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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지닌 두려움과 차별, 사라진 희망

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20살 때 안산에 간 적이 있었다. 외국인 관련 인터뷰가 필요했고 외국인 사는 장소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안산뿐이었다. 역에 내리고 좀 걸어다가 보니 몸이 위축되었다. ‘대한민국 맞아?’라는 생각이 들 만큼 외국인이 많았다. 마치 내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출산율과 노동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값싼 노동력 제공이 가능한 외국인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이 외국인들이 문화적으로 떨어지는 지역에서 왔기에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기 힘들다. 최근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한국문화시장에서 조선족에 대한 묘사이다. 조선족 사회는 영화 속 흉악한 범죄자로 조선족이 등장하는데 반감을 표했으나 지난 몇 번의 사건으로 한국 사회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를 뒤흔든 오원춘 사건이 그렇다. 이 사건은 한국 경찰의 무능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조선족에 대한 공포를 가져왔다.
  
문제는 조선족을 비롯한 외국인 수의 증가이다. 사회는 이들을 배척하는 분위기인데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기 위해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고 이들에 대한 차별은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사회도 조만간 혹은 현재 겪고 또는 겪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난민 문제로 심각한 골치를 겪고 있으며 극우들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미국의 흑인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그들이 당하는 차별과 가난의 고통에 분노하는 입장, 두 번째는 범죄를 일삼는 흑인들이 당하는 차별은 자업자득이라는 입장이다. 어느 입장이 옳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흑인사회가 어둠의 소굴이 되어버린 건 차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문라이트>를 보면 ‘흑인의 삶’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펜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흑인의 삶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그 삶이란 마약에 손을 대고 범죄를 일삼으며 깜방에서 아름다운 청춘을 소비하는 삶이다. 오스카 그랜트도 그런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은 청년이다. 그는 결혼하기 전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마약에 손을 댔다. 잦은 지각으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며 감방에도 들어간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일인 새해를 맞기 전날, 그는 새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삶을 딸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 그는 새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는 쇼핑센터에서 백인 친구 케이티를 사귀고, 쇼핑센터 앞에서 만난 남자를 통해 결혼에 대한 희망을 얻는다. 그렇게 ‘새해니까’라는 이유로 그의 삶은 순탄하게 진행될 것만 같다.
  
헌데 지하철에서 앙숙인 백인 남성과 시비가 걸린다. 큰 싸움 없이 끝난 일이지만 경찰이 출동하고 오스카 그랜트는 별 일 아니라며 아내와 아내의 친구를 지하철 역 밖으로 내보낸다. 친구 몇 놈이 체포당하나 지독하게 오스카 그랜트를 끌어내는 경찰. 헌데 그들은 어떻게 오스카 그랜트가 사건의 주범이라는 걸 알았을까? 이들은 같이 사건을 일으킨 백인들은 체포하지 않는다. 그들이 체포하는 건 힙합 스타일로 옷을 입은 흑인들뿐이다. 만약 오스카 그랜트의 옷이 잘 빠진 정장이었다면 그는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외의 강압적인 체포에 반발을 표하는 오스카 그랜트와 친구들. 이에 경찰은 더 강하게 그들을 억압하고 한 경찰관은 전기충격기를 꺼낸다는 게 실수로 오스카 그랜트에게 발포를 해 버린다.
 


미국 내 백인 경찰들의 강압적인 흑인수사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들도 무서울 것이다. 흑인 사회는 범죄의 온상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총기소지가 가능한 나라다. 흑인들이 갑자기 품에서 총을 꺼낼지 모를 노릇이고 자신이 먼저 발포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신체조건에서 우월한 흑인들의 위협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한 번의 발포는 하나의 생명을 앗아간다. 미국의 총기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총기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과한 진압으로 인한 죽음을 용인한다. 그런데 왜 이 과한 진압의 대상은 매번 흑인들이 되는 걸까? 백인에게는 한 번 더 말로 설득할 시간을 왜 흑인들에게는 총구를 들이대는 거로 대신하는 걸까? 
  
어느 사회나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 두려움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차별이 있고 욕망이 있다. 미국은 값싼 노동력에 대한 욕망으로 흑인들을 데려왔고 자신들과 다른 그들을 차별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그리고 유럽도 마찬가지다. 노동력과 저출산에 대한 대책으로 외국인 노동자(난민)를 받았으며 이들에 대한 차별과 두려움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어쩌면 지금 미국이 겪는 문제가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몇 백 년 후 대한민국이 겪게 될 문제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새로운 삶을 약속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깊은 상실감과 안타까움을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에 대한 반발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평등이란 희망이라는 단어가 모두에게 보장되었을 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무너질 희망이라는 걸 안다면 누가 열심히 살아갈 생각을 할까.


오스카 그랜트와 그를 쏜 경찰 요하네스 (사진출처 - 뉴욕 데일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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