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더 머니>, <베테랑> 外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고대 그리스의 유물을 준다. 할아버지는 시장에서 그 가치를 모르는 노인과 흥정을 벌여 원래 가격보다 싼 값에 구매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 귀하게 얻은 값비싼 유물을 손자에게 주며 ‘너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말을 대신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유물은 그리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값싼 조각품에 불과했다. 왜 할아버지는 이런 거짓말을 손자에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이 방법이 ‘아주 저렴한 값’으로 ‘아주 비싼 가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1973년 일어났던 게티 3세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 <올 더 머니>는 ‘정말 돈이 많은’ 갑부가 세상의 모든 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강렬하면서도 무섭게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였던 폴 게티는 그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10달러 남짓한 기념품이 그의 설계의 전부다. 폴 게티는 아들 가족의 첫 방문 때 와이셔츠 빨래를 손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모습은 짠돌이라기보다는 세상 모든 일에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비싼 호텔에 지불하는 비용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기에 하지만 이에 따른 서비스는 금액만한 가치가 없기에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조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그가 손자에게 그리스 유물이라며 기념품을 건넨 순간은 그들 가족에게 특별한 순간처럼 여겨진다. ‘돈’에 있어 폴 게티가 그의 손자에게 높은 가격을 책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가족은 잊고 있었다. 와이셔츠 빨래의 의미를 말이다. 부자에게는 시간도 금이다. 어쩌면 돈보다 중요한 게 시간일 것이다. 워렌 버핏과의 식사 한 번이 비싼 가격을 책정 받는 이유는 그가 가진 노하우,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갑부들에게는 시간, 그 자체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왜 폴 게티는 그 소중한 시간을 와이셔츠 빨래에 소비한 걸까? 식사를 하면서 손자에게 편지를 읽히고 답장을 쓰게 하는 사람이 왜 와이셔츠는 시간을 들여서 빤 것일까? 그건 아들 가족을 속이기 위해서다. 폴 게티는 아주 적은 금액으로 아들 가족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핏줄에 대한 확신이 있다. 쌩판 모르는 남보다는 핏줄이 믿음직스럽다 여기는 것이다. 그에게는 싸지른(?) 가족이 많다. 굳이 이 가족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연락을 해 온 핏줄인 만큼 확신이 있다 여겼을 것이다. 다만 이 확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순 없다. 그래서 그는 가장 적은 금액으로 그들을 품기로 결심한다. 예상했던 대로 가족들은 넘어오고 폴 게티는 신뢰를 얻게 된다. 그는 약간의 돈과 시간만을 소비해 한 가족을 품는다. 부자들의 무서운 점은 여기에 있다. 그들의 생각은 항상 같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비용을 뽑아먹는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보자면 그가 왜 사회파 작가로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그는 부유계층에 대한 ‘판타지’를 소설에 집어넣지 않는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학생회 투표율이 낮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학생회가 권력을 이용, 부를 축적하는데 이용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생 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지 않고 분쟁성이 강한 문제에만 열을 올린다. 과거 학생회장을 하면 차 한 대 뽑아서 나간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다. 심지어 몇몇 지방대들은 학생회가 지역 조직폭력배와 결탁, 자금을 횡령한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 많은 부를 소유한 이들은 그 부의 힘을 바탕으로 힘을 과시하고 행사한다. 연예인들이 흔히 말하는 연예인병도 여기에 기인한다. 인기와 부, 두 가지를 손에 넣은 사람에게 도덕성이나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려내는 재벌들도 그렇다. 많은 부를 소유하면 그 부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짓밟으며 심지어 살인까지 이어진다.
반면 대한민국의 드라마는 재벌 판타지라고 해도 될 만큼 재벌에 대한 미화를 보인다. 재벌도 고민이 있고 재벌도 아픔이 있다. 재벌도 마음이 따뜻하며 사랑을 위해서는 돈을 포기할 만큼 용기가 있다. 헌데 이런 재벌 판타지에 동조하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느 정도 재력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을 좋아한다. 입으로는 동정을 말하나 그 동정으로 하층계급의 모든 언행의 잘못을 받아들이거나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 겉으로는 하층계급은 동정을 받아야 되는 존재이며 그들을 도와줘야 된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어울리기 싫어하고 그들을 위한 일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우이웃돕기에 성금은 내지만 직접 그들을 위한 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런 모순된 마음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국내에 미개봉된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Roman J Israel, Esq.>가 아닌가 싶다.
