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패밀리>, <리틀 포레스트> 外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 스마트폰이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지?’ 필자는 대학교 2학년 때 스마트폰을 처음 샀다. 요즘은 그 이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이 생활이 너무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시대가 좋아질수록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건 너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 정수기, 스마트폰, 비데 등등 있으면 편리하다 여겼던 물품들이 어느새 ‘필수’가 되어버렸다. 웃기게도 많은 게 필요한 세상이 되다 보니 이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가 따른다. 초등학생들의 비싼 가방부터 노인들의 명품 등산복까지 유행을 필수처럼 생각하며 이를 가지지 못하면 느린 게 아닌 덜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본다. 오늘은 ‘이런 것들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를 보여주는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다름’이 결코 ‘틀림’이 아님을 말해보고자 한다.
취업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어,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취업’이라고 말한다. 아니,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그냥 취업하는 거라고요. 돈만 월 얼마면 들어갈 거예요.’라고 답한다. 직장은 더 이상 꿈의 발현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한 일터의 목적이 강해졌다. 헌데 학창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게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듯 취업 역시 목적지가 아니다. 하지만 취업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생각에 가슴에 사표만 품고 살면서 정년퇴직이 성공할 수 있기만을 바라본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요즘 일거리가 넘친다는 일본의 이야기이기에 더 흥미가 간다. 최근 일본은 기성세대들의 은퇴로 인해 일자리가 넘쳐 난다고 한다. 헌데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이렇게 일자리가 넘치는데 왜 일본 사람들은 취업을 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자리 많으니 오라고 하는 걸까? 그 정도로 일거리가 넘쳐나나?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빌미로 강압적인 방식으로 사원들을 착취하는 일본 회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은 파견직, 비정규직 등 나쁜 일거리가 잔뜩 널려있다. 일본 회사에 대해 정이 많고 가족 같다고 하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사원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간섭하며 계급적인 조직문화를 강요한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다카시는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과한 업무에 결국 자살을 택한 일본의 한 기업의 신입사원을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다. 취업 실패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그는 새 회사에서 과한 업무량에도 불구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버틴다. 그러다 지하철역에서 과로로 쓰러져 죽을 뻔한 그를 동창이라는 야마모토가 구해준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다카시의 말에 야마모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답한다. ‘취업을 안 해도 살 수 있어’라는 야마모토의 말에 의문을 품는 다카시. 그리고 직장에서 당한 모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다카시에게 야마모토는 말한다.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치열한 취업전선을 보면 다시 그곳으로 가기가 두려워진다. 만약 일을 그만두었다가 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 때문에 사표를 내지 못한 채 참고 또 참는다. 직장에서 업무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뉴스에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지’라는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자살은 심리적인 종착역에서 이뤄진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기에 극단적으로 목숨을 끊는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건 이와 같다. 마치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그림 때문에 차마 사표를 내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돈보다 미래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그것은 바로 ‘너’라고 말이다. 최근 불고 있는 YOLO 열풍은 이런 생각을 잘 보여준다. 결국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의 행복이다. 평생 열심히 일해 많은 돈을 벌어봤자 스트레스로 건강이 망가지면 제대로 쓸 수도 없다. 다 병원비로 날려버릴 뿐이다. 잘못된 기업문화와 부당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좌절감과 패배의식에 살 바에야 사표를 내고 내 인생을 찾으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현실은 대한민국에서는 힘든 이야기다. 일본의 경우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시급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물가가 워낙 높기 때문에 취업을 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 경력을 위해 인턴 자리에 열을 올리고 비정규직이라도 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물질적인 삶을 포기하고 ‘가난하지만 마음이 편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취업을 포기해도 살 수 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굳이 취업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체육을 못하면 못하는 거고 수학을 못하면 그저 못한다고 할 뿐인데 왜 취업을 못하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여기는 걸까?’ 한국의 다포세대는 이전 세대들이 누렸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취업에 열을 올리지만 하지 못한다. 그런 그들을 쓸모없는 인간이라 규정짓는 건 사회의 구조다. 우리부터가 이런 구조로 인한 편견을 지워야만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라는 말을 편히 내뱉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가 아니어도 살 수 있어,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는 ‘청춘을 너무 아름답게 포장하려 든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도시에서 임용에 실패한 혜원이 고향인 시골 마을로 내려오고 친구 재하, 은숙과 농사를 지으며 음식을 해먹는 모습은 ‘완전 농촌 판타지네. 청춘에 대한 고민이 그렇게 가벼워 보이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 그렇지 않나. 도시에서의 삶이 치열해서 농촌으로 내려왔는데, 농촌은 살만하네?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니 사표 쓰고 시골에 내려와 농사나 지으렴. 마음 편히 사는 게 최고지, 안 그래? 고민 없는 시골로 어서 오세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필자가 바라본 이 영화는 우리가 어디에 뿌리내릴지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아스팔트는 단단하다. 모든 뿌리가 이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자리를 잡을 순 없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식물을 모두 같은 조건에서 재배하지 않는다. 어떤 아이는 물을 많이 줘야 하며 어떤 아이는 그늘진 곳에서 잘 자란다. 그런데 인간은 그 개개인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두 같은 조건이라는 ‘평등’만을 강조하며 성공하라 강요한다. 