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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성을 잃어버린 운동은 부작용을 가져온다

미투 운동의 문제점에 대하여


미국에서 미투 운동이 제대로 탄력을 받기 시작한 사건이 두 개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다들 잘 알고 있는 하비 와인스타인을 비롯한 헐리웃 원로들의 성추행 폭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투 운동은 큰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이와 함께 미투 운동의 탄력을 대표하는 사건 중 하나인 팝가수 케샤의 성폭력 고발 사건은 모르는 분들이 많다. 케샤는 18살 때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며 자신의 프로듀서를 고소했다. 프로듀서 닥터 루크는 자신의 결백을 항변했지만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허나 법정에서 케샤가 과거 성폭행 사실이 없었음을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증거물로 올라왔고 결국 소송은 기각되었다. 헌데 케샤는 60회 그래미 어워드에 등장, 미투 운동 열풍을 이어가는 노래를 부르며 여성 뮤지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반면 무죄를 인정받은 닥터 루크의 커리어는 박살나게 되었다.


최근 불고 있는 미투 운동의 열풍은 꽤나 바람직한 사회적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미투 운동은 권력에 가려진 성적 폭력의 폭로 형식으로 일어난 운동이며 이는 암묵적인 절대 권력을 해체하고 감시하는 내부고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회의 암적인 요소들의 뿌리를 뽑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이 미투 운동이 지닌 부작용도 상당하다. 필자는 미투 운동의 부작용 문제를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무고한 사람에게 씌우는 누명, 두 번째는 지나친 기준이다. 박진성 시인의 예는 전에 든 적이 있기에 좀 다른 예를 들까 한다. 바로 부안 중학교 교사 자살 사건이다. 한 여학생의 허위 신고를 학교와 학생인권센터는 고발당한 선생의 입장은 배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했고 결국 수학 선생은 자살하고 말았다. 이후 학생들이 진술을 번복했으나 인권센터는 일방적으로 ‘학생들이 성추행을 당한 걸 인지하지 못한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앞서 케샤의 사건을 보자. 법원에서 증거가 나왔고 기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 그녀는 미투 운동의 상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 사람을 파멸로 몬 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선택적 진실을 택한 것이다. 필자는 이 과정을 또 다른 권력의 생산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이 연대로 뭉쳐 진실이 뭐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필자는 전에 몇 개의 글에서 성폭력의 문제에 대해 호소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지원 미비, 2차 가해에 대한 보호가 부족한 점, 합의를 통한 감형을 유도하는 사회 시스템 등을 문제점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미투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게 드디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집단 운동이 또 다른 피해자를 양성한다면 이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폭력을 당한 이가 사회적으로 큰 고통을 겪는 거처럼 무고죄로 몰리는 이 역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인터넷 상의 큰 문제인 조리돌림은 물론이고 직장에서의 불이익, 심할 경우에는 해고로 내몰릴 수 있다. 박진성 시인의 경우 시집 발간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이럴 때 거짓된 미투 운동에 당한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처법은 무고죄로 맞고소하는 방법이다. 헌데 더불어민주당에서 낸 법안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앞서 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2016년 12월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 혐의 '피의자'로 인권침해를 겪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 혐의로 고소 또는 고발되는 경우, 검사와 사법경찰관 또는 법원이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나 법원의 확정 재판 전까지 해당 무고 사건을 수사·심리·재판할 수 없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주경제 기사 인용)


