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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견> -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영화는 전장과 같은 것이다. 사랑, 미움, 액션, 폭력, 그리고 죽음. 요컨대 감정이다’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사무엘 풀러 감독이 위와 같이 말한 영화의 정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흥행하는 영화들의 공통점은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가 크다는 점이다. 감정에 대한 폭력이 큰 영화들은 더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이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극적인 걸 원한다. 인간의 본성이 자극을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차 대전 시기에 헐리웃 영화계는 암흑기였다. 사람들이 영화보다 전쟁에 더 큰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흥행을 노리는 영화들이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을 피해 개봉하는 걸 생각해 보라. 인간은 자극을 좋아하고 더 큰 자극에 끌린다. 요즘 청소년들이 극장에 잘 가지 않는다는데 그 이유가 2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볼 수 없는 걸 못 참기 때문이란다. 이런 감정에 대한 자극을 잘 아는 사무엘 풀러 감독은 <흰개>라는 철학적이고 복잡한 소설을 <마견>이라는 재미있는 영화로 바꿔놓았다.

  
영화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철학자 로맹 가리 대신 그의 아내였던 진 세버그와 비슷한 여성인 줄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진 세버그와 줄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은 온정이 있으며 변화의 가능성을 꿈꾼다. 그녀들은 로맹 가리처럼 복잡하고 다층적인 생각에 빠지기 보다는 자신이 애정을 품은 대상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캐릭터의 변화는 구조적인 단순함을 가져온다. 충격적인 결말을 모른다면 영화는 가슴 따뜻한 역경의 극복을 보여줄 것만 같다. 여성에 개에 헌신적인 사육사까지. 얼마나 멋진 조합인가. 표류하는 사고들을 바라보는 듯했던 <흰개>의 전개는 단순화된 캐릭터들에 의해 영화에 어울리는 골격을 지닌다. 이런 변화가 가장 크게 나타난 인물은 사육사 키스라고 할 수 있다. <흰개>의 키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맹 가리의 친구, 레드처럼 흑인들의 투쟁을 통한 백인 사회의 전복을 꿈꾸는 인물이다. 레드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흑인병사들을 키워내 전복을 꿈꾼다면 키스는 백인들이 길러낸 흰 개를 개조시켜 백인들을 공격하게 만든다. 키스라는 인물은 일관되게 백인을 혐오하는 블랙모슬렘이지만 그 심리의 양상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 재단하기 어렵다. 반면 영화의 키스는 한결 같은 캐릭터다. 그는 개를 불쌍하게 여기며 그가 받은 잘못된 훈련과 편견을 고쳐내길 원한다. 그는 개가 훈련장을 탈출, 흑인 남성을 물어 죽여 주인마저 포기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가능성을 믿고 훈련을 반복한다. 
 


<흰개>와 <마견>의 결말은 같다. 하지만 이 결말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흰개>는 키스가 개를 훈련시켜 백인을 공격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증오라는 감정의 전이를 말하는데 이는 증오는 훈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 훈련이란 건 가정, 사회, 매스컴을 통해 교육되는 편견이다. 반면 <마견>은 키스의 훈련으로 흑인을 공격하지 않게 된 개가 사육장 주인 잭을 공격한다. 이는 흑인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대신 그 대상이 자신을 이렇게 훈련시킨 원주인(뚱뚱한 할아범-그리고 불행하게 그를 닮았다 공격당하는 잭)을 닮은 잭을 공격함으로 차별, 차별을 가져오는 증오라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미묘한 차이는 <흰개>에 대한 사무엘 풀러의 해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원작에서 로맹 가리의 흑인 친구 레드는 베트남전을 혁명의 기회라 여긴다. 그는 아들 필립과 마들렌을 군대에 보내는데 그 이유는 흑인 지휘관과 병사들을 길러내 미국 내에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그의 이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 확신한다. 참전 경험이 있는 로맹 가리는 전장에서는 흑백 갈등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전장에서 진정한 우정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는 생존이 우선이다. 그러기에 전우들은 생사를 함께 하는 소중한 존재다. 이 순간 피부색으로 인한 갈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큰 자극이 더 작은 자극에 대한 관심을 지워버리듯 적이라는 더 큰 갈등의 존재가 전장에 나타나기에 백인을 향한 흑인의 증오는 사라진다.
 


