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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

기사를 하나 보았다. 인천 영흥도 낚싯배 전복 사건. 사망자가 13명 나온 슬픈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댓글들은 더럽기 짝이 없다. 세월호 사건을 들먹이면서 대통령에 대한 비난, 세월호처럼 특별법 만들어 줘라 등등 그들의 ‘죽음’을 비꼬고 조롱하고 있다. 집단에 의한 이분법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의 아픔은 크지만 상대의 아픔은 작다. 그런 사람은 평생 자기만 알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다 막상 자신에게 아픔이 닥치면 후회한다. 자기가 실컷 주장한 이분법에 스스로 갇히는 일이 생기면 말이다.


‘일본의 아픔’이라는 소재는 참으로 예민하다. 일본은 전범국이며 아시아는 물론 세계 여러 국가들에게 씻기 힘든 아픔을 남겼다. 최악인 건 이들이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행위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피해국인 우리는 ‘우리도 태평양 전쟁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며 슬퍼하는 일본에 분노한다. 그 분노는 옳다. 사과하는 법을 모르며 먼저 망각을 말하는 이들에게는 화를 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상, 그리고 태도를 바라보는 눈은 좀 더 정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스즈라는 한 소녀가 여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태평양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히로시마 소녀가 산 너머 동네 청년인 호죠와 결혼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전쟁을 다룬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하다. 물론 배급, 전쟁에 관한 이야기 등 전쟁 중이라는 걸 알려주는 배경은 있으나 주인공들의 삶은 이와 멀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스즈가 그린 그림을 헌병이 ‘간첩행위’로 보고 그 집으로 찾아와 항의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가족들은 헌병이 간 뒤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에게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이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멍한 스즈가 멍을 때리다 잡혀왔다는 사실이 웃기기만 하다.


이 웃음이 눈물로 바뀌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폭격이 마을까지 다가오면서 배급량이 줄어든다. 전세가 나쁘게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돌며 공습에 맞춰 싸이렌이 울린다. 그리고 스즈의 한 손이 사라진다. 뒤늦게 반응이 오는 폭탄에 대해 배웠지만 방심한 사이 손이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녀가 데리고 나왔던 조카는 손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스즈는 참으로 공주님 같았다.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우며 그림을 그릴 때면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 작품의 사랑스러운 그림체처럼 그녀는 귀엽기만 하다. 하지만 이 귀여운 소녀가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인식할 때, 작품은 점점 색을 달리한다. 그림체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그림체가 잔혹해지면 그 아픔은 더 크게 다가온다.


작품은 몇 가지 포인트로 전쟁을 보여준다. 점점 줄어드는 밥의 양, 스즈의 표정 변화, 고풍스러운 옷에서 점점 편하고 추레한 옷으로 바뀌면서 전쟁으로 인해 달라진 일상을 자극 없이, 하지만 아리게 보여준다. ‘결국 일본이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 아냐? 우리도 고통스러웠다 이 이야기잖아’ 이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일본은 말하고 있다.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그래서 스즈는 눈물을 흘린다.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그리고 분해서. 이 ‘분하다’는 건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에 대해 모르고 살아온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분노다. 스즈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환했다. 전쟁이 왔다는 건 알았지만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왜 나는 이리 태평하게 살아온 것일까. 전쟁의 고통이 모든 것을 앗아갈 때까지 왜 모르고 있었던 걸까.


이 작품은 ‘우익’이 아니다. 우익은 전쟁을 미화시킨다. 희생을 추모하며 용기를 말한다. ‘이들이 있었기에 일본이 강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라며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작품은 그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갈 한 구석을 찾고 싶었던 소녀’가 ‘어디에도 살아갈 한 구석을 찾지 못하는 여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가 우익이었다면 ‘과거’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일본, 강한 일본, 다시 힘을 ‘키워야’ 하는 일본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미래’를 바라본다. 찢기고 벗겨지고 뭉개져도 살아갈 수 있는 힘, ‘사랑’을 너무나 잘 담아내고 있다.


스즈의 곁에는 남편이 있고, 남편의 식구들이 있다. 비록 한 손은 없어졌지만 그녀에게 ‘또 다른 손’이 되어줄 이들이 있기에 그녀는 살아간다. 그리고 결말에서 그녀는 자신이 받았던 거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손’이 되어주려 한다.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연대다.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간. 사람의 곁에는 항상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의 아픔을 우리는 무조건 품어주어야만 되나. 우리의 아픔은 던져버리고 일본을 품고 나아가는 연대를 실현해야 된다는 소리인가.


앞서 스즈의 눈물은 인식이었다. 현실을 인식하고 나서야 슬픔을 발견한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일본에게는 이런 인식이 없다. 일본인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들이 행하는 잘못된 교육에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했던 스즈의 모습과 같다. 이것저것 신경 쓰기 싫으니 나만 바라보겠다. 이런 사고를 가진 일본인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그들의 아픔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 죽음을 조롱당하고 욕먹을 이유는 없다. 잘못은 일본의 정부이지 이에 피해를 보는 국민이 아니다.


p.s. 이용철 평론가는 개인적으로 참 평이 별로인 게 왜 자꾸 영화평에 정치적인 요소를 가져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우익 영화도 아닙니다. 다수의 순진함으로 덮을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는 말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역사를 덮고자’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다양한 영화평을 존중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평하자면 평론가 스스로 영화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막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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