이 개정안에 따르면 성폭력으로 고소당한 이는 사건의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상대를 무고로 고소할 수 없다. 이는 미투 운동의 악용을 더 심화시킬 여지가 있다. 유명인들의 경우 적극적인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일반인들의 경우 무고죄로 고소할 수 없기에 사회적 직위의 추락을 경험한 후에야 법적인 조치가 가능해진다. 성폭행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거처럼 억울한 누명 역시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일본은 치한 범죄로 몸살을 앓은 적이 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치한 신고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치한법이 고쳐진 거로 알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치한을 하지 않았음에도 한 여학생의 신고로 누명을 쓰게 된다. 인정하고 벌금을 내면 끝낼 문제건만 남자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법정을 향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소유한 AV 작품들이 등장하며 그는 변태로 내몰린다. 무죄를 증명해 줄 증인이 등장하지만 재판장의 분위기는 그때의 공포를 말하는 소녀의 발언에 더 감정을 이입한다. 그리고 남자는 소녀의 ‘증언’만으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게 된다. 오랜 시간 신작을 내지 않았던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우연히 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 사람의 증언으로 인해 확실하지 않은 증거로 한 사람의 인생이 파괴되고 만다. 미투 운동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투 운동으로 고발이 있었으면 그 다음은 재판장에서 확실하게 판결을 내리면 그만이다. 헌데 미투 운동가라는 사람들은 자꾸만 여론을 움직이려고 애쓴다. 배우 조덕재의 경우 사건은 그와 상대 여배우, 두 사람만의 문제이지만 재판장에서 그는 수많은 여성단체들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첫 번째 이야기로 너무 길어지면 지루하니 두 번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성추행의 기준이다. 필자는 앞서 펜스룰에 대한 글로 욕을 오지게(?) 들어먹었다. 필자가 펜스룰을 비판한 이유는 하나다. 미투 문제를 남녀 간의 갈등으로 이끌어 가는 답변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헌데 미투 운동을 남성과 여성 간의 문제로 바꾸려는 세력들이 있기에 이런 답변이 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한국의 여성운동은 뷔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망가졌다. 이들의 운동은 여성특권에 가깝다. 즉, 성적평등이 아닌 성적특권을 주장하는 게 이들이다. 그리고 미투 운동 역시 이들에 의해 변질될 위기에 직면했다. 필자가 제일 짜증났던 말 중 하나가 ‘예쁘다는 말도 성추행이다’라는 말이다. 수많은 이성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의 외모를 칭찬한다. 그런데 그런 칭찬이 ‘평가’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성추행이라는 논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다. 저런 주장을 누가 대놓고 할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 최신 본 대자보에 상대가 성추행을 했다고 하며 적어둔 말이 저 말이었다. ‘나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더니 예쁘다고 하더라.’ 실제로 저런 논리를 펴는 이들이 있고 이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 생각이 복잡해졌다. 성관계 도중 마음이 바뀌면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논리도 필자는 억지라고 생각한다. 근데 요즘은 성관계 후에 마음이 바뀌어도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또 야하게 입은 옷차림을 바라보면 시선강간이라 한다. 이쯤 되면 남성들 입장에서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이런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많아진다면 남성들 입장에서는 섞이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 수밖에 없고 이들이 이런 이유로 미투를 제창한다면 이는 놀림감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펜스룰 글 때와의 주장과 같다. 남녀는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부당한 권력층에 대항할 수 있다. 헌데 국민들을 갈라 자신들의 표와 돈 벌이에 이용해 먹은 이들처럼 남과 여도 갈라 돈을 벌어먹으려는 이들이 이 소통과 화합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유행했을 때 등장한 말이 있다. ‘페미는 돈이 된다.’이다. 방송에서 페미니스트라고 등장하는 사람들의 주장 중 억지라고 생각되는 주장이 많다. 이들의 주장은 선을 가르기 쉬운 주장이다. 여성은 우대하고 특별하게 대하며 남성에게는 죄책감과 양보를 강요한다. 이들이 가세한 미투 운동 역시 변질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주장들이 다 받아들여지면 우스갯소리로 펜스룰 말고는 답이 없어진다. 잘못된 운동가들의 특징은 항상 극단을 향한다. 그 향하는 극이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을 안겨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권력들의 만행을 폭로하고 사회적 약자였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준다는 점은 큰 의의다. 허나 조리돌림으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의 탄생, 지나친 기준 마련으로 성별 갈등을 유도한다는 점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미투 운동을 이용하는 이들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미투 운동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가해자에 대한 비난보다는 피해자를 지지의 마음가짐이다. 피해자를 지켜주는 게 미투 운동의 가장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제대로 사실을 폭로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에게 보낼 경멸과 냉소가 담긴 사회적 시선이 두려워서이다. 이들을 지지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허나 가해자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참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조리돌림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 만약 그 사람이 거짓된 미투 운동으로 누명을 썼다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결과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자세이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해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한다. 때로는 한 사건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또 다른 전말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견해를 완전히 뒤엎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증거들이 등장하는 재판의 과정이 참으로 중요하다. 물론 재판의 결과에 100%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재판이 항상 올바른 결정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진 않기 때문이다. 허나 재판 중에는 모든 증거가 등장하기에 그때 비판을 가해도 늦지 않는다. 미투 운동이 여론전의 성격을 띄면 이 역시 또 다른 권력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의 횡포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운동이 거꾸로 하나의 권력이 되어 횡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소리다.


세 번째는 걸려들을 줄 아는 비판의 자세이다. 인간은 은근 집단지성에 약하다. 인터넷 댓글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는 게 인간이다.(특히 네이버 기사 베플의 경우 이런 영향을 더 크게 준다고 생각한다.) 미투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상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틀린 사실도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투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여성의 아픔을 모른다며 상대를 몰아세운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비판의 자세가 필요하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이 운동의 성격을 집단적, 강압적, 성차별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이들을 배제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동의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리더로 세운다면 미투 운동은 페미니즘 운동처럼 변질을 겪고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미투 운동의 성격을 남녀의 대결로 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미투 운동의 창설자인 타라나 버크는 미투 운동의 성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투 운동은 배타적 대립을 보여서는 안 된다. 미투는 성폭력을 겪은 이들 모두를 위한 것이지 여성운동이 아니다....... 남자들은 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매우 구체적이고 신중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이 폭력이라고 말한다면 이에는 법적인 의미와 파문을 불러올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힐링과 정의를 얻기 위해 학대나 가해를 가한 사람의 이름을 크게 소리치고 싶어 한다. 이를 이해한다. 다만 이보다 더 긴 연정과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최근 미투 운동의 변질은 미투 운동을 페미니즘의 연장선으로 보려는 움직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투는 엄연히 성폭력, 권력에 의한 억압을 받은 모든 이들을 위한 운동이다. 남성도 미투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의 열풍은 급격히 사그라들 위험에 처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선을 가르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전개하며 성적인 폭력보다는 남녀 사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냥과 라이터 없이 불을 붙이는 일은 힘들지만 이 힘들게 피어난 불을 꺼 버리는 건 너무나 쉽다. 불은 장작을 공급해야 그 열기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장작을 한 집단만이 대신하려고 한다면 힘들게 피어난 불은 너무나 쉽게 꺼져버릴 것이다.


P.S. 지난 글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요즘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참 복잡하더군요. 가장 복잡한 문제가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순되는 지점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모순되는 지점을 많이 찾아내서 기다 아니다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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