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재판은 ‘절대적인 이성’의 영역인가

<세 번째 살인>, <12인의 성난 사람들>, <트럼보>

40~50년대 미국, 달튼 트럼보를 비롯한 헐리웃 배우, 작가들은 사상 검증에 시달린다.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게 되는 작가 달튼 트럼보는 냉전 시대 전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국회 청문회를 받게 되고 결국 교도소를 향하게 된다. 이들이 ‘죄명’은 반미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수많은 국민들이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촛불 또는 태극기를 들고 신경전을 벌이며 시위를 벌인 이유는 하나다. 재판에 여론전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재판은 이성적인 영역이라고들 한다. 증거와 증언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심판의 장소. 허나 이 심판을 내리는 인간이란 과연 ‘절대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트럼보의 유죄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수준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던 40~50년대의 미국은 공산주의자 색출에 열을 올렸다. 트럼보가 말한 틀릴 수 있는 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매카시즘의 광풍은 시들해졌고 사람들은 반미특위 조사위원회의 활동에 염증을 품었다. 심지어 당시 공산주의자 동료들을 밀고했던 엘리야 카잔 감독은 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으나 싸늘한 영화인들의 반응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 ‘유죄’를 받았던 트럼보를 비롯한 예술인들은 합당한 이성적인 영역에서 판정을 받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판사들이 내린 유죄라는 판결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죄를 심판했다 말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심판의 문제, 절대적인 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이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마지막 면회 장면, 변호사인 시게모리와 살인범인 미스미의 얼굴을 유리를 통해 하나로 포갠다. 시게모리는 의뢰인인 미스미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살인의 순서를 바꾼 죄명을 적용하려 시도하고 미스미가 피해자의 아내의 사주를 받아 살인을 저질렀다는 억지주장도 펼치려 든다. 그는 정말 미스미와 피해자의 아내가 불륜 관계였다고 생각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감형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투로 말한다. 변호사는 그렇다. 자신의 승리 또는 명성을 위해 의뢰인을 ‘심판’한다. 합의를 보라 말하는 변호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을 엮어 승리를 쟁취하려는 변호사도 있다. 그들은 재판장이라는 공간에서 변호사라는 직위를 통해 남을 심판하려고 든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스미 역시 그와 같은 인물이다. 그의 심판은 ‘살인’이다. 미스미는 첫 번째 살인으로 가정을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소녀인 사키에를 구하기 위해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기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물음을 던진다. 시게모리와 미스미,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이성적이냐고 말이다. 시게모리는 자신의 명예와 성공이라는 감정에 빠져 냉철해야 될 법조인의 태도를 잃어버렸다. 미스미는 딸처럼 여겨지는 사키에에게 감정적으로 빠져 넘어서는 안 될 살인이라는 테두리를 넘어버렸다. 하지만 시게모리는 이런 감정을 승리라는 영역에 포함, 이성으로 포장시킨 반면, 미스미는 스스로에게 ‘사형수’라는 이성적인 심판을 내린다. 

