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트>, <나의 장미빛 인생>, <스파이 브릿지>
가수 황보는 경비원에 대한 불평글을 올렸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황보는 자기 동네의 경비원이 짜증을 내 경비원 눈치를 보는 신세에 대해 한탄했다. 당시 경비원 분신자살 등 경비원의 인권과 처우가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을 때라 그녀의 이 글은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때를 잘못 맞췄을 뿐, 그녀의 글 내용에 잘못된 점은 하나도 없었다고 본다. 서비스업 종사자들 중에서도 ‘저렇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말지, 왜 내가 내 돈 내고 서비스를 제공받는데 눈치를 봐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로 포장되어 있기에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 황보는 때를 잘못 맞췄으나 만약 다른 때에 이런 글을 올렸어도 욕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성공한 연예인이라는 갑의 이미지를 주는 반면 경비원은 을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편견이란 이분법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도시 사람들은 쌀쌀맞은 반면 시골 사람들은 인심이 넘친다 등 한쪽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한 쪽의 이미지를 치켜세운다. 이에 대한 근거는 그들이 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연 중 흥미로운 사연이 있었다. 시각장애인과 결혼했다는 남자의 이야기다. 아내가 집에서 온갖 짜증과 횡포를 부리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뭐라고 하면 방어하는 논리가 이랬다고 한다. ‘당신 내가 장애인이라서 무시하는 거야?’ 장애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문제지만 무조건적인 온정의 시선도 문제다. 장애인은 약하다, 장애인은 무력하다, 장애인은 착하다. 이런 편견이 탄생시킨 악마가 이영학이다. 이영학은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성폭력을 행사한 범죄자였으나 그에 대한 온정이 사건이 커지는 걸 막았다. 가끔 온라인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장애인 때문에 입은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쉽게도 이들의 말에 크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이기에 이들에 대한 보호가 우선시 되어야 하며 이런 사건을 크게 만들면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편견은 절대 선을 낳고 한 사람의 깨끗한 면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더 헌트>라는 영화가 그렇다. 루카스라는 남자는 아내와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오고 친구들, 그리고 아들 마커스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한 아이의 거짓말로 이 행복은 처참히 깨지고 만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발암을 유발하는 건 유치원 원장의 ‘아이들은 거짓말 안 해요!’라는 대사다. 아이는 착하다. 아이는 진실만을 말한다. 이런 편견이 루카스가 친구 테오의 딸 클라라를 성추행했다고 오해하게 만든다. 아이는 인간이 정해둔 절대 선의 영역 중 가장 깨끗한 영역에 속한 존재이다. 일본 만화가 어린 아이 체구의 여자를 최종보스급을 설정하는 건 절대 선이라 여겼던 인물에 반전을 주기 위함이다. 평소 문제가 없었던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성추행을 당했다 말하면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 사실을 그대로 믿고 상대에게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의 미사 장면은 이런 편견에 대해 강렬하게 꼬집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편견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런 편견에 가려진 진실, 한 마디로 무엇이 중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은 알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이다. 그래서 루카스는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는 테오에게 호소한다. 그의 호소는 친구 사이의 우정,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동정에 기댄 것이 아니다. 신이 보는 앞에서 진실 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달라는 호소라고 생각한다. 거짓말로 인한 오해를 다룬 영화들은 많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 편견으로 인해 한 개인이 막다른 골목에 드라마틱하게 몰리는 작품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집단지성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잘못된 교육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나머지 소수 의견에 대한 존중을 배제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반장으로 당선된 아이가 인격적으로 큰 결함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선생들은 그래도 다수결로 뽑혔으니 그 아이를 반장으로 임명한다. 집단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생각이 나온다는 생각은 다수가 주장하는 의견은 언제나 옳다는 전개에 힘을 준다. 유럽은 이 집단지성의 문제가 컸던 나라다. 누군가 주장을 하고 그 주장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처럼 여겨졌다. 이런 집단의 절대주의는 결국 2차 대전으로 이어졌고 이런 집단지성에 대한 반성, 남이 되는 것이 아닌 내가 되라고 말하는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나의 장밋빛 인생>이라는 작품 역시 이런 집단 지성이 지니는 문제에 대해 다룬 영화이다.
루도빅은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일곱 살 남자아이다. 여장을 하거나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짜 생리통을 호소하기도 하는 루도빅의 행동은 귀엽기만 하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루도빅의 성적 관념이 마치 전염병처럼 아이들에게 퍼져 나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 작품의 무서운 점은 어른들의 폭력이 아이들에게 퍼져나간다는 점이다. 루도빅의 성적 관념이 퍼져나가는 걸 걱정했던 이들이 거꾸로 그들의 폭력성을 아이들에게 전파시킨 것이다. 동성애가 맞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해 논하자는 게 아니다. 루도빅과 그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어른들의 폭력이 과연 올바른 집단지성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수가 옳다고 말한다고 그게 선이 되지 않는다. 학교를 예로 들어보면 다수의 학생들이 한 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왕따나 폭력에 가담한다 해도 학생 수와 가해학생의 행위를 문제로 왕따와 폭력을 정당화 시킬 순 없다.
작품에서 루도빅네 가족은 극심한 고통을 당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매도당하고 아버지는 쳐 맞기도 하며 심지어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폭력은 아이들에게 전이되어 루도빅에게도 폭력이 가해진다. 이를 참지 못한 루도빅의 어머니는 모질게도 어머니가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문제는 다수를 등에 업고 ‘이게 정답이다’라고 외친다는 점에 있다. 이는 집단지성을 문제 삼았던 2차 대전 당시의 유럽, 냉전 시대에 사상을 절대적인 가치관이라 여겼던 미국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무조건적인 선의 영역을 만들고 그 영역과 다르다 여기는 의견 혹은 사상에는 가치 없이 난도질을 가한다. 휴머니즘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를 생각해 보자. 변호사 도노반이 스파이 루돌프 아벨의 변호를 맡았던 시기는 냉전 시대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척을 지고 있었고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이유로 감방을 향했고 사형을 당하던 시기였다. 매카시 의원이 이 광풍을 이용해 공산주의자 리스트가 있다는 거짓말로 정치적 실권을 잡기 위해 시도했고 청문회에 선 사람들에게는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혔던 때이다.
도노반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마저 위협을 당하는 이런 일을 왜 하게 된 것일까? 그의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인간에 대한 ‘가치’이다. 재판을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을 권리다. 변호사의 임무는 이 변호인이 재판에서 자신의 가치를 침해받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다. 또 그는 루돌프 아벨을 지킴으로써 또 다른 생명을 구했다. 바로 러시아에 붙잡힌 첩보기 조종사이다. 루돌프와 조종사는 비록 평생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사회적인 멸시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적어도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가 인간된 가치를 놓치지 않았기에, 어떠한 편견의 시선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터넷의 동향을 보면 진중권 교수가 한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원인이 아닌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어떠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나쁜 사람을 만들려다 보니 그 반대에 선 이들을 선으로 포장시킨다. 그리고 절대 선의 영역을 만든 채 이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선이라 주장하는 집단들 사이의 충돌, 선이라 작명된 집단 혹은 직업군에 대한 비판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절대 선이 또 다른 악의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정과 사회적 인식을 가지는 건 좋다. 다만 이 두 가지를 무기로 그 어떤 비판과 분석도 허락하지 않겠다면,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방패를 쌓아올려 두려고 한다면 선이라 믿었던 성수(聖水)가 고여 결국 썩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