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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보> - 틀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가에게 맞서 싸웠고, 자신들의 살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단체를 결성했다. 한 마디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좌파성향의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냉전시대에 돌입하면서 사회주의가 ‘잘못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노동자 편을 들면 ‘이런 사회주의자, 빨갱이, 반미운동을 벌이는 놈!’으로 찍혀 감옥에 갇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달튼 트럼보를 비롯한 헐리웃 작가들은 비상사태에 빠진다. 그들이 가입하고 활동했던 단체가 반미단체, 사회주의 단체로 낙인찍히며 조사를 받게 생긴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유명한 샘 우드 감독은 물론 서부극의 명배우 존 웨인, 여배우 헤다 호퍼 등은 헐리웃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은 반미특위를 구성하며 블랙리스트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표’를 노린 정치인들은 이 행위에 적극 동참한다. 트럼보를 비롯한 작가들이 국회 청문회 자리까지 서게 된 것. ‘몰랐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면 혹 모르겠건만 트럼보와 동료들은 신념을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그들은 이 코메디 같은 상황에 전면으로 반기를 들고 예상했던 대로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트럼보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헐리웃에서는 그가 각본을 쓴 작품으로 영화 상영을 하지 못하게 된 것. 한 마디로 작가로써의 삶이 끝났다고 보면 된다.


대한민국 9년의 독재정권의 블랙리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블랙리스트 그거 뭐? 마음에 안 들면 안 쓰는 거지. 국가가 꼭 모든 예술인을 지원해줘야 하나? 돈 없으면 하고 싶은 거 못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님?’ 못 배운 소리다. 블랙리스트의 문제는 그 사람의 생업 자체를 막는다는데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라. 소련의 강압적인 통치에 찬성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소련에 굴복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지, 가장 낮은 삶을 택하던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유리닦이가 된다. 신념을 포기하지 못해 가장 낮은 삶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트럼보는 그럴 수 없다. 그의 몸은 병약하다. 거기에 나이도 많다. 글 쓰는 거 빼고는 가족을 먹여 살릴 기술도 없다. 그는 결심한다. ‘뭐라도 쓰자’

B급도 아닌 C급 회사를 향한 트럼보. 그는 가명으로 작품을 쓰겠다고 말한다. ‘형씨 몸값을 우리가 담당 못해요’라는 조폭 제작자 프랭크에게 무명작가들과 비슷한 돈을 받고 일하겠다고 말하는 그. 그날부터 트럼보의 ‘비밀생활’이 시작된다. 그가 작품을 쓴다는 게 들켜서는 안 되기에 모든 가족들이 동원된다. 트럼보는 11개의 가명으로 활동하며 11개의 전화기를 두어 따로 연락을 한다. 만약 ‘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으면 그의 정체가 들통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까지 오바하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스파이 브릿지>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자. 이 작품에서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은 간첩의 변호를 맡았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는다. 당시 미국은 2010년대 대한민국처럼 일베와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사는 노인들의 사고와 같은 ‘광풍’이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트럼보에게도 이런 위협은 출소 후에도 여전했다. 극장에서 공산주의자로 찍힌 그의 얼굴을 본 남자라 콜라를 부은 거처럼 이사한 그의 집 수영장에 쓰레기를 투척하고 벽에 욕설과 협박을 적어둔다. 


트럼보가 이름을 숨겼다고 원하는 작품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철저한 ‘을’이기에 제작자의 요구에 맞춰 작품을 쓴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후지게 바꿔야 하는 고달픈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스트레스가 쌓이고 업무가 많아 시간이 부족하다. 마찰은 가족들을 향한다. 가족들은 트럼보의 재기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돕지만 그에게는 가족을 위해 소비할 시간마저 없다. 딸의 생일 날, 트럼보는 욕조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그 모습에 딸을 비롯한 가족들은 슬픔과 야속함을 느낀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트럼보가 감옥에 가기 전, 팔아넘겼던 작품 <로마의 휴일>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다. 트럼보 대신 수상한 친구는 그에게 트로피를 넘기고 트럼보는 희망을 보게 된다. 비록 수상이 그의 이름으로 되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재능’임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크나큰 ‘실수’를 하고 만다. 너무 뛰어난 작품을 써 버린 것. C급 전문 프랭크는 고민 끝에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가명’의 트럼보는 <브레이브 원>으로 다시 한 번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친 반공운동에 염증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의 태도에 반감을 드러냈다. 트럼보가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점점 그의 정체는 수면으로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작 <스파르타쿠스>의 각본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트럼보의 정체를 눈치 챈 반공 영화인들은 커크 더글라스를 비롯한 <스파르타쿠스> 제작진들을 압박한다. <1987> 개봉 당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 평론가 평이 높은 게 80년대 세대들의 향수 팔이 때문 아니야? 솔직히 운동권 지식인들 너무 교만해. 자기들이 뭐 대단한 일 한 거 마냥 굴잖아. 한국 정치가 잘 돌아가지 않는 건 저놈들 때문인데 무슨 민주화 운동이 대단한 거 마냥 추켜세워 주니까 자기들이 뭐라도 된 줄 알아’


‘정신’이라는 가치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마치 종교처럼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트럼보도 그렇다. 그에게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저 고개 한 번숙이고 몰랐다 용서를 구하고 동료들을 팔아넘겼다면 엄청난 부와 명성을 누렸을지 모른다. 정신적인 비참함이 물질적인 비참함보다 좋지 않겠는가. 허나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아둘 게 있다. 시대는 변한다. 지구의 자정작용처럼 잘못된 정신은 사라지고 올바른 정신만이 남게 시대는 움직인다. 정신은 시대를 넘나드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 번 이룬 민주주의에 대해 이것의 가치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정신을 지키는데 소홀했다. 결과는 9년의 부패한 독재정권의 탄생이었다. 한 번이라도 이겨본 사람은 그 승리를 다시 쟁취할 수 있지만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사람은 쉽게 패배의식에 깃들기 마련이다. 80년대 국민들은 한 번 승리를 쟁취했기에 다시 한 번 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트럼보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가지 위해 애쓴 인물이라고 본다. 첫 번째는 정신, 두 번째는 물질이다. 그는 가족 역시 포기할 수 없었기에 저질스러운 작품을 쓰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명예를 위해 물질을 포기하고 가족에게도 명예로운 ‘희생’을 감내하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의 선택에 그리 큰 감명을 받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개개인의 삶과 역할이 있다. 자신의 삶의 욕심을 위해 다른 이의 삶을 포기하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또 개인 삶의 욕심을 위해 본인이 맡은 역할을 포기하는 일조차 그리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트럼보는 개인이 가진 신념을 지키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신념과 역할, 두 가지를 다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틀릴 수 있는 권리’였다. 한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는 이 ‘틀릴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데 있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 교육은 최대한 ‘오답을 줄이는’ 교육이지 ‘왜 틀렸는지’ 알려주는 교육이 아니다. 학교 교육을 보면 선생들은 잘 하는 학생들 위주로 수업을 할 뿐, 못하는 학생에게 왜 네가 이걸 못하는지, 왜 틀렸는지 굳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들지 않는다. 틀렸을 때 필요한 건 이해와 관용이지 매장과 조롱이 아니다. 6.25 전쟁 당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쌀을 준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단체를 향했다가 학살을 당했다. 때론 무지가 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권력이 앞장 서 국민을 억압하고 탄압해서는 안 된다. 국민은 누구나 틀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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