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임새 있는 한 방을 노린다, <인비저블 게스트>
스페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기억나는 감독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귀향>,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등 그의 대표작들은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10년쯤 뒤에는 오리올 파울로 감독이 스페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더 바디>에 이어 <인비저블 게스트>는 스페인산 스릴러의 정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여자친구, 범인으로 몰린 남자, 그들의 숨겨진 과거를 액자식 구성으로 엮은 이 영화는 잘 짜인 추리소설 한 편을 읽은 것만 같은 철저함과 쾌감을 준다. 반전은 좋지만 스릴감이 약하거나 스릴감은 강하다 구조적인 면에서 완성도가 약해서 아쉬움을 주었던 유럽산 스릴러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전주영화제 당시 좋은 반응을 얻어 개봉도 전에 한국판 리메이크가 확정된 작품이기도 하다.
북유럽 최강의 몰입감, <헤드헌터>
<헤드헌터>는 노르웨이 영화라는 점에서 의문이 들 것이다. 북유럽 영화들이 보여주는 느린 연출이 이 영화에도 담기지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헤드헌터>는 그 어떤 헐리웃 영화보다도 더 긴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헤드헌터인 로저는 고가의 미술품을 훔치고 위작을 걸어두는 악취미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소개로 클라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로저는 그가 루벤스의 사라진 명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이 명화를 훔친 뒤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허나 마지막을 꿈꾸던 그때, 모든 일이 망쳐지고 그는 사람 사냥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임원이나 전문인력을 업체에 소개해주는 헤드헌터가 사람의 머리를 노리는 헤드헌터에게 쫓기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로저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도망을 긴박감 넘치게 표현해낸다. 우스갯소리로 보고 나면 작은 키가 오히려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감독 모튼 틸덤은 이 영화의 성공 후 <이미테이션 게임>, <패신저스> 등을 만들며 헐리웃 영화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명작 스릴러, <양들의 침묵>
스릴러 장르의 영화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긴장감의 위력이 감소하기 마련이다. 긴장감을 유발해내는 영화의 기술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으며 음악이나 장치는 시대가 지날수록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양들의 침묵>을 능가할 만한 스릴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아카데미 주요 5개 부문을 수상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작가 토마스 해리스의 한니발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옮기는데 성공하였다. 이 영화는 잔인하지만 더럽지 않고 무섭지만 가볍지 않다.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한니발 렉터는 희대의 살인마지만 격조 있고 우아하다. 특히 그가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양들이, 양들이 침묵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안소니 홉킨스는 이 영화에서 총 15분 등장하는데 이 15분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절제절명의 위기에 맞서는 짜릿한 역습,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국가나 정치권이 권력을 이용, 국민을 통제하는 스릴러 영화들은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의 경우 너무나 큰 권력과의 사투를 그렸기에 허무하거나 엉성하게 결말을 내리는 케이스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탑 건>, <트루 로맨스>, <크림슨 타이드>, <더 팬>, <맨 온 파이어> 등 주옥 같은 장르영화들을 만들어 온 토니 스콧 감독에게 이런 소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우연히 국가권력의 음모에 말려들어 목숨을 위협받게 된 변호사가 정보 브로커와 함께 그들과 맞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장점이라면 이 ‘역습’의 과정이 꽤나 치밀하고 짜릿하며 쾌감을 줄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작품들과는 달리 중반부터 반격을 갈고 닦은 덕분에 아주 강력한 한 방을 보여준다.
반전보다 치밀한 영화의 설계, <아이덴티티>
<아이덴티티>는 <식스 센스>, <유주얼 서스펙트>, <프라이멀 피어>, <파이트 클럽>과 함께 5대 반전영화로 뽑히는 작품이다. 90년대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준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게 반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반전집착증은 영화 그 자체가 주는 재미나 구조적인 흥미는 뒤로한 채 반전에만 열을 올리는 나쁜 현상을 만들어냈다. <아이덴티티>는 반전 그 자체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영화이지만 이 반전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높은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설계다. 10명의 외딴 사람들이 모인 모텔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과 한 남자의 정신감정을 교차로 보여주는 장면은 모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두 이야기 모두에서 높은 몰입감과 연관성을 주입시키는데 성공한다. 덕분에 보는 동안에는 이야기의 스릴감에 빠져들다가 영화가 끝나면서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와 영화가 구성한 설계에 빠져들고 다시 되짚어 보는 마성을 내뿜는다.
