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

<범죄의 여왕>, <반드시 잡는다>, <로마서>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가능성을 평가한 저서 <예정된 전쟁>은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고대 그리스를 폐허로 만들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신흥국 아테네의 부상에 대한 패권국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에 일어났다고 설명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헌데 이 책에서 투키디데스는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와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전쟁이 그리스의 쇠퇴를 가져올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헌데 그 둘은 전쟁을 택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두 국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국의 국민들은 전쟁을 원했고 정치인들은 인기를 얻기 위해 전쟁을 선동했다. 두 국가의 분위기는 페리클레스와 아르키다모스가 아니어도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정치적인 실각을 피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두 지도자는 결국 전쟁이란 선택을 하고 만다.


한국에서는 활발한 미투 운동이 왜 일본에서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걸까. 한국은 국민들의 힘으로 촛불을 들어 부패하고 억압적인 정권을 몰아냈다. 헌데 일본은 전 세계가 극찬하는 한국의 촛불집회를 방송하며 ‘미개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 갑질 문화에 저항하며 시사 프로의 영향력이 크다. 최근 대학 내에서도 위로는 교수부터 아래로는 학생회까지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한 불의에 대한 저항의 의지가 강하다. 반면 일본은 집단을 중시한다. 일본의 이지메 문화는 집단 유지와 관련되어 있다. 집단에 어긋나거나 집단에서 불필요하다 여기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과 폭언을 행사한다. 미투 운동을 통해 사회의 질서가 어긋나는 걸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일본 정치에 세습이 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 일본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선생이고 부모고 때리지 않나.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집단이다. 집단을 와해시키는 존재는 누구든 상관없이 폭력의 대상이 된다.

                                                                                                                                             


사회의 구조는 사람을 만들어 낸다. 그 사회의 분위기는 사회가 만들어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의 구조가 잘못되어 잘못된 교육, 잘못된 교훈, 잘못된 사고를 지니게 된다면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아수라>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수라판’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엉망진창이다. 착한 놈이라고는 한 놈도 나오지 않는다. 시장 박성배는 권력과 이권을 위해 온갖 악행을 거듭하고 형사 한도경은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악행을 돕는다. 검사 김차인은 한도경이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고 그를 감금하고 폭행해 박성배를 조사하는 정보원 역할을 강요한다. 한도경을 친형처럼 따르던 형사 문선모는 그를 따라 박성배의 아래로 들어간 뒤 더 독한 놈이 되어버린다.


분명 감독은 최악을 가정하고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헌데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입으로 말하는 존재들이다. ‘어차피 정치인들은 다 부패해’ ‘경찰이 서민 편드는 거 봤냐? 정치인들 뒤나 닦아주지’ ‘검사들 깨끗할 거 하나 없어’ 그들이 더럽고 잘못되었다는 걸 입으로는 알면서도 막상 영상으로 보니 더럽기 짝이 없다. 정말 저런 인간들만 있다면 국가가 아수라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성배, 한도경, 김차인, 문선모를 악으로 만든 건 사회가 지닌 돈, 그리고 권력이라는 잘못된 구조 때문이다. 한도경은 아픈 아내를 위해 돈이 필요하고 박성배는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업적이 필요하다. 김차인 역시 자신의 성공을 위해 폭력을 자행할 만큼 무자비하며 문선모는 너무나 쉽게 어둠에 물든다. 구조는 돈 많고 성공한 사람들만 물들게 하지 않는다. 사회에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그 분위기에 적응하는 사람들을 만든다. 분위기 파악 못하면 욕먹는 거처럼 잘못된 분위기라도 어울리게 말이다. 이번 글에서는 먼 재벌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에 대해 쓸까 한다.

