의 회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설명해 달라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아느냐며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아는 분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가 회사를 운영하는 원리는 간단하다.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정보를 잘 해석하고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인재들을 모은다. 그리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은 회사가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샘은 존이 내린 냉정한 선택에 대해 울분을 토해내며 회사를 퇴직하겠다 말한다. 허나 존은 이 샘의 감정적인 대화에 굉장히 이성적으로 대꾸를 한다. 이 대답은 회사에 30년 넘는 세월을 바친 샘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답이다. 누가 뭐래도 '회사가 먼저다' 정말 알기 쉽게 샘에게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면서 그를 설득한다. 이 장면에서 존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바로 돈이 가진 속성이다. 인류는 돈이 있기에 싸움을 멈추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만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제대로 도래하기 전, 인류는 다양한 가치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 그들에게는 사상과 인종, 종교가 전쟁의 이유였고 이 때문에 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제대로 자본주의가 정착한 지금, 돈은 전쟁을 통해 이득을 취하기는 하지만 돈이 직접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의 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쩌면) 돈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지 않은 '절대적 가치'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돈을 굴리는 회사는 아주 합리적이고 타당한 근거로 일을 진행하며 이 절대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라 말하고 있다. 샘이 지난 30년간 그랬던 거처럼.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인상적이다. 샘은 죽은 개를 마당에 묻는다. 왜 마지막에 와서 감독은 죽은 개를 땅에 묻게 한 것일까? 샘이 잊어버린 일이기에 모든 위기가 끝난 후 기억을 되살린 것일까? 필자는 이 개의 죽음이 결국 '경제적 살인'을 간접적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한 경제학자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경제적 살인' 역시 살인과 같은 강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돈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돈을 벌기 위해 피 땀 눈물을 흘리며 돈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즉, 돈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존이 결론을 쉽게 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적 살인? 어쩌라고.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는데. 이 점이 그가 빠르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다.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고 신경이 나갈 듯한 스트레스를 받아도 자신에게 그런 고통을 준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이유는 살인 이후 가해질 처벌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은 그런 처벌이 두렵지 않다. 그는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할 방법을 생각해냈고 이런 '쇼'를 벌인 것이다.                                                                                                               


그러면 죽은 개는 이런 쇼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상징할까? 아니, 그건 너무 추상적이다. 필자는 이 죽은 개에 2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오랜 시간 돈의 노예가 되어 양심을 팔아먹는 샘, 두 번째는 돈에 의해 희생될 예정인 에릭과 사라다. 샘은 30년을 회사에서 버텼다. 그래, 버텨왔다. 작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회사가 어려울 때 가장 먼저 해고당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라고. 그가 이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겉으로는 양심적이고 선량한, 그리고 믿음직한 베테랑 역할을 해주지만 실상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애초에 그에게 부하 직원들을 위해 화를 낼 양심 따위는 없었다. 그는 잠깐 화를 냈던 거뿐이고 이후 회장의 말을 핑계 삼아 쉽게 누그러뜨린 것이다. 죽은 개는 그의 양심을 의미한다. 돈 앞에서, 회사 앞에서 사라져야할 인간성을. 에릭과 사라는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가장 불쌍한 인물들이다. 왜 마지막에 에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당 막대한 돈을 받고 회사에 돌아온 것일까? 그건 이 사태를 벌인 책임을 져야 될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장은 그 인물로 사라와 에릭을 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리스크 관리 부서이니까. 그러면 그들은 왜 이런 총알받이 역할에 응한 걸까? 그건 돈이다. 그래, 결국 문제는 돈이다. 막대한 돈이 걸려있기에 그들은 회장의 제안에 응한다. 개는 이 자본에 죽어버린 이들을 의미한다고 본다.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자본의 힘에 의해 죽어버린 개인의 양심, 그리고 그 양심은 땅에 묻어야만 티가 나지 않는 그런 존재랄까.


법의 가장 큰 약점은 자본에 의한 살인에 유독 인자하다는 점이다. 법은 있는 사람들의 방패이다.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만 당선되는 순간 그들은 사회의 상류층에 자리 잡으며 부와 권력을 누린다. 세계는 조금 더 자본의 살인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돈을 가지고 장난치며 1%를 위해 99%를 희생시키는 구조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세계는 양극화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양심이란 단어는 땅에 파묻힌 채 자본의 희생양들을 끌어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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