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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받아들이기 힘든 ‘악의 평범성’


1960년 5월, 나치 전범 중 하나인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재판 과정을 취재한다. 이 과정에서 한나는 묘한 생각에 빠진다.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악랄한 나치인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강한 카리스마도, 피에 굶주린 악령의 모습도, 지독한 편견에 빠진 고집불통의 모습도 하지 않았다. 이 평범한 남자가 ‘절대 악’인 나치라고? 한나 아렌트의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녀에게 아이히만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이었고 프랑스에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다. 무사히 미국으로 도망치기 전까지 그녀는 나치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을 괴롭혔던 그 나치 전범이 저런 평범한 중년 남자라니. 재판을 지켜보던 한나는 결론을 내린다. 악은 평범하다. 그 이유는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내내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한다. 그 명령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시키는 명령임에도 그는 ‘따랐다’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한나는 말한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공무원으로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이다. 국정농단 당시를 생각해 보라. 수많은 공무원들이 나라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했다. 그들은 그저 명령을 따랐고 그 명령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명령이니까 따른다. 이런 단순하고 성실한 자세가 비극을 낳았다. 한나 아렌트는 ‘악이 특별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얼굴에서부터 풍기는 기운이 악하고, 행실이 더러워야 악당이 아니다. 악은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당시 나치는 히틀러를 중심으로 학살을 자행했고 수행원들은 이를 ‘아무런 생각 없이’ 따랐다. 만약 그들이 명령에 대해 생각하는, 그러니까 사유의 자세를 지녔더라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차마 시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그녀는 아이히만의 범죄를 유대인에 대한 범죄가 아닌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지으며 그를 이스라엘 법정에 세운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이는 ‘동지들에게는 선을, 적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 정의다’라고 말한 플라톤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간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정의는 적과 동지를 나누지 않는 데에서 피어난다. 적이라는 이유로 더 강한 벌을 내리고 고통을 준다면 그건 악인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그녀의 이 주장은 유대인 사회에서 큰 비판과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대학에서조차 수업에 들어가지 말 것을 종용받는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수업에 들어가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 학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낸다.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악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사유하는 인간’만이 이 악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그녀의 생각은 스승 하이데거와 연관되어 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에도 불구 이성 그리고 정신적인 사랑으로 이어진 사이였다. 하이데거는 철학이 근원적 사유임을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사유’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허나 그랬던 스승이 나치에 협력하자 한나는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다시 스승을 만나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나 스승은 명확한 답을 내지 않는다. 여기서 한나는 알게 된다. 다수가 침묵하면 소수의 ‘사유’는 묻히고 만다. 그러기에 나는 말해야만 한다. 악은 평범하다고. 그 평범한 악을 내버려 둔다면 사유하지 않는 개인들은 악에 물들어 버린다고.


강의를 끝낸 그녀의 앞에는 유대인 친구가 서 있다. 그는 한나에게 말한다.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제발 그만하라는 한나의 외침을 배신하듯 친구는 계속 한나를 책망한다. 그녀도 유대인이다. 수용소에 갇혔고 나치 때문에 독일에서의 삶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녀에게도 ‘나치’는 아픔이자 고통, 죽이고 싶은 악이다. 하지만 악이 나치처럼 ‘특별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세상에 모든 평범한 ‘악’은 활개를 친다. 학력이 높다는 이유로, 점잖다는 이유로, 국가에서 일을 한다는 이유로 악이 아니라 여기고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명령에 ‘사유’하지 않은 채 따르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그 누구보다 ‘강인한’ 여성인 한나 아렌트의 삶을 뚝심 있게 보여준다. 그녀의 주장은 타협을 볼 수도, 포기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이미 2차 대전은 끝났고 비극은 막을 내렸다. 세상이 나치를 비롯한 ‘악의 잔당’들을 처단하자는 분위기인데 찬물을 끼얹는 주장을 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사유가, 또 다시 등장할 수 있는 평범한 악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의 재미는 높지 않다. 사실을 영화적인 구성없이 담아냈기에 전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수많은 영화제에 초대된 이유,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의 정신이 오늘날 꼭 필요한 정신이라는 점에서 꼭 한 번쯤 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다.


p.s. 제가 쓰면서도 좀 어렵게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의 평범성을 제가 왜 중요하다고 강조하느냐면 국정농단 사건 때문입니다. 사유가 부족해서 나라 전체가 흔들렸고 악을 특별하다 여겨 오히려 의심을 나쁘다 말했던 사건이죠. 전 한국사회가 너무 외우라, 명령을 따르라, 빨리 시행하라를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 모두에게 꼭 한 번쯤 보라고 권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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