왜 출발선이 똑같은데 넌 이 모양이냐, 쟤는 벌써 저만큼 앞서 나갔는데 넌 뭐하고 있는 것이냐 하며 말이다. 도시의 땅은 아스팔트이다. 단단하기 짝이 없다. 이 단단함을 뚫고 뿌리내리기 연약한 식물도 있기 마련이다. 민들레 하나가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났다고 모든 민들레가 아스팔트 위에서 피어날 수 없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뿌리가 약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무능한 놈’이라 딱지를 붙이고 말라 죽어가도 경쟁에 도태되었을 뿐이라며 고개를 흔든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스팔트를 뚫지 못한 나약한 종이기에 시골의 부드러운 흙으로 오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본다. 나에게 도시가 맞지 않는다면 시골에서의 삶이 맞을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흙이 내가 잘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일 수 있다 라고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라. 로드리게즈라는 가수는 미국에서 실패한 가수였다. 허나 지구 반대편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그는 국민가수가 되어 있었다. 도시에서의 삶 혹은 자신이 지금 속해 있는 집단에서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자책할 필요 없다. 그저 나라는 사람이 지금 이 환경에 잘 자라나지 못할 뿐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갔다. 그 노력에는 아들이 성공하기 위한 환경을 찾아주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도시에서의 삶이 더 발달된 삶이자 성공한 삶의 형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도시에서의 적응 실패가 무조건적인 실패나 덜떨어진 인간의 증명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의 모든 방향은 나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우유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 유우를 먹어야 건강해질 수 있다며 강제로 우유를 마시는 건 더 큰 탈만 불러올 뿐이다. 나에게 맞는 공간이 도시가 아니라면 떠나면 된다. 도시가 아니어도 살 수 있다. 오히려 나에게 더 잘 맞는 환경에서 나라는 식물이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더 높게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기가 없어도 살 수 있어, <서바이벌 패밀리>
2003년 일어난 북미 대정전에서 영감을 얻은 <서바이벌 패밀리>는 모든 전기가 끊긴 도쿄를 벗어나 생존을 꿈꾸는 한 일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즈키 일가는 전형적인 현대의 가정의 모습이다. 쉬는 날이면 TV에 빠진 아버지 요시유키는 아내 말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아들 켄지는 헤드셋을 끼고 음악에 빠져 산다. 딸 유이는 전형적인 스마트폰 중독자이다. 이 소통이 단절된 가족은 도쿄에 대정전이 일어나자 혼란에 빠진다. 배터리가 말을 듣지 않아 차가 움직이지 않는 건 물론 상수도 관리 시설도 마비가 되어 물마저 공급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기다리면 전기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지만(아무렴 선진국 일본인데 돌아와야 되겠지만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며칠이 지나도록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요시유키는 도쿄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자고 말한다.
이 요시유키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물도 전기도 끊긴 도쿄를 떠나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으로 향해 가족을 지키겠다는 의미, 두 번째는 지방에 사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도쿄를 떠나고 싶다는 의미다. 신기하게도 가족이 바라보는 풍경은 도쿄를 벗어날수록 더 밝아진다. 도쿄에서 그들이 겪는 고난은 첫 번째, 식수의 부족이다. 어머니 미츠에가 엄청난 기지를 발휘해 생수를 확보했지만 마실 물은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도쿄를 벗어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전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도쿄에 생수대란이 일어났음을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 이동수단이다. 무슨 EMP탄을 맞았는지 자동차도, 비행기도 다 작동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넷이서 같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데 이 여행은 고단하기 짝이 없다. 세 번째는 의견 충돌이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이 이끌고 자식들은 따른다. 하지만 대화가 부족한 가족들은 서로에게 가졌던 오해와 편견으로 마음고생을 한다. 전기가 없어 눈앞이 깜깜한데 마음도 깜깜해지는 꼴이다.
그들의 여정이 도쿄를 벗어나면 날수록 ‘제대로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가 사이토 일가이다. 캠핑족인 사이토 일가는 전기가 없는 생활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숲속에서 물을 구할 줄 알고 먹을 것을 찾을 줄 안다. 옛 조상들도 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더 발달한 민족인 우리가 못할 게 뭐 있어? 도구들도 더 좋잖아 라는 자세로 그들은 이 최악의 정전 상황 속에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여유를 보인다. 두 번째는 타나카 노인이다. 시골 사람인 그는 정전으로 마을 사람들이 떠나버린 농촌에 홀로 남아있다. 그에게 불편한 전 전기가 없는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떠나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전기가 끊긴 도시에서 스즈키 가족은 그들처럼 절망에 빠진 사람들만을 만나왔다. 도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들은 전기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전기와 동떨어져 있다.
문명사회에서 전기의 상징은 삶의 질의 향상이다. 전기라는 동력이 있기에 문명은 발전을 거듭해 올 수 있었고 그 발전은 매번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 향상이란 건 많은 물건들이 마치 ‘필수’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음식과 물이 소중한 정전 상황에 아들은 가방에 노트북을 가져간다. 이는 굳이 불필요한 물건임에도 마치 ‘습관’처럼 전자용품에 의존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앞에 친구들이 있음에도 굳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가족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음에도 굳이 텔레비전을 켠다. ‘전기 없이 살 수 있다’는 ‘문명의 발전 없이 살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편의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너무 많은 물품들을 ‘필수’로 만들어 버렸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조건들은 갈수록 까다로워지며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은 너무 빨리 유행이 바뀌어 버린다. 느린 게 좋다는 소리가 아니다. 가진 게 많으니 버리라는 말도 아니고.
그저 가지고 있지 않음을, 느리게 걷는 것을 자책하거나 비난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전기로 대표되는 문명은 삶을 편하게 만들어 왔고 편해진 인간들은 그만큼 서로가 필요 없어졌다.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인간의 가치는 떨어지고 이 가치가 떨어진 인간들은 서로를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의해 판단한다.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명함, 재산, 업적에 따라 사람을 판단한다. 허나 이 영화 속 ‘정전’처럼 문명이 만들어준 사람의 모양이 사라졌을 때,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는 그 사람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바이벌 패밀리>는 정전을 통한 가족의 관계 회복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인간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