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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세상

<아이 캔 스피크>, <범죄도시> 外

97년 작 프랑스 영화 <나의 장미빛 인생>은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 루도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곱 살 소년의 성정체성 고민에 대해 귀엽게 받아줄 만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대를 표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워 루도빅을 왕따시키고 루도빅이 바뀌지 않자 루도빅 아버지를 해고한다. 심지어 루도빅의 어머니는 화가 나서 어머니가 앞장서서 아들을 괴롭히고 타박하는 지경에 이른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마을의 공동체는 항상 화목하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오히려 강력한 공동체는 그 내부의 규칙과 형태를 강요하고 이를 지키지 못할 시 강한 엄벌을 내리려 든다. 소년 루도빅은 남자아이가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이유 하나로 불온한 아이로 찍혔고 폭력을 당했다. 


이런 착각은 직업이 분화되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한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사회는 오히려 특정 직업들의 가치를 중시하며 끊임없이 계층을 분열시키고 나누며 급에 따라 가치를 부여한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고 노인과 젊은이를 나누고 전국 팔도를 나눠 가치를 책정한다.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펼친 대한민국은 그 속에 가려진 사회통합 비용을 무시해 왔다. 넷상에는 자신과 다른 집단을 헐뜯는 신조어가 넘쳐나며 이 집단 속에 숨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런 폭력에 의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가장 약한 사람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도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위안부 피해자였으나 가까운 가족의 부끄러움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위안부 재판에서 연설을 할 친구 정심이 혹시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위안부’가 등장하는 건 중반에 들어서이다. 그 이전까지 영화는 민원인 도깨비 할머니 옥분과 9급 공무원 민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왜 감독은 9급 공무원과 민원인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걸까? 옥분은 이웃들과의 분쟁을 만들면서까지 민원을 넣는다. 이 민원은 단순한 심통이나 보상금을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민원 하나하나가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안부라는 비극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 전에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의 비극이 발생한 원인, 그 원인은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켜주지 않고 괴롭히고 핍박하던 시대. 법은 있지만 그 법을 지키지 않던 시대. 그렇다면 당시 조선은 왜 약했을까. 조선은 법을 지키지 않았다. 매관매직을 일삼고 수탈을 강행했으며 외세를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 불리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죽어나는 건 백성들이었다. 법에는 ‘예외’가 있으면 안 된다. 예외를 둔 순간 아무도 법을 지키려 들지 않는다. 질서는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는 방패다. 옥분은 그 방패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민원을 넣는다.


그녀가 넣은 민원의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식당 여주인이 출구를 짐으로 막아둔 일. 만약 불이라도 나면 이 짐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질서를 지키지 않은 누군가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이다. 나라의 법도를 지키지 않은 고위층들 때문에 위안부가 되어버린 조선의 소녀들처럼. 민재는 겉으로는 철저한 ‘척’하는 공무원이지만 뒤로는 더러운 술수를 부린다. 그는 전형적인 엘리트다. 집안은 가난하지만 머리는 똑똑하고 이성적이다. 그런데 이 좋은 머리와 감정을 ‘민원인’이 아닌 ‘고위 공무원’들을 위해 쓴다. 지난 9년의 보수정권 동안 정부기관의 공무원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온갖 부정에 동참해왔다.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야 될 이들이 말이다. 예외는 항상 특권계층을 향한다. 사회의 진정한 질서란 모두에게 동등하게 실행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모두에게 동등한 질서’를 강조한 작품이 <범죄도시>가 아닌가 싶다. 왕건이파와 흑사파 사건을 모티프로 만든 이 작품 속 조선족들은 비록 거칠지만 자신들만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질서를 뭉개버리는 이가 장첸이다. 그는 조직들을 하나씩 통합하며 세력을 넓히고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다. 상인들을 착취하는 건 물론 여자들에게도 손을 댄다. 이런 장첸의 만행에 조선족 사회는 눈을 감는다. 어차피 조폭들은 수금을 해왔고 괜히 찍히는 짓을 해봐야 피만 볼 뿐이라 여긴다. 이때 영화는 소년의 입을 빌려 ‘공동체’를 강조한다. 그들 사회는 온갖 불법과 어둠이 깔려있지만 어찌되었건 유지되어 왔다. 경찰의 통제 하에 조폭들은 다툼을 최소화했고 힘에서 밀려난 이들의 생존권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질서를 유지하고 만든 이가 마석도를 비롯한 강력반 형사들이다. 조선족들은 대한민국과 다른 환경인 중국에서 살아왔다. 그들만의 법칙과 규칙이 있기에 오히려 대한민국 법을 지키지 않는 그들에게 가해지는 철퇴를 차별이라 여긴다. 마석도는 그들의 법칙과 규칙 내에서 깨지지 않는 공동체를 만드는 이다. 코믹해 보이는 수사에 조폭 동원과 진실의 방 역시나 조선족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법과 질서만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집단은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 때 하나로 뭉친다. 학연, 지연, 혈연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단 하나의 ‘구심점’이라도 있어야 단체는 조직력을 가질 수 있다.

                                                                                                            


<대장 김창수>는 대한민국이 가장 처절하게 무너졌을 때, 가장 처절한 공간인 감옥 안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뭉치나를 보여준다. 이들의 구심점은 ‘글’이다. 글에는 큰 힘이 있다. 그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그러니까 사랑, 아픔, 감동, 슬픔 등이 담겨 있다.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Here's looking at you, kid.’는 서양인들의 가슴에는 로맨틱한 사랑을 쏘아줄 수 있지만 변역을 한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를’은 보는 이에 따라서는 오글거리게 느껴질 것이다. 젊은 시절 김구 선생인 김창수는 감옥 안 사람들에게 글자를 가르친다. ‘모국어’를 배운 조선인들은 하나 됨을 느낀다. 나라를 잃은 그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구심점이 마련된 것이다. 이 구심점은 심지어 일제의 편에 선 이들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일본이 20년대 문화통치를 표방한 민족 분열 통치를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로 뭉친 집단은 그 어떤 권력보다 강하고 독하다.


통합에서 중요한 건 희생의 의미를 내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통합을 빌미로 희생을 강요해왔다. 그리고 이 희생은 항상 ‘예외’를 두어 높은 계층에게는 혜택을, 낮은 계층에게는 고통만을 주었다. 진정한 통합은 법과 질서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구심점을 통해 유대감을 키울 때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 ‘이해’다. 약자에 대한 보호를, 서로를 위해야 한다는 유대감을 이해할 수 있을 때야 함께 사는 세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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