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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오브 마인> - ‘복수’는 ‘정의’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백미라면 단연 트로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트로이군과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는 신들마저 참전시킬 만큼 흥미로웠다. 이 전투에서 돋보였던 두 장군은 트로이군의 헥토르, 연합군의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포로 문제로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다투고 전투에 참전하지 않는다. 연합군이 밀리자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감옷을 입고 전투에 나섰다 헥토르의 손에 죽고 만다. 친구의 죽음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서 헥토르를 죽인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잔인하게 훼손하려고 든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아킬레우스의 행동에 비판을 가한다. 그는 도시국가가 요구하는 영웅은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한 덕을 가진 인물이라고 보았다. 즉, 그의 입장에서 상대에게 복수를 가한 아킬레우스는 옳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플라톤의 변론 편에서 자신을 아킬레우스에 비유한다. 철학 활동으로 인해 죽을 위험에 처한 것이 결코 수치스럽지 않다고 하며 아킬레우스가 단명하더라도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갚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은 선택의 경우와 같은 입장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국가 편에서 아킬레우스의 과한 슬픔과 분노를 비판했으나 그의 ‘복수’ 자체에는 칼날을 겨누지 않는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운 문제다. <랜드 오브 마인>은 단순하다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복수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 덴마크 군인 칼은 덴마크 국기를 들고 가던 독일군 포로를 때린다. 피범벅이 될 정도로 폭력을 휘두르는 칼의 눈에는 침략의 아픔과 고통이 서려있다. 그는 그 아픔을 눈에 보이는 포로에게 모두 풀어버린다. 2차 대전 당시 덴마크는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그 고통은 패전국인 독일군 포로들에게 향한다. 덴마크 군대는 독일군이 설치하고 간 엄청난 양의 지뢰를 제거하는데 독일군 포로들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 작전에 동원된 병사들 중 상당수는 어린 소년병들이다.


칼은 이들을 담당하게 된다. 그에게 독일인은 분노와 멸시의 대상이다. 칼은 예상했던 대로 강하고, 아프게 그들을 압박한다. 하지만 칼은 인간이다. 직접 살을 맞대고 지내는 대상에게, 어린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 모습에 싸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그는 지뢰 사고로 쌍둥이 중 한 명이 팔이 잘리자 갈등한다. 밖에서 아이들은 그를 부르고 다친 아이는 ‘엄마’를 외치며 ‘집에 가고 싶다’고 울먹인다. 카메라가 비추는 칼의 뒷모습은 기나긴 갈등을 끈질기게 잡아내며 결국 그를 밖으로 내보낸다. 앞서 칼은 몸이 안 좋다는 아이를 지뢰밭에 내보냈다. 그 아이가 사고를 당했고 이에 책임감을 느꼈는지 왜 몸 상태가 안 좋았는지를 알아본다. 알고 보니 아이들 중 몇 명이 민가에서 식량을 먹었고 그게 이상을 일으켰던 것. 그는 장애가 있는 딸을 기르는 여자에게 그 식량에 대해 묻자 그녀는 이리 답한다. ‘어차피 잘 되었죠. 독일인들이 고통을 겪었다는데.’


친하지 않은 사람들, 날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만 있어도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 그런데 상대 국가를 짓밟고 살상한 국가의 군인들이 패전 후 그 나라의 한 가운데에 있다. 아이들이 겪는 심적 고통은 엄청나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신체적 고통이다. ‘독일인에게 줄 식량은 없다’며 칼과 그의 개가 먹을 만한 식량만 배급해주는 것이다. 이에 칼은 아이들의 식량을 구해온다. 그는 지뢰가 터져 죽는 아이들에게 동정을 느끼고 덴마크 군인들에게 신체적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을 도와준다. 그리고 점점 아이들과 정이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구도를 비꼰다. 분명 역사적으로 나쁜 놈들은 나치다. 그들은 전 유럽을 침략했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잔인한 생체실험도 자행했다. 그런 그들에게 덴마크 군은 ‘합당한’ 복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들이 너무나 잔악해 보이는 거지?


다시 트로이 전쟁을 이야기해 보자. 이 전쟁의 원인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있다. 즉, 나쁜 놈들은 트로이다. 헌데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에게 감정이 이입된다. 또 그에게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의 복수는 합당한 행동이지만 그 잔혹함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플라톤은 국가론의 첫머리에 “원시적 정의론”을 소개하는데 ‘동지들에게는 선을, 적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 정의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반박한다. 정의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해야 한다. 그의 입장에서 독일군에게 같은 보복을 가한 덴마크군은, 친구의 죽음에 잔혹한 복수를 한 아킬레우스는 정의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아킬레우스의 복수를 예로 든 것. 이처럼 인간에게 ‘복수’란 참으로 정의(定義) 내리기 힘든 정의(正義)라 할 수 있다.


<랜드 오브 마인>은 논문 한 편은 나올 법한 주제를 ‘지뢰’와 ‘소년병’을 통해 쉽게 이야기한다. 지뢰를 통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포의 긴장감을, 소년병을 통해 감정적인 동화와 아픔을 만드는 영화적인 재미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가해자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가하는 복수는 쾌감을 준다. 허나 이들이 행하는 복수에는 과연 정의란 게 존재하는가? 아니라면 정의란 대체 무엇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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