재판장은 모든 증거가 명확하고 확실하다는 판단 하에 미스미에게 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성을 핑계로 가려진 수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진실을 감추는 건 감정이다. 사키에를 사랑하는 미스미의 감정이, 승리와 명예를 차지하고 싶은 시게모리의 감정이 진실들을 수면에 감춰둔 것이다. 판사는 한 사람의 ‘완벽하게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기에 배심원제를 채택하는 재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해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판사들의 판정에 시민들의 불만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배심원제가 들어왔을 때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헌데 오히려 배심원제에서 더 낮은 형량이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살인현장과 피해자 유족을 만난 사람은 사형 찬성론자가 되지만 뉘우치는 가해자를 만난 사람은 사형 반대론자가 된다.’는 <데드 맨 워킹>의 명언처럼 가해자의 반성하는 모습과 처지를 딱하게 여긴 배심원들이 감정적으로 동화했기 때문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앞서 말한 <세 번째 살인>과 배심원제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세 번째 살인>에서 미스미는 무죄를 주장하며 이리 말한다. 이미 경찰과 변호인단이 자기를 유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미스미의 첫 번째 살인을 맞았던 전직 판사인 시게모리의 아버지도 미스미가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때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은 걸 후회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미스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 편견은 그의 판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배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빈민가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고 그 소년은 칼을 잘 쓴다. 심지어 그와 아버지의 사이는 좋지 않다. 배심원들은 재판의 증거와 증언을 조합해 볼 때 소년이 유죄라고 결론을 내린다. 헌데 8번째 배심원, 데이비스만은 소년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이때 배심원들의 반응은 더운 날씨, 고장 난 선풍기가 가져오는 짜증만큼 푹푹 찌는 분노다. 그들은 소년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 빈민가 아이이기에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또 그들은 배심원제의 문제인 감정적인 동화를 겪고 있다. 그 중심이 세 번째와 네 번째 배심원이다. 세 번째 배심원은 큰 덩치만큼 목소리가 큰 인물이다. 그의 강한 주장은 감정적인 동화를 가져온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당당함은 안정감을 주며 짜증은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리고 심장을 자극하는 커다란 고동은 감정적인 동화를 가져온다. 세 번째 배심원이 감정적으로 흐름을 유발한다면 네 번째 배심원은 논리적으로 유죄를 주장한다. 그는 법원에서 나온 증언과 증거를 내세우며 데이비스를 압박한다.  


법정은 철저한 이성을 통한 증거와 증언들이 모두 펼쳐지는 장소라고 생각하기들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판사가 인정한 증거와 증언에 대해 큰 의심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이 하나하나를 의심하고 합당한 주장과 근거로 무력화 시킨다. 헌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11대 1로 상황이 기울어졌을 때, 그들은 토론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토론은 가장 합리적인 이성을 이끌어내는 도구이다. 이미 승패가 기울어진 재판에서도 검사와 변호사가 토론을 반복하는 건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의 카타르시스는 이에 기인한다.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생각이 변화를 보인다. 데이비스의 논리적인 어조가 마음을 흔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이지 않다. 실제 재판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은 흉악범도, 지능범도 아닌 죄인의 어머니라고 한다. 울며불며 재판장 한 가운데에 들어 눕는 죄인의 어머니는 그 어떠한 논리로도 일으켜 세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배심원이 세 사람 있다. 7번째 배심원은 빨리 판결을 내고 야구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에 다수결에 따른다. 12번째 배심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다수가 무죄를 주장하자 무죄로 의견을 바꾼다. 10번째 배심원은 생떼를 쓴다. 그의 논리는 소년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다. 결국 그는 스스로 악에 받쳐 지친 채 무죄로 의견을 바꾼다. 3번째 배심원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의견을 바꾼다. 헌데 그가 의견을 바꾼 이유는 주변의 압박이나 논리 때문이 아니다. 소년이 유죄라고 주장했던 감정적인 논조처럼 무죄로 바꾼 이유 역시 감정적이다. 그는 지갑의 아들 사진에서 소년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동정을 느꼈을 것이고 그 동정이 아들이라는 분신, 그 아들이 소년과 오버랩 되면서 결국 무죄로 의견을 바꾸었다.  


재판은 한 인간을 ‘심판’하는 장소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모든 진실을 알 수 없고 명확하고 정확한 답을 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사회의 질서와 유지, 인민재판이 가져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재판이라는 과정은 필요하다. 절대적인 이성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이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편견, 두 번째는 감정의 동화다. 달튼 트럼보,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소년, 미스미는 편견 때문에 올바른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감정의 동화에서 온다. 재판장에 사람을 동원하는 이유, 분위기가 어수선해 지면 판사가 방청객들을 내보내는 이유는 감정의 동화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전에 감성적이다.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혐의가 짙음에도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건 이런 감성에 휘말리지 않기 위함이다. 만약 12명의 배심원 모두가 소년이 살아온 환경, 재판장의 분위기에만 빠진 채 판결을 내렸다면 하나의 생명은 잘못된 심판에 의해 사라졌을 것이다. 재판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재판은 99명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그 존재 의의가 있다’  


고 말이다. 절대적인 이성은 없다. 다만 재판이란 건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신의 영역을 대신한 자리인 만큼 ‘인간’을 위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절대 선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