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언론, 마! 고마해!!

영화를 통해 알아보는 한국 언론의 문제

<내부자들>에서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는 이런 말을 한다.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들 입니다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놀랍게도 이 말은 영화 속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이 대놓고 국민은 개 돼지라는 발언을 하였으니 말이다. 고사성어 중에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든다는 말로 거짓된 말도 여러번 반복하면 진실처럼 여겨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론이 국민을 '개돼지'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치 앵무새처럼 모든 신문이 같은 말을 지껄인다. 그러면 국민들은 그 말이 사실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 사람만 뭉쳐도 호랑이가 만들어지는데 수 십 개의 언론사가 동시에 그리 말하면 누가 안 믿겠는가? 언론의 수가 늘어난 만큼 더 많은 언론들이 말을 맞추면 국민들은 놀아날 수밖에 없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민주주의 정신과 참혹함을 알린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 이 영화의 외국인 기자 피터는 5.18의 참상을 외국에 알렸던 기자다.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안정을 위해 전두환의 군대 투입을 눈감아 주었고 광주에서의 무차별적인 학살은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문으로 가려졌다. 이때 피터는 광주에서 전두환의 만행을 찍었고 이를 외국에서 방송, 대한민국의 실상을 외국에 알리는데 노력한다. 하지만 당시 한국 언론들은 정부가 써주는 말을 받아적기에 바빴다. 그들은 광주에 군이 투입된 이유가 빨갱이 때문이라며 광주 사람들을 폭도, 간첩으로 몰았다. 그들에게는 취재할 용기는 없었지만 받아적을 힘은 있었다. 거짓을 알릴 입은 있었지만 양심은 가지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한국 언론이었다. 그리고 이런 만행은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력 대선 후보와 재벌, 그리고 유명 논설주간. 이들은 한대 뭉쳐 대한민국을 집어삼킬 '판'을 짠다. 이들의 비리에 이용당했던 정치깡패 안상구를 복수를 기획한다. 하지만 그의 복수는 쉽지가 않다. 자신이 아무리 말을 해봐야 '언론'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 증거들만 가져다 보도하는 것이다. 즉, 논점을 피해가는 이야기를 생산해내 오히려 고발자에 대한 신빙성을 약화, 일을 무마시키려는 것이다. 대중이 '개 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서다. 언론은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눈과 귀를 가려버리니 국민들은 장님이나 다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그들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블릿 PC가 보도되기 며칠 전을 생각해 보라. 박근혜는 갑자기 개헌 이야기를 꺼냈고 뉴스는 개헌으로 도배되었다. 완벽하게 논점을 빗나간 것과 동시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마치 엄청 중요한 일인 거처럼 포장된 것이다. 그 전 이슈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한국 언론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받아적기만 하며, 두 번째는 확인을 하지 않으며, 세 번째는 뼈대가 없다는 것이다. 이 확인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영화가 <특종: 량첸살인기>이다. 이 작품에서 기자 무혁은 이혼과 해고 위기에 몰리고 제보 전화를 받은 곳에서 살인마가 쓴 것으로 보이는 문구와 살인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그는 이 기사를 내고 스타덤에 오르나 알고 보니 문구는 소설 <량첸살인기>의 구절들이요, 살인 흔적이라 여겼던 건 연극 소품들이었던 것이다. 외국인 여자의 신고만 받고 무턱대고 기자를 낸 무혁의 가장 큰 실수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자는 조사만 하는 직업이 아니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기사를 내야만 한다. 헌데 한국 언론은 받아쓰는데 익숙한 재생산 기사들을 우후죽순 만들어내다 보니 확인하는 작업이 없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빅뱅 멤버 탑과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전화를 하고 확인을 해야 하는데 한 곳에서 '생명위독'이라고 기사가 나오니까 비슷한 식의 기사들이 등장하였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기자들이 정확히 알아보는 기사보다 더 빠르고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 클릭수를 높이기 위한 경쟁을 하니 생기는 문제점이다. 문제는 이런 확인을 하지 않는 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 <피노키오>에서 신입기자 달포는 CCTV 화면을 입수, 섣불리 판단하고 기사를 낸다. 무리한 다이어트로 목숨을 잃은 여성. 하지만 그녀는 딸의 수술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외형을 가꾸기 위해 죽은 여성으로 그녀는 매도되었고 딸은 눈물을 흘렸다. 