                                                                                                                                                                     


성공을 위해 인간됨을 버리다 <범죄의 여왕>


필자는 독서실이라는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쁜 기억이 많다. 흔히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예민한 고시생들의 행동을 몇 번 당해봤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소리에 예민한 거, 까칠하게 구는 거, 별 거 아닌 거로 성질내는 거. 자세히 서술하자면 끝이 없다. 고시생들에게 좀 덜 예민하게 행동하라고 쓰는 글이 아니다. 이들을 이런 예민보스로 만든 사회의 구조를 꼬집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에는 고시생이 참 많다. 행정고시, 사법고시, 임용고시 등 국가직이 되기 위해 밤낮으로 학원과 독서실에서 공부만 반복한다. 이들의 목적은 시험 통과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승자로, 떨어진 사람은 패자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에게는 보상심리라는 게 있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낸 부모는 자연스럽게 ‘우리 애가 이정도 대학에 다니니 적어도 상대도 비슷한 대학은 나와야지’라는 심리를 지니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자신이 한 행동에 맞는 보상을 바란다. 고시 공부의 경우 갈수록 경쟁률이 심해진다. 9급 공무원의 경우도 3년은 공부해야 된다는 소리가 나온다. 합격은 이에 대한 보상이 되지만 탈락한 경우 지나친 허탈함과 무력함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에 대한 스트레스를 외부를 향해 푼다. 인간관계에 있어 따뜻함은 여유에서 나온다.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따뜻함도 없다. 내가 힘드니 남을 배려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범죄의 여왕>이 그려내는 고시원 풍경이 그렇다. 사법고시 준비생인 아들 익수는 120만원의 수도요금을 수상하게 여겨 올라온 엄마를 냉대한다. 그는 엄마가 빨리 120만원을 내고 고향으로 내려가 주길 바란다.


그의 이런 심리는 눈앞에 시험이 닥쳤다는 점 때문이다. 흔히 농담으로 집중을 안 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다고들 한다. 헌데 고시생들은 작은 소리에 정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인생을 여기 다 걸었다고 할 만큼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공부만 했기 때문이다. 익수는 방해 받는 거 없이 공부만 하고 싶어 한다. 이런 고시생들의 병폐를 작품은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하준은 10회나 사법고시 2차에서 낙방한 인물인데 15년을 고시촌에 머무른다. 그는 고시생들 사이에서도 명물로 불린다. 문제는 이 15년의 기간 때문에 하준은 지나친 열망을 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패배의식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이 패배의식을 공포로 삼고 성공을 열망하며 잔혹한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자신은 실패하는 게 두렵다. 15년 동안 한 거라곤 사법고시 준비 밖에 없는데 여기서 물러나면 난 끝이다. 그래서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 그의 이런 열망은 관계에 있어 본인을 최우선으로 두고 상대를 적으로 두는 이분법적인 인간관계를 구성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실종되는 고시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인물이다. 오랜 시간 공부를 하다 보면 사람이 피폐해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길로 삼은 이상 능력을 의심하는 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건드리는 꼴이다. 능력이 안 되면 공부를 하지 않아야 하니까. 그래서 이유를 외부로 돌린다. 고시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시끄럽다다. 방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예민하게 행동하는 것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지만 이미 자신이 최우선이 되어버린 고시생들에게 다른 사람이 입는 피해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고시생들의 사고를 꼬집는 중요한 대사를 날린다. 수도요금이 살인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안 미경에게 아들 익수는 사건에 휘말리기 싫다며 제발 조용히 가달라고 말한다. 그런 익수에게 엄마 미경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사람 구하겠다는데 판검사 된다는 놈이 가지 말라는 게 정상이야?’


어떤 직업을 꿈꾼다는 건 그 직업의 정신과 목표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자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업을 하기 어려워지고 돈이 최우선의 가치가 되면서 무조건적인 직업적 성공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버렸다. 과정이 목적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되면 가장 먼저 가져야 되는 마음가짐이 국가와 국민을 향한 봉사와 헌신의 자세다. 헌데 고시생들은 그런 자세를 가지기 힘든 교육과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철저한 이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작동하고 따뜻한 헌신은 버린 지 오래다. 암기 위주의 공부는 사유의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어 국정농단 같은 사태가 일어나도 방조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만들었다. 