미끼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 <곡성>
<곡성>의 흥행은 이 영화보다 더 기이한 현상이었다. <추격자>로 나홍진 감독은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으나 이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황해>가 200만 관객으로 크게 흥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곡성>의 흥행여부는 빨간불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을 현혹시키는데 성공했다. ‘뭣이 중헌지 알지도 못함서’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이 영화는 대체 무엇인가 고민하는 관객들이 많았음에도 불구 영화 그 자체가 가진 재미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곡성>은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 구석이 있지만 마치 불량식품처럼 계속 보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연쇄사건, 점점 변해가는 딸,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 수상한 여인 등등 알 수 없는 묘한 미스터리로 끝없이 미끼를 던진다. 어쩌면 이 영화의 정체는 뛰어난 낚시꾼일지도 모르겠다.
히치콕 최고의 영화, <현기증>
영국의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가 진행한 '위대한 명화' 투표에서 <현기증>은 영원한 명작 <시민케인>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알프레드 히치콕하면 샤워씬으로 유명한 <싸이코>, 새가 사람을 공격한다는 독특한 발상의 <새>, 관음증의 절정을 보여준 <이창> 등의 영화들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대표작은 <현기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좋은 시나리오와 뛰어난 연출은 시대의 영향에 상관없이 높은 몰입감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해낸다.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는 사립탐정과 매혹적인 여인이 얽혀 펼쳐지는 이 영화의 사건은 히치콕의 그 어떤 영화보다 시나리오적인 재미에서 탁월하다. 무엇보다 첫 오프닝에서 강렬하게 묘사되었던 현기증의 감각이 결말까지 유지되는 구조적인 완벽함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무기가 아닌가 싶다.
악을 표현하는 방식, <수집가>
악에게 경멸을 느끼고 치를 떨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악이 얼마나 독한지 보여줘야만 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악이 잘 살고 행복한 결말을 택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이 그러했듯 때로는 악이 최종적인 승자가 되어 그 악랄함과 악독함에 치를 떨게 만들 필요가 있다. 거장 윌리엄 와일러의 <수집가>는 인간을 수집하는 뒤틀린 욕망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지닌 독점욕과 이상성의 위험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영화는 자극적이고 지저분한 장면을 택하는 대신 대화를 통한 세세한 심리묘사를 통해 프레디라는 남자가 지닌 잘못된 욕망을 조명한다. 장면에 집중하기보다는 연극적인 구성을 통해 점점 몰입감을 높여나가는 방식이 일품이라 할 수 있다.
희대의 악녀를 보게 될 것, <나를 찾아줘>
한때 한국 드라마는 ‘악녀’가 대세였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독한 여성 캐릭터가 인기를 끌었다. 헌데 이 영화의 개봉 후 그 어떤 ‘악녀’도 에이미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나를 찾아줘>는 한 미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무조건적인 싸이코 스릴러가 아니다. 원작을 쓴 길리언 플린이 직접 쓴 각본은 닉과 에이미, 두 부부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뒤틀렸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 영화의 무서운 점은 여기에 있다. 차라리 싸이코 스릴러라면 좋았을 것이다. 미친 여자 하나가 남편을 엿 먹이기 위해 펼치는 이야기라면 무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왜 에이미가 닉을 상대로 이런 ‘게임’을 벌이는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녀를 더욱 무서운 ‘악녀’로 만든다. 닉과 에이미, 이 두 부부의 피보다 진한 게임을 보고 있자면 2시간 반이라는 상영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있을 것이다.
밀려오는 광기에 취하다, <어둠의 표적>
뉴스를 보다 보면 시골에서의 삶이 도시보다 더 폭력적이고 강압적임을 느낄 수 있는 소식들을 발견하곤 한다. 시골은 도시보다 더 폐쇄적이고 집단적이다. 그리고 그 집단에서 벗어나거나 집단에 반하는 행동에는 조직적인 폭력으로 응수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심한 수학자 데이비드는 도시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아내 에이미의 고향인 작은 시골마을을 향하나 그곳에서 더 큰 폭력과 마주한다. 영화의 재미는 이들의 폭력에 주구장창 당하던 데이비드가 광기로 맞서면서부터 시작된다. 앞서 주인공에게 고구마를 주구장창 먹이던 영화는 ‘폭력의 거장’ 샘 페킨파가 원하는 무대에 접어들면서 데이비드 내면의 광기를 폭발시킨다. 참으로 실험적이고 충격적이나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폭력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만드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