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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미투 운동’

장면 1. <한공주>는 밀양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공주는 ‘내가 피해자인데 왜 내가 도망쳐야 하죠?’라고 말하나 전학 간 학교까지 찾아온 가해자 부모들에 의해 공주는 다시 도망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형사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공주에게 ‘밀양 망신은 네가 다 시킨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놀랍게도 이 대사는 실제로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했던 말이다.


장면 2.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 옥분은 위안부 피해자이다. 그녀는 위안부 재판을 앞두고 어머니 무덤을 방문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이 상처를 감추고 살았던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었음을 말한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라는 그녀의 질문에는 깊은 원망과 슬픔, 그리고 고통이 담겨 있다. 옥분은 반 백 년이 넘게 지난 후에야 그 아픔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부모와 시대의 영향으로 누나를 피했던 동생과 다시 만나게 된다.


장면 3. 일본의 연예인이자 AV 배우였던 이지마 아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플라토닉 섹스>에서 주인공 카도쿠라 아오이는 알고 지내던 남자 친구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강간당하고 돌아온 그녀를 향한 부모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아버지는 ‘쪽팔린다.’며 화를 낸다. 결국 그녀는 집을 나가고 AV배우가 되고 만다. 일본에서는 한 해 많은 여성들이 사기나 협박, 회유에 넘어가 AV배우가 된다. 하지만 그녀들의 양심고백에 돌아오는 건 ‘너도 이걸로 돈 벌고 즐겼잖아? 어디서 깨끗한 척이야?’ ‘활동 당시 인터뷰 보니 즐기는 거 같던데 이제 와서 발 빼네?’ 등등 부정적인 반응뿐이다. 예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호시노 아스카 등의 AV여배우들이 자신들의 강압적인 데뷔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 사회 각 분야를 휩쓸고 있는 미투 운동, 경악에 빠진 사람들


조민기, 조재현. 이 두 사람은 딸과 함께한 예능 <아빠를 부탁해>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딸을 사랑하고 위해주는 따뜻하고 듬직한 아버지로 비춰졌는데 이런 그들이 딸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을 희롱, 추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성들뿐만이 아닌 전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검찰에서 불었던 ‘미투 운동’은 문학계는 물론 이후 연극계, 연예계를 지나 의학계에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쑤시는 대로 박박 나오고 있는 게 실정이다. 특히 고은 시인의 경우 노벨문학상 수상 기간 때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한국 문학계에 있어 큰 업적을 남긴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권력’을 여성들을 성적으로 괴롭히는데 사용했다. 문학계에서는 친일행적을 보인 미당 서정주 선생까지 들먹이면서 ‘고은 선생의 작품은 작품대로 인정해야 된다.’라고 말하지만 여태껏 이런 ‘업적’을 이유로 잘못을 축소시키려는 행태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고 그것을 내버려 둔 순간 또 다른 업적이 만들어준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등장하는 걸 지켜보아 왔다.


‘미투 운동’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내가 성적으로 모욕과 멸시, 고통과 아픔을 당한 사실이 있다면 당당하게 밝혀라. 당신들은 피해자다. 그리고 그늘 속에 살아야 되는 건 당신이 아닌 가해자다. 그러기에 미투 운동에는 정도가 없다. ‘이쯤 했으니 그만 봐주자. 이러다 작가들 씨가 마르겠다’라는 말 따위는 변명처럼 들린다. 미투 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아래서부터 시작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이전 운동들의 경우 권력층이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래서 권력층이 ‘여기까지’라고 자기들이 알아서 ‘셀프 개혁’의 움직임을 멈추면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헌데 미투 운동은 아니다. 특히 문화계의 경우 미투 운동의 영향이 상당하다.


