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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룬 영화 8편

<리멤버 미>, <이별까지 7일> 外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삶이란 시작과 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고민을 안겨주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탄생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하다. 오늘 선정한 8편의 영화들은 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리멤버 미>


<리멤버 미>의 결말은 작품의 시작 앨리 어머니의 지하철 역 살해 장면처럼 생뚱맞다. 하지만 이 영화에 깔려 있는 죽음의 순간들을 이해하면 어설픈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삶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고 말한 샤르트르의 말처럼 모든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다만 이 순간이 언제 어떻게 어떤 선택에 의해 또는 환경에 의해 다가올지 모른다. 주인공 타일러와 앨리는 이런 아픔의 순간들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이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때문에 더 값진 시간으로 기록된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은 아버지 찰스가 동생 캐롤라인의 학예회에 참석하지 않자 분노한 타일러가 회사로 찾아가 호소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그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한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 여기고 망설이는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후회로 가득한 미래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잊힌다는 건 가장 큰 슬픔 <두꺼비 기름>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의 감독 데뷔작인 <두꺼비 기름>은 유치하고 조잡한 느낌이 강한 영화다. 첫 영화 데뷔작이라는 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꽤나 인상적이다. 완벽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던 타쿠로는 성실한 아들 타쿠야가 죽자 슬픔에 빠진다. 영화는 아들의 죽음과 의문의 연락을 통해 죽음을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망각이라고 말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죽은 자들은 현세에서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린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가장 두려운 건 아무도 죽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혹은 내가 그 사람을 잊어버리게 될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는 잔잔하고 느리지만 강하게 망각의 두려움을 호소한다.



쓸쓸하고 슬픈 공허함 <고스트 스토리>


기독교에서는 흔히 죽음에 대해 천국에 갔다며 그곳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을 땐 주님이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일찍 데려갔다며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위로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고스트 스토리>는 스토리만 보자면 멜로 영화계의 명작 <사랑과 영혼>이 떠오른다.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그 주변을 떠도는 스토리가 같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감성을 보여준다. 귀신의 관점을 통해 죽음으로 인한 쓸쓸함과 슬픔 그리고 공허함을 안겨준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귀신이 된 남자가 이웃집 귀신과 마주보는 장면이다. 이웃집 귀신은 말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런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많은 예술작품들은 남겨진 자들의 슬픔과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죽은 자의 감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소라닌>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간되었을 당시 독자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에 매료되어 그의 감성에 빠져 주인공처럼 자살을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사회적인 유명인이 죽을 경우 이에 동화되어 자살 사건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킨다. 허무함에 빠져 자살하는 이들을 보고 자신도 허무함에 자살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반대로 강한 열망을 지닌 이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당할 경우 이 죽음이 남겨진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경우도 있다. <소라닌>은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밴드를 포기한 남자친구 타네다가 죽자 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대신 밴드 보컬이 되는 여자친구 메이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 특유의 잔잔한 감성과 죽음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누르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투쟁이 인상적인 영화다.



죽음의 순간을 배우는 방법 <몬스터 콜>


<몬스터 콜>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탄생시킨 괴물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판타지 감동 드라마다. 코너는 어머니의 죽음이 꿈속에서 손을 잡지 못하는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 때문에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괴로워한다. 영화는 죽음의 순간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는 슬픔을 감추고 기쁨만을 내세울 걸 강요하거나 또는 슬픔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자체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도 교육에서 온다는 교훈을 영화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환상적인 색채로 눈물 나게 풀어낸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이별까지 7일>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골방에 혼자 틀어박혀 사시는 증조모나 증조부가 계시곤 했다. 자식들이 정말 극진히 돌보아 병원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 사신 분들이 말이다. <이별까지 7일>은 뇌종양 말기로 7일 시한부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가족들의 사투에 가까운 노력을 다루고 있다. 두 아들과 아버지는 병원마다 틀렸다고 말하면 포기하고 어머니와 마지막을 보낼 만도 하건만 끝까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다. 단 1%의 희망이라도 있길,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지 못한 어머니와의 순간을 보낼 시간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며.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죽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라. 죽음의 기한도 결국 인간이 정하는 것이다. 신이 데려가기 전까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깊은 울림을 영화는 보여준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아도 <아이 오리진스>


불교에는 윤회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현세의 덕에 따라 사람으로 환생할지 짐승으로 환생할지 정해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야 다음 생도 행복하다는 소리다. <아이 오리진스>는 이런 윤회 사상을 과학과 멜로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낸 영화다. 영화는 과학적인 이론으로 대변되는 이안과 종교적인 신념으로 대표되는 소피의 사랑을 다룬다. 이안의 실수로 소피가 죽고 이안은 실의에 빠진다. 헌데 평소에 인간의 눈동자에 관심이 많았던 이안은 눈동자가 같은 사람이 환생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과학적인 이론을 펼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 어디엔가 소피의 환생도 있을 거라고 여긴다. 가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정말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시공간을 초월한 로맨스를 이야기한다. <아이 오리진스> 역시 마찬가지다. 강렬한 사랑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아도 결국 다시 이뤄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가 다시 부활한다면 <그린 마일>


인류 역사상 죽음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인물을 뽑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뽑을 수 있다. 예수는 십자가의 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린 마일>을 삶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검은 예수와 교도관을 통해 풀어낸 영화다. 존 코피는 두 소녀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으나 교도관 폴과 그의 동료들은 존이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존 코피의 신기한 능력을 경험하고 사형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폴은 고뇌에 빠진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사형 집행을 앞둔 폴이 존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다.


그는 하느님이 왜 존을 죽였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되느냐고 물어본다. 그의 이 고민은 예수의 죽음을 등에 짊어진 모든 종교인들이 가지는 고뇌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보고 다섯 번을 울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누군가의 피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그 기적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고민한다. 인간은 결국 죄를 저지르고 용서를 비는 존재다. 루이스 브뉘엘의 <비리디아나>처럼 지금의 인간은 예수마저 등을 돌릴 만큼 더럽고 저급하며 세속에 찌든 거처럼 보인다. 존 코피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인생을 논할 친구가 없고 추잡한 사람들이 보기 힘들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동시에 그는 어둠이 두렵다고 말한다.


예수는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그 위에서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의 더러움에 치를 떨지만 내세를 향한 죽음이라는 그림자 앞에 두려움에 떤다. 그래서 영원한 삶도 두렵고 동시에 죽음도 두렵다. 종교인만이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이라는 순간에 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를 보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동시에 진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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