                                                                                                                                             


노인과 젊은이가 싸우는 세상 <반드시 잡는다>


아마 필자의 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또 이 이야기냐’ 라며 지겨워할지도 모른다. 책의 첫 번째 파트가 이 내용이니 말이다. 세대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고 있는 문제다. 일자리 문제, 세금 문제, 복지 문제, 정치 문제 등등 세대갈등이 지닌 폭탄은 참으로 많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6.25전쟁과 반공교육 등을 통한 노년계층의 북한에 대한 분노, 이를 이용한 정치권의 빨갱이 공작 때문에 정치적인 갈등이, 높은 교육열과 학력을 통한 교육신화를 이루기 위한 금전적인 손실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일자리 문제 때문에 경제적인 갈등이 상당하다. <반드시 잡는다>의 심덕수는 이런 갈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자부할 정도는 아니지만 낡은 건물이라도 세를 받아먹는 건물주다. 국가지원을 받거나 손 벌리는 일 없이 잡다한 일이라도 일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덕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이런 자부심 때문인지 그는 동네에서 표독스럽고 사악하기로 소문난 노인이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에게 툭하면 하는 말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이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나라인 일본의 경우에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인 사토리 세대에게 이런 말을 하니 말이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다포세대와 일본의 사토리 세대의 공통점은 그들이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 대가가 너무나 형편없다는 점이다. 높은 학력에 비해 어울리는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여건을 누릴 수 없다. 또 공통적으로 기성세대의 표적이 된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누린 성공과 노력에 비할 때 이들 세대가 너무나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버블 경제전까지 세계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고 지금도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한강의 기적은 물론 IMF 전까지 경제호황을 누렸으며 IMF를 이겨내기도 하였다. 기성세대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하다고 여길 만한 일들을 해냈다. 그런 그들에게 다포세대가 말하는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덕수는 독하게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내라고 말하는데 그가 그러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왔기에 먹고 살 만큼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덕수가 성공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기 힘들다. 다만 그의 말투를 보았을 때 남에게 곱게 그리고 상냥하게 대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배우면서 자랐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방세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지은에게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지은은 독하지 못한-그래서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 젊은이로 보인다. 노인들은 사회의 변화에 대해 잘 모른다. 정보의 습득이 느리고 체감이 없기에 느끼기 힘들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첫 번째 범인은 노인 혐오자이다. 그는 노인들을 때려죽이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에 있다.


바로 정치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다. 한국 정치는 세대갈등이 뚜렷하다. 그리고 그 갈등만큼 두 정당의 정책차이도 크다. 젊은 층들이 겪고 있는 일자리 문제에 대해 고민해 줄 정당이 아니라 시대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색깔론을 들먹이는 당을 뽑아주고 있으니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마련이다. 노인 인구의 증가는 출산율 저하와 관련되어 있다.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 청년계층의 세금 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복지 문제 때문이다. 일자리도 없는데 세금 부담까지 증가한 청년계층에게 가정을 꾸리고 애를 낳는 결혼은 크나큰 부담이다. 그러다 보니 결혼을 기피하거나 자녀를 많이 낳는 걸 꺼려한다. 이는 사회의 동력을 저하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그러다 보니 노년계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영화의 범인 역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라 여기며 이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한다.

                                                                                                                                                          


영화의 내용은 덕수가 실종당한 지은을 직접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은과 덕수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살해당한 최형사 역시 그저 덕수의 집에서 세 들어 살던 노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덕수는 어떤 정의감 때문에 사건에 뛰어든 걸까. 세대 간의 갈등의 해결은 결국 이해다. 지은은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덕수에게 대들지만 그 안에는 덕수를 바라보는 따뜻함이 있다. 그녀는 말한다. 사실은 할아버지가 집세가 밀려도 말만 그렇게 하지 내보내지 않고 있다는 걸 안다고. 사실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이다. <국제시장>의 덕수가 가족들과 분리된 채 방에서 ‘아버지, 나 이정도면 잘 산거 맞지?’라고 말한 이유는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가족들 중 누구도 나이든 덕수에 대해 알아주지 않았기에 그는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반면 <반드시 잡는다>의 덕수는 지은이 진심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었기에 자신이 해야 될 일을 한다. OCN드라마 <나쁜 녀석들>에 나왔던 대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치고 더 많이 죽는다. 그들은 제대로 된 공권력과 사회의 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덕수는 사회의 어른으로써, 기성세대로써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그 역할은 자신의 아래세대에 대한 보호와 관심, 그리고 보살핌이다. 사회가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어른이라는 존재가 크게는 국가를 좁게는 가정을 이끌고 보살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역할을 어른이라는 이들이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에 세대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랜드파더>의 기광을 생각해 보라. 그는 자신 몸 하나 가누기 힘든 노인이지만 손녀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의 분노는 단순히 아들을 향한 복수, 손녀를 지키기 위한 투혼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우가 이뤄지지 않은, 기성세대들에 의해 그가 이용당했던 거처럼 또 다른 젊은이들이 사악한 기성세대에 상처 입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한국 기독교의 슬픈 자화상 <로마서 8:37>