받아쓰기를 하는 언론의 문제는 한쪽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는 것이다. 언론은 전달자의 역할이다. 말을 전달할 때 그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은 없다. 전달자의 '의견'과 '입장'이라는 것이 말에 담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언론은 사실을 확인해야만 한다.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정확하게 전달하고 의견과 입장을 그 사실에 맞게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문제는 마구잡이로 받아적고 사실확인을 안 하다보니 기사에 '뼈대'가 없다. 이 뼈대란 것이 무엇이냐. 바로 한 신문사가 취하는 기본 입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사가 기획취재로 청년들의 취업난과 아르바이트 생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기사를 냈다. 그런데 최저시급에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업주들의 목소리를 다음에 기사로 내고, 그 다음에 최저시급이 올라가면 발생할 부정적인 입장에 대한 기사를 내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난 최저시급을 꼭 올려야 된다고 생각해' 라고 말했던 친구가 다음 날 '최저시급을 올리면 기업들이 죽어난다네. 그래서 올리면 안 된다고 다들 그러더라' 라고 말하는 꼴이다.

신문사는 하나의 입장을 취할 때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확인이 필요하고 이후 입장을 취해야 한다. 최저시급을 올려야 한다는 기사를 냈으면 그와 관련된 입장을 쭉 취해야 하는 것이 신문사이다. 그런데 내용을 받아 적기만 하다 보니 이런 입장이라는 것이 없다. 친한 친구가 다음 날 '병신아!' 라고 말하면서 '쟤가 너보고 병신이래. 그래서 너한테 병신이라고 한 거야' 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어이가 없을 것이다. 난 이런 언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제보자>라고 생각한다. 황우석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앞서 말한 언론의 세 가지 문제점을 모두 보여준다. 먼저 당시 언론은 황우석의 줄기세포가 가진 의미에만 집중, 황우석 박사가 발표한 내용만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기사를 만들어냈다. 즉, 연구발표를 받아적기만 하였고 그가 한 말을 받아 적어 장밋빛 미래를 그려내는데 급급했다. 그리고 이 연구에 대한 사실확인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태세를 전환한다. 황우석 까기에 돌입한 것이다. 아니, 그럴거면 적어도 자신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사과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언론은 사과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당시 세월호 가족들을 돈을 밝히는 족속으로 몰아간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5.18에 대해 간첩이고 빨갱이로 몰아간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 마치 족보 없는 잡놈처럼 뼈대가 없기에 자기가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고 어떤 기사를 냈는지 무시한다. 당시 PD수첩 기자들은 국민들과 싸웠다. 그들이 밝히려는 진실을 국민들이 막았다. 그리고 그런 국민들을 만든 건 기자들이다. 하지만 기자들은 한발 빼고 뒤에 서서 이 현상마저 기사를 써낸다. 마치 국민들이 이 모든 일의 책임자인 거처럼 말이다.

윤고은 작가의 <무중력 증후군> 속 기자 퓰리처는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병을 만들어 낸다. 기자들은 마치 '유행'이 아닌 것이 '유행'인 거처럼 만들고 사람들이 그 거짓 속에 파묻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신들이 성공하기 때문이다. 최근 조국 민정수석 논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국민들은 청문회 과정에서 야당을 욕하지 정권을 욕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새누리당 시절 '국가안보'와 '골든타임'을 들먹이며 자격 미달의 인사들을 강제로 청문회 통과시켰으며 이후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랬던 그들이 탄핵 후 국정협조가 필요한 정권에게는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정권 구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런데 마치 언론은 국민들이 인사청문회에서 발견된 후보들의 흠집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조국 민정수석이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질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자기들 마음대로 프레임을 짜고 그 프레임을 많은 국민들이 원하는 거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난 이런 선동과 날조를 밥 먹듯이 일삼는 대한민국 기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마! 고마해! 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주고 싶다. 바로 <굿나잇 앤 굿럭>이다. 이 작품은 1953년,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내 공산당원이 있다고 말한 사건에 맞서 싸운 에드워드 머로 뉴스 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이 당시 미국은 냉전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만약 누군가 그의 눈에 거슬러 빨갱이로 몰린다면 끝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드 머로의 뉴스팀은 그에게 대항한다. 매카시가 만든 레드 혐오증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언론들이 박근혜 정권에 적극 가담, 정권에 반대하는 이를 빨갱이로 몰아간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약 60년 전 미국의 언론이 현재의 대한민국 언론보다 더 성숙한 자세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난 언론에게 세 가지를 지켜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첫 번째는 받아쓰지 말라는 것이다. 받아쓰기는 초등학생 때 끝내야 하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쓰는 것이지 넙죽 받아서 적지 않는다. 두 번째는 기사내용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펜은 칼보다 강한 무기다. 내가 쓰는 글 하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도 예전에 인터넷에서 줏어 들은 이야기로 글을 쓴 적이 있었고 그랬다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으로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알고 있다. 세 번째는 자신이 기자라면 기사에 뼈대를 만들라는 것이다. 기사 하나하나가 당신의 생각이고 역사고 이를 뛰어넘어 몸담고 있는 신문사의 방향이 된다.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뼈대는 금방 무너지기 마련이다. 기자란 직업은 신뢰가 생명이고 그 신뢰는 당신이 추구하는 방향에 있다. 그 점을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랜드 오브 마인> - ‘복수’는 ‘정의’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