여성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겠지만 문화소비시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문학, 연극, 뮤지컬, 영화 등등 여성 소비층의 입김이 상당하기에 미투 운동을 통해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을 ‘쌩까고’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몇몇 분들은 약간의 의아함이 들지도 모른다. 장자연 사건 당시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성적으로 피해를 본 문제는 쉽게 꺼내기 힘든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강용석 전 국회의원이 말한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줘야한다.’는 말처럼 문화계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성상납이나 성적 모욕을 당하는 건 은연중에 당연한 일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변하였다. 필자는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 알게 모르게 점점 성장해 온 여성인권


학창시절 비디오 가게를 종종 털었다. 필자가 중고등학생 때가 딱 비디오 가게가 망해가던 시점이었고 그런 가게들 앞에는 비디오가 수북이 쌓여져 있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작품을 검색해 볼 수 없었고 제목만 보고 ‘이거 재미있어 보인다.’ 하면 집어오곤 했다. 그때 가져왔던 작품 중 하나가 <은마는 오지 않는다>라는 영화다. 제목만 보고 서부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화는 6.25가 한창이던 때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례라는 여성은 유엔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마을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한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이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건 사회적인 시선의 영향이 크다. 동정과 연민 대신 돌아오는 건 조롱과 멸시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욕 중에 화냥년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성들을 비하하고 욕하는 단어다.


나라가 힘이 없어 끌려간 백성을 동정하고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욕하고 차별했던 것이다. 이는 위안부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위안부는 부끄러운 존재로 여겨졌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떳떳하게 세상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90년대, 2000년대 초까지 변하지 않았다. 판사들이 강간당한 여성과 강간한 남성을 혼인시켜 주는 건 물론 남자 연예인들 중 여성 연예인을 납치해 강제로 결혼에 성공한 걸 자랑처럼 토크쇼에서 떠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과거 <러브 스토리>라는 방송에서는 한 군인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 자기 집으로 납치하고 탈영한 걸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방송에 내보낸 적도 있다. 지금 이런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에는 많은 저항과 항의가 있어 왔다. 경찰이 성폭행 피해자와 피의자를 같은 차에 태우고 이송하는 걸 바꾸었으며 여성이 성범죄에 대해 증언을 여러 번 하는 건 물론 피해를 재연하는 수치심이 느껴지는 조사 방법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은 변화를 아는 민족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 변화의 노력과 흐름이 결국 적극적인 미투 운동까지 번지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의 국정농단 사건을 보도하며 ‘미개하다’는 스탠스를 취했다. 일본의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들은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를 향유하는 국민들은 이를 즐기고 마음으로 느끼지만 할 뿐 변화의 의식까지 가지 못한다. 반면 대한민국은 변할 줄 안다. 부당한 걸 부당하다 말할 줄 알고 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뭉칠 줄 안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국민들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 뽑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변화를 촉구했고 뭉칠 수 있었기에 미투 운동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 좋거나 싫거나 결국 페미니즘이 힘이 되다


미투 운동의 용기 있는 폭로는 결국 여성들의 ‘집단 연대’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은 힘이 부족하지만 집단이 뭉치면 강력한 힘이 된다. 피해자들은 이 집단의 힘과 보호를 믿고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집단, 같은 여성의 동질감과 동정심을 가진 집단을 만든 건 페미니즘이다.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그 방향성이 남성에 대한 혐오, 여성의 권리를 넘어 특권 추구로 향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한남이라는 단어와 요절한 남자 연예인들에 대한 조롱, 뷔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남성에 대한 책임감 부과, 여성의 의무 축소를 주장하는 태도에 같은 여성에게서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 페미니즘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 또는 지나친 뷔페미니즘이다 라는 소리를 들을 즈음 미투 운동이 퍼져나갔다. 


한 번 뭉친 집단의 힘은 강력하다. 여기에 확실한 방향성과 동력을 잃었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이들은 미투 운동을 통해 존재가치와 동력을 다시 얻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의 경우 페미니즘으로 뭉친 여성들의 적극적인 응원에 힘입어 진실을 폭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확실히 장자연 사건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물론 장자연 사건 당시 가해자들이 강력한 권력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사건의 경우 사회적인 파급력에 비해 이후 대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면 이번 미투 운동의 경우 문화계 전반의 성추행과 성폭행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처벌 의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변화를 같은 여성들의 연대, 그들 중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성폭행 피해 여성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방향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집단이 인정을 받으려면 그 운동은 항상 약자에 대한 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환경단체, 봉사단체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들의 운동이 약자를 향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적어도 보이는 이미지라도 긍정적인 색깔을 지니려면 약자, 그 중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에 대한 적극적인 동정과 함께 싸우자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미투 운동은 페미니즘 운동이 외연적으로 뻗어나가야 될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좋거나 싫거나 결국 페미니즘으로 뭉친 여성들이 미투 운동에 아주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 운동의 활력도 중요하지만....... 무조건적인 피해는 막아야