로만 이즈레일은 평생을 인권변호를 위해 애썼으나 파트너가 병으로 로펌은 문을 닫고, 돈이 되는 사건만 담당하게 되는 로펌에 들어가게 된다. 이 작품에서 로만 이즈레일은 직접 빈민층을 겪게 되면서 그들의 과격함과 편견, 부적절한 언행에 상처받게 된다. 그는 평생을 그들을 위해 일했기에 돈도 명예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로만 이즈레일을 자신들을 이용해 돈을 벌어먹고 거짓된 말만 내뱉는 위선자 취급을 한다. 흑인들을 위한 법률 연설 장면에서 모욕을 듣고 강도에게 폭행을 당한다. 약자를 도와주겠다고 한 행동이 잘못되자 의뢰인의 가족들과 주변인들은 모든 잘못을 그에게로 돌린다. 어려운 싸움을 오직 신념과 의욕만으로 해오던 그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품게 된다. 새 로펌의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비록 돈을 밝힐지언정 교양이 있고 대화가 통하며 그의 유머에 웃어줄 줄 안다. 그는 전 로펌의 동료가 입원한 병원에서 흑인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여성과의 데이트 자리에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부정한다.
필자에게도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 이 편견은 직접적인 만남에서 생긴 것이다. 그들은 사랑받는 법을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대화에서 고집이 강하며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건 물론 지나친 피해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배우고 가진 사람이 지닌 여유와 화술, 배려를 이들은 배운 적도 배우고 싶지도 않다. 당장 자신의 삶이 힘든 건 물론 사람에게 치이고 고통 받고 속아온 나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견을 지닌다. 이 편견이 낳은 재벌 판타지는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잘 차려입은 의상에 잘 배운 매너,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여유가 그들을 허울 좋게 포장한다. 이런 포장이 최근 막말 논란을 불러일으킨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에게도 있었다. 그녀는 한때 e스포츠에 투자를 했었는데 이때 e스포츠 팬들의 그녀를 향한 반응은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조현민 전무는 외형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기 충분했고 그녀가 가진 부의 투자는 당시 e스포츠에게는 중요한 자금이었다. 그녀의 투자는 개인의 언동과는 다른 이미지 상승으로 올라갔다. 마치 폴 게티가 그의 손자에게 환심을 사듯 말이다.
영화 <킹스맨>에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한때 JTBC예능 <비정상회담>의 유럽인 패널들은 다 같이 합심해 미국인 패널 타일러 라쉬를 놀리곤 했다. 그 이유는 미국과 유럽이 지닌 부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럽은 ‘계급’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다. <단순한 열정>의 저자 아니 에르노는 그녀 자신이 계급에 있어 벽을 느꼈다고 말한다. 서민 계급에서 자라온 그녀는 상류 계층의 남자와 결혼 후 그 가족과의 사이에서 교양과 매너의 벽을 느꼈다. 살아온 환경과 받아온 교육, 가지고 있는 핏줄을 통해 기질의 차이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유럽의 상류층은 단순히 자본의 유무만을 지니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랜 전통으로 관습화 된 기질이란 게 있다. 상류층만이 지닌 매너와 아우라가 말이다. 반면 미국의 상류층은 오직 돈과 연결되어 있다. 많이 가진 이가 상류층이다. 조금 심한 말로 하자면 천민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이런 천민자본주의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과거 양반가들이 지녔던 예절(매너)을 보여주는 상류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킹스맨>의 에그시가 루저에서 돈과 첨단장비, 철저한 교육을 통해 ‘킹스맨’이 된 거처럼 자본을 쳐 바른 ‘천민 매너’만이 그들 사이에 존재할 뿐이다.