최근 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 박진영의 구원파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에서 가장 씁쓸했던 반응이 ‘박진영이 사이비를 믿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게 한국 교회라고 별반 다를 거 있냐?’였다. 특히 전우용 역사학자는 ‘목사가 “남북 정상회담 열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입을 모아 ’아멘‘을 외치는 사람들도 비난받지 않는 나라에서’ 박진영이 구원파 신도라는 게 왜 비난받을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촌철살인 멘트를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한국 교회의 경우 계파에 속하지 않는 교회는 사이비다. 헌데 사이비가 아닌 교회의 목사들의 행실이 사이비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한국 교회는 날이 갈수록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목사가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존재다. 헌데 한국교회는 이 목사를 마치 예수처럼 섬기고 받든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꼭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기도를 드려도 주님과 만날 수 있다. 목사는 하나님과 신도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이 아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존재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지 목사의 집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목사의 힘이 너무 크다. 교회를 자기 집처럼 여기며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애쓴다. <로마서 8:37>은 여느 교회가 그러하듯 후계자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계자 요섭에게는 많은 의혹이 있지만 기섭은 그를 돕기 위해 부순 교회의 간사로 들어간다. 아내의 누나의 남편인 요섭은 영적으로 맑고 깨끗한 소유자처럼 기섭에게 비춰진다. 하지만 요섭의 성폭행 의혹들이 점점 사실로 드러나면서 기섭은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무서운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요섭이 기도를 드리고 ‘주님이 필요로 하니 교회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교회는 전도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간의 모습 잘못이 용서받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는 이런 회개를 너무 가볍게 남발하는 태도에 있다. 요섭은 스스로 기도를 드리고 셀프 회개를 받는다. 사람이 무언가를 강하게 열망하면 음성이 들린다. 그는 이 음성을 주의 음성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용서받았다 자부한다. 교회 목사들은 사고를 칠 때마다 이 회개를 무기로 삼는다. 신도들은 하나님이 아닌 목사를 믿기에 하나님과 가까운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목사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잘못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두 번째는 요섭의 모든 의혹이 드러났으나 전임목사에 의해 그의 임명이 강행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교회가 ‘목사의 집’이 되어버린 문제를 잘 보여준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목사가 아버지, 전도사가 어머니, 신도들이 아이들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신도들은 강압적인 아버지인 목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고 믿는다. 목사가 문제가 없다 말하면 문제가 없는 것이고 죄가 없다 말하면 죄가 없는 것이다. 말을 안 듣는 신도를 호통 치거나 교회에서 내보내도 문제가 없다. 여긴 목사의 집이고 가장은 목사니까. 사회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다. 자정작용은 없다. 기섭은 교회 내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교회의 문제는 외부에 알린다고 해결되기도 힘들다. 사람들의 인식은 간단하다. ‘그 교회 안 나가면 그만이잖아.’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목사의 집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을 만든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목사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이 영화의 제목이 되는 이 구절은 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승리가 무엇이냐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주는 우리를 사랑한다는데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건가. 주는 우리를 이기게 한다는데 그 승리는 대체 언제 오는 것인가. 주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 죄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고 정한 것과 다르다는 건가. 왜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고 악행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주와 동급으로 여기는 이들을 처단하지 않는 건가. 주를 믿는다는 이들의 더러운 악행을 보고 있자면 주님을 향한 믿음 그 자체에 의심이 생기게 된다. 노방전도나 종교행사에 열을 올릴 게 아니다. 한국 기독교 스스로가 깨끗하고 정당한 집단임을 보여주고 증명해야 한다. 한국은 서울에 편의점만큼 교회가 있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기독교가 대중적인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 마음의 안식처는 물론 배려, 양보, 협동, 사랑 등등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를 배울 수 있다. 특히 가정이 1차적인 교육의 기능을 상실한 요즘 시대에 종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 교회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힘들어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이기에 겪는 아픔 그리고 비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