작품은 그 새로운 대상으로 아시아인을 말한다. 베트남전에는 베트남인이 새로운 대상으로 떠오르듯 미국 내에서도 아시아인이 새로운 갈등의 대상처럼 부각된다. 결국 새로운 갈등의 대상이 등장하여야 기존의 갈등은 봉합되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한 사무엘 풀러 감독은 이 시점에 반기를 든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인간이 지닌 증오라는 감정과 이에 따른 편견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고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훈련을 통한 감정의 전이보다는 훈련을 통해 그 감정을 지워낸 줄 알았건만 결국 다른 대상을 증오하고야 마는 결말을 택한 게 아닌가 한다. 도시가 아닌 시골 사람들의 본성이 더 잔인하다는 걸 보여준(마치 <어둠의 표적> 속 더스틴 호프만이 도시 생활에 지쳐 시골로 내려오니 더 큰 똥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처럼) 그의 영화 <네이키드 키스>를 생각해 보라. 이 작품에서 사무엘 풀러 감독은 감시와 정화의 기능이 떨어지는 시골에 방치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마견>을 통해 <흰개>가 제시한 전이보다는 바뀌지 않는 본성이 증오와 차별의 본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본다.
  
증오라는 감정은 죽일 듯이 싸우다가 엄마 이름이 같다며 화해하는 <배대슈>처럼 쉽게 꺼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개가 훈련소에서 탈출해 다시 흑인을 물어 죽였을 때, 키스는 포기하려는 줄리를 설득한다. 그들은 틀을 깨고 싶다, 잘못된 정신에 굴복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그때의 감정은 동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줄리는 강간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개를 죽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동정의 감정은 결국 개가 잭을 공격하는 결말에 이르게 만든다. 키스와 줄리는 훈련을 통해 흑인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했으나 또 다른 공격의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걸 확인함으로 더 큰 절망만 얻은 것이다. <흰개>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 대상은 진 세버그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3부에 등장한다. 흑인 인권 운동의 홍일점처럼 포장된 그녀를 질투하는 흑인들은 집에 돌을 던지고 개를 죽인다. 헌데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고가 흑인 인권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흑인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도와주길 원한다. 그녀의 이런 생각은 스스로를 틀에 가둔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피부색의 틀에 말이다. 진 세버그는 흑인을 동정하기에 그들을 위한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참여하길 원하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도 눈을 감아준다. 로맹 가리는 화가 나 피부색이 아닌 그 사람을 바라보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를 혐오스럽게 바라본다.(책 뒤의 해설에서는 이 문제로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동정이라는 어설픈 감정은 색깔이란 걸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몇 달 전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글 하나가 있다. 가난한 아이인줄 알고 후원해 줬건만 비싼 선물을 바랐다고 후원을 끊어버렸다는 이야기가 갑론을박을 낳았다. 동정은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며 재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범위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편견과 증오를 품게 된다. 어금니 아빠로 유명한 살인자 이영학은 학창 시절 성범죄를 저질렀으나 장애인인 그를 불쌍하게 여긴 학교 측의 배려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때 품었던 동정과 장애라는 긍정의 편견이 한 명의 괴물을 탄생시켰다. 부정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타고난 기질이 있다.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의 마음이 편견과 증오로 똘똘 뭉쳐 있다면-어린 시절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면 이는 고치기 쉽지 않다. 늙은 노견을 바꾸려다 실패한<마견> 속 주인공들처럼 사람을 바꾸는 일도 쉽지 않다. 노숙자들을 위한 정책이 매년 새롭게 등장해도 서울역에 노숙자가 넘쳐나듯, 교도소에서 인권을 외쳐 사회 교화 훈련을 지켜도 재범자가 넘쳐나듯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흰머리 짐승도 바꾸지 못하는데 하물며 검은머리 짐승은 어떻겠나. 사람을 고쳐 쓴다는 건 무능한 남편과 결혼하고서 그 남자가 바보 온달이기를 바라는 평강 공주 콤플렉스처럼 비루한 행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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