한국 영화 중 이런 천민자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는 <베테랑>의 조태오라 할 수 있다. 그는 위로 형, 누나가 있고 재산 상속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망나니처럼 살아왔고 회사 임원들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근본도 없는 놈이 권력을 잡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권력자는 백성들을 살육하고 여자들을 궁궐에 모아 성욕을 채운다. 놀랍게도 이 패턴은 항상 일치한다. 조태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쾌락을 위해 약을 하고 여자 연예인들과 어울린다. 그의 옆에는 뒤처리를 안전하게 해주는 최상무가 있고 뒤로는 마르지 않는 돈을 지닌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느 권력자들처럼 자신이 가진 권력 또는 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술수를 부린다. 이 작품에서 배기사와 조태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조태오의 속성은 한국 재벌들의 속성과 비슷하다. 참으로 순진한 어린아이 같다.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이 청문회 당시 보였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가 보인 모습, 특히 긴장한 모습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았다. 조태오가 배기사의 아들에게 미니카를 보여주고 이를 주는 장면은 재벌이 지닌 순수한 속성을 보여준다. 배기사 역시 조태오가 자신을 부르고 밀린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 재벌에게는 순수하고 정의로운 면이 있다고. 그러니까 사회의 지도가 계층이라고 말이다.
헌데 배기사가 액수를 말하는 순간 조태오는 태도를 돌변한다. <올 더 머니>의 폴 게티가 사랑하는 손자가 납치되었으나 그 액수를 지불할 수 없다고 말한 거처럼 조태오는 배기사의 말에 그가 가치 없다 여기게 된 것이다. 차이라면 폴 게티는 손자를 구하고는 싶지만 그의 몸값에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긴 반면 조태오는 밀린 월급의 액수가 너무 적자 배기사의 가치가 쓸모없다 여긴 것이다.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어이 발언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재벌에게는 시간도 돈이다. 어쩌면 물 흐르듯 넘치는 돈보다 24시간이 정해진 시간이 그들에겐 더 소중할 것이다. 재산 문제가 걸린 이 중요한 시점에 조태오는 맷돌의 손잡이, 어이가 되어주길 바랐던 배기사가 허무하게 빠지자 그 분노를 표출한다.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방식 ‘폭력’으로 말이다.
가장 성숙한 고통은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망가지게 설계를 하는 것이다. 데이빗 맥킨지 감독의 괴작 <어사일럼>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가장 미성숙한 고통은 신체적인 폭력이다.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잔혹하다. 그들에게는 한계가 없고 눈치가 없다. 지식이 적기에 고통을 보며 즐기기만 할뿐 상대가 느끼는 아픔, 그 후 자신에게 올 대가를 계산하지 못한다. 한국 재벌들은 폭력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SK최태원 회장 사촌 재벌2세 최철원씨는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1인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를 폭행했고 1988년에는 현대그룹 노조원 집단 폭행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의 한 사립초에서 재벌가 손자가 같은 반 아이를 폭행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폭행에 대해 영화는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 라는 말이다.
조태오의 아버지는 조태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조태오를 책임지라 붙여 놨던 최상무에게 모든 잘못을 묻는다. 그가 최상무를 때리는 장면에서는 조태오의 폭력성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조태오는 아버지를 따라 도시락의 맛있는 반찬을 최상무의 밥에 올려둔다. 돈이면 다 된다. 돈이면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다. 똑똑한 아랫놈을 부리고 일이 틀어지면 그놈에게 책임을 다 돌려라. 적절한 보상만 해줘라. 물론 모든 재벌들이 이렇다는 건 아니다. 내가 궁예도 아니고 ‘돈 있는 놈들은 모두 천박하다’라고 말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천민자본주의가 만든 괴물들에 대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재벌에 대한 지나친 판타지와 신봉은 분명 없어져야 될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삭개오는 세리였기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에 협력하여 많은 세금을 징수, 부를 축적하였기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한 뒤 그의 집을 찾아가 구원의 영광을 내리셨다. 이는 삭개오의 결심에서 비롯되었다.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자기가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결심은 결국 축복으로 이어졌다. 재벌들 역시 마찬가지다. 문어발식 경영, 가족 경영, 회사를 자기 집처럼 여기고 직원들을 부려먹는 태도, 정치권과 결탁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자세는 어느 면에서도 ‘사회 상류층’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있어야 인식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