하지만 모든 운동에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성추행/폭행 등 성문제의 경우 한쪽이 매도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MC였던 주병진은 꽃뱀에게 잘못 걸려 방송활동을 오래 쉬었어야 했고 결국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성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을 방송에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의 경우에도 무고한 피해자를 낼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최근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게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에 대한 성추행 거짓청원이다. 김어준의 경우 여러 공작을 당해왔던 이이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 대처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문제에 어리숙한 사람이라면 모함에 쉽게 걸려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박진성 시인의 경우 시를 배우려는 여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희롱을 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결국 시집 발간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이후 사건은 무죄로 밝혀졌으나 그는 충격에 자살기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억울하게 지하철 치한으로 몰린 남자가 법정까지 가게 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 치한으로 인한 거짓 신고가 너무 잦아 결국 법을 바꾸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투 운동이 가진 양날의 검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추행/폭행에 대한 문제인식을 개선하는데 성공했다. 사회 각 분야의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헌데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한탕 해먹자’ 또는 ‘관심 좀 받아볼까’라는 이유로 거짓으로 미투 운동을 진행한다면 이런 열풍은 꺼지고 말 것이다.


성적 약자로 여겨졌던 여성이 자신의 성을 이용해 ‘강자’로 포장된다면 좋게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문제를 정치공작으로 엮으려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권력층의 성적 횡포에 대한 저항으로 방향을 잡아야 될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투 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건 자신들의 ‘리더’를 정하지 말라는 점이다. 촛불집회를 생각해 보라. 촛불에는 리더가 없었다. 모든 참여자들 한 명, 한 명이 주인으로 나섰기에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미투 운동도 마찬가지다. 미투 운동을 대표하는 누군가를 자처하는 사람이 이 운동을 변질시킬 확률이 크다. 그리고 그 변질은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것이고 운동은 흐지부지 끝나게 될 지도 모른다.


* 더 많은 ‘미투’가 일어나길 바라며


필자는 이 미투 운동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당하는 차별과 고통에 대해 ‘나도 당했다’고 외치고 변화를 이끌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쓰지만 좋아하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또는 일어나지 않는다)’이다. 누군가 바꿔주길,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하길 바라서는 안 된다. 뉴스에서 툭하면 등장하는 협회나 단체들의 ‘자체 정화 운동’은 항상 실패를 가져왔다. 자신이 소속된 무리의 자체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건 감나무를 바라보며 감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가진 자들은 가진 걸 지키고 누리기 위해 살아가지 자신이 가진 걸 남들에게 베풀고 정당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자신이 권력을 누리는 세상이 아름다운데 그걸 왜 포기하려고 들겠는가.


동시에 앞서 말한 대로 잘못된 미투 운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다섯이 뭉치면 그 중 한 명은 꼭 쓰레기다’라는 어느 게임의 명언처럼 집단이 뭉치면 그 중 몇 명은 집단을 와해시키는 언동을 한다. 그 방향을 따라가게 되면 그 운동은 비판을 받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만다. 미투 운동도 그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김어준 총수를 향한 모함처럼 몇몇 유명인들을 향한 거짓된 모함, 정치적인 이용, 이니셜 등을 대며 관심을 끌려는 관심종자들의 행진이 이어진다면 변화에 대한 기대는 짜증으로 가득한 염증으로 바뀔 것이다. 이번 미투 운동의 성공이 더 많은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끝내겠다.


+ 한 마디 덧붙이자면 미투 운동이 가진 순기능 중 하나는 대학가의 풍경을 바꿔놓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가에 있어 왔던 성추행 문제는 교수들과 연관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들의 경우 점수를 자기 마음대로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절대적인 권력으로 여기고 학생들 위에 군림했죠. 신입생 환영회의 경우도 성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폭력적, 강압적인 문제가 있어 왔는데 이를 교수들이 제대로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서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미투 운동으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 성적인 강압을 행사한 교수들에 대한 저항과 고발이 일어나면서 대학생들이 잘못된 권력에 굴복하는 법이 아닌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게 된 거 같아 기쁩니다. 미투 운동은 더 다양한 분야에서 더 넓게 뻗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참고로 글을 쓴 시점에 비해 하루가 다르게 폭로가 이어져서(이정도로 썩었을 줄이야........) 글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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