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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기에 겪는 아픔 그리고 비극

<하늘 높이>, <세컨 찬스>, <단지 세상의 끝>


동물은 약한 자식이 태어나면 버린다. 우리는 <동물농장> 등 동물을 다루는 프로에서 동물원에서 태어난 약한 새끼가 사육사에 의해 길러지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자식은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부모에게 다가서려 하지만 부모의 경계와 공격으로 아픔을 겪곤 한다. 어찌 생각하면 약육강식이 통하는 자연의 질서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인간은 예외다. <하늘높이>의 어머니 나나는 아픈 아이를 위해 건강한 아이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막내아들 걸리는 아프다. 나나는 걸리를 치료하기 위해 한 숲을 향한다. 이 숲에 있는 뉴먼의 치유캠프에서 치유능력을 배우면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헌데 숲을 향한 첫날, 한 남자는 건강한 아이인 아이반의 매를 쏴 죽인다. 어린 아이반에게는 매가 죽었다는 충격보다 매를 죽인 남자의 딸을 어머니가 치료해 주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


나나는 걸리를 치료받게 하기 위해 치유 캠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자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헌데 그녀는 걸리만을 생각한 나머지 아이반에 대해 몰랐다. 아이반 역시 어린아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반은 걸리는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해야 했다. 숲속의 외진 마을로 와야 했고 자신의 매를 죽인 남자에게 사과를 받기는커녕 어머니가 그를 도와주는 꼴을 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나나는 아이반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녀는 믿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형이니까 동생을 위해 당연히 희생할 것이라고. 이런 희생을 강요당한 아이반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때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결국 나나를 떠나게 된 사고는 아이반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원인보다 가슴 아픈 사실은 아이반이 나나를 떠났듯 나나도 아이반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이반은 어렸다. 감당하기 힘든 인내와 희생을 강요당했고 슬픔을 견뎌내야 했다. 헌데 나나는 그런 아이반과 자신을 동일선상에서 생각했다. 그녀도 인내를 했고 희생을 했다. 걸리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데 아이반이 망쳐놓았다. 어머니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떠나간 아들을 찾지 않는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이기에, 자식이기에 당연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헌데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런 의무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애를 내팽개치는 부모,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 이들에게 우선은 가족 된 도리가 아닌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단지 세상의 끝>은 가족 간의 관계가 감정에 깊이 빠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12년 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한 마디 말을 내뱉는다. ‘왜 돌아왔니?’ 방금 전까지 문 앞에서 유명 작가 루이를 환영하던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말에는 섭섭함이 깊게 묻어있다.


만약 인간이 학습된 감정만을 지니고 있다면, 개인이 가진 역할에 충실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반응이라 생각한다면 12년 만에 집으로 온 루이는 환영받았을 것이다. 유명작가가 되어 돌아온 건 물론 참으로 오랜만에 집을 방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자신들이 품은 섭섭함을 쉽게 놓지 못한다. 루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를 알리기 위해 가족을 찾아왔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쉽게 마음을 터놓게 만들지 않는다. 여동생 쉬잔은 오빠에 대한 열등감과 섭섭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어머니는 책임감을 운운하며 표면적인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형 앙투안은 타오르는 분노와 화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다. 이런 표면적인 관계만 본다면 루이의 가족들은 루이의 마음은 1도 몰라주는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보일 것이다. 허나 그 이면에는 12년의 시간이 있다. 12년 동안 루이는 형식적인 엽서로만 가족들과 소통했다. 가족들에게 루이는 어렵고 섭섭하고 화가 나는 존재다. 



루이에게 자신의 마지막 여정인 죽음의 시작은 가족이어야 했지만 가족은 이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루이가 자기를 드러내지 않듯 가족도 그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집’을 노래한 수많은 가수들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따뜻함을 이야기하는 반면 이 영화의 노래는 집은 항구가 아니라며 차가운 장소로 묘사한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픔이나 슬픔을 느끼는 건 관계 때문이다. 인간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특정한 역할과 상황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끈이라는 게 있다. 나나는 아이반에게 희생과 인내를 요구했고 아들이 이를 배신하자 가혹하게도 사랑을 포기했다. 앙투안이 루이와 다툼을 벌인 후 어머니는 오랜만에 돌아온 그리고 떠날 둘째 아들 루이가 아닌 항상 곁에서 함께 했던 아들 앙투안을 달래기 위해 뒤뜰을 향한다. 어머니가 오랜만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만 같은 아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는 앙투안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어머니의 선택에 상처를 받는 건 루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가족들은 12년을 루이 때문에 고통을 받아왔다. 앙투안은 홀로 책임감이라는 짐을 짊어져야 했고 쉬잔은 잘 나가는 오빠를 멀리서 바라보며 지적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앙투안이 느낀 내면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기에 차마 마지막을 루이의 마중을 위한 시간으로 쓸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더 마음이 가는 아들은 잘 나가는 작가 루이가 아닌 공장에서 일하는 거칠고 못 배웠지만 가족을 위해 아파야만 했던 앙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 때문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보여주는 영화 <세컨 찬스>는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감성이 때로는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이성보다 감성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자신의 감성을 합리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이 선택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믿음이다. 형사 안드레아스도 그랬다. 

                                                                                                       


그는 전과자 트리스탄의 집에서 온몸에 똥이 묻은 채 장롱에 쳐 박혀 있는 아기를 발견한다. 하지만 법은 트리스탄과 산느가 아기의 부모이기에 그들이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부부가 아기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환경에 내버려 두고 있지만 직접적인 건강에 피해가 있음을 증명해내지 않고서야 양육권을 뺏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아기가 건강 문제로 죽자 아내 안나 몰래 트리스탄의 아기와 자신의 아이를 바꿔치기 한다. 어차피 트리스탄이라는 부모 아래에서 아기는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자신이 아기를 키우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문제를 도덕의 영역으로 본다면 안드레아스의 행위는 무조건적으로 비난받기 힘들 것이다. 그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기를 구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가라, 아이야, 가라>의 형사 패트릭은 알콜 중독자 엄마에게서 유괴(?)된 아이를 다시 엄마에게 돌려보내는 선택을 한다.


패트릭은 도덕적인 갈등을 겪는다. 아이의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실종 상태로 끝난 채 다른 가정에서 살게 하는 게 옳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친권이란 것을 불법으로 빼앗을 권리가, 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앞날을 함부로 예측하고 미래를 바꾸는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패트릭은 아기를 바꾸고 나서야 알게 된다. 어머니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게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아내 안나는 아기가 바뀐 걸 알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친모인 산느는 광적으로 아기를 찾기 위해 애를 쓴다.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선택이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안나는 아기를 얻었으니 자신이 아기를 죽였다는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고 트리스탄과 산느는 아기가 없으니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잘 지낼 것이다.


그리고 트리스탄과 산느 아래에서 불행하게 클 아이는 자신과 안나의 보살핌 속에서 건장하게 성장할 것이라 그리 여긴 것이다. 인간사 모든 문제가 가장 이성적이라 생각되는 판단 그대로 이뤄진다면 세상은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답게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호의라고 베푼 게 남에게 권리가 되어버리는 거처럼 인간에게는 개개인이 가진 감정의 영역이 있기에 아픔이 있고 비극이 있다. 건강한 아이가 아픈 아이 때문에 인내와 희생을 강요당하고, 12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소외와 아픔을 느끼며, 최고라 여겼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건 동물도, 로봇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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