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빠져들기 힘든 문학청년의 세계

<잉글랜드 이즈 마인>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라디오헤드, 블러, 오아시스 등 세계적인  뮤지션의 음악적 스승이자 브릿팝과 인디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영국 밴드 ‘더 스미스’(The Smiths)의 탄생 스토리가 담긴 영화이다. 밴드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귀가 즐거운 음악영화를 생각하기 쉽다. 빈티지한 느낌의 포스터가 그런 감성을 더 불러일으킨다. 만약 음악적인 재미를 위해 극장을 찾았다면-그러니까 <비긴 어게인> 또는 <본 투 비 블루> 같은 감성을 생각했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영화는 밴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더 스미스의 보컬 모리세이의 음악 이야기보다는 방황하는 청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티븐 패트릭 모리세이는 ‘브릿팝의 셰익스피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작사 능력에 있어 뛰어난 문학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영화의 초점은 이런 스티븐의 음악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티븐은 여느 청춘이 그러하듯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는 세무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지니고 있으나 이 일에 전혀 흥미가 없다. 신문에 음악 평론을 기재하고 있지만 이는 독자란에 불과하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블로그 또는 객원기자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수준이다. 스티븐은 문학적인 천재성을 살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직접 세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재미를 준다. 첫 번째는 스티븐의 성격이다. 그는 고지식하고 내성적이면서 자기 과신과 확신이 심한 인물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상치 못한 유머로 변질되는 특징은 비교적 정적인 영화에 활력을 부여한다. 특히 직장 동료인 크리스틴에게 철저하게 철벽을 치는 장면이나 직업소개 담당자에게 확신에 차 훈계하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낸다. 큰 키에 훈훈한 외모를 지닌 배우 잭 로던은 이 온도차가 심하지만 귀여운 막내아들 느낌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낸다. 두 번째는 스티븐이 느끼는 고민이 가져다주는 공감이다.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할 수 있는 일은 하기가 싫고 하고 싶은 일은 돈 벌이를 하기에 능력이 부족할 때 좌절을 느낀다.


스티븐이 느끼는 감정은 청춘이라면 혹은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 순간에 시간 혹은 주변의 만류로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영화는 이런 장점들을 깔끔하게 살려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캐릭터에 빠져드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앞서 말했듯 스티븐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친하게 지냈던 여자가 술집에서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자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분을 삭힐 만큼 소극적이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관객들도 스티븐이 누구인지 알아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중반을 넘어서서야 그의 유머에 웃음이 피고 그가 무엇을 꿈꾸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초반부의 지루함이 상당하다.



두 번째는 음악이 아닌 문학을 택한 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강하게 흐르는 바다의 물줄기를 보여주며 스티븐의 문학적인 감수성을 내레이션을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 공연 장면은 딱 한 장면이다. 나머지 장면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와 예이츠의 영향을 받은 스티븐의 문학청년의 면모에 집중한다. 두 시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그래서 사랑 표현이 모두 시적이었던 제인 캠피온의 영화 <브라이트 스타>를 예로 들어보자. 모든 대사가 시적이라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그건 문학적인 감수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영상은 텍스트와 다르다. 영상 시대에 텍스트적인 감수성은 때로는 지루함을 느끼게 만든다. 텍스트를 곱씹는 건 책의 기능이지 영상의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멜랑꼴리한 영화의 감성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작품은 정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헌데 이 공감이 주는 색이 영화에서는 멜랑꼴리에 가깝다. 스티븐은 그의 자기 과신 때문에 너무 쉽게 꿈을 확신하고 너무 처절하게 좌절한다. 원인은 알지만 좌절이나 시련이 외부의 환경보다는 주인공의 기질적인 면이 강하기에 관객은 축 쳐져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근원적인 우울함을 느낀다. 이는 감수성적인 측면에서는 유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스토리적인 재미에서는 마이너스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이 결국 어머니의 개입이라는 점은 영화가 지닌 드라마적인 재미가 크지 않다는 걸 입증해 주는 결과라고 본다.


감수성적인 측면이 강한 작품이기에 관객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갈릴 영화라고 생각한다. 스티븐이라는 캐릭터에 감정이 동화되면 그 자체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영화가 지닌 특유의 색깔이 맞지 않는다면 느린 리듬과 오락적인 요소의 부족함이 눈꺼풀을 누르는 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아픔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