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운전석에 앉은 여자와 다섯 사람(그녀의 아들, 누나, 결혼을 앞둔 여자, 창녀, 할머니)과의 대화를 열 개의 파트로 나눠 보여준다. 여자는 이혼을 했으며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아들과 갈등을 겪는 중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인 제작 시스템에 의해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한 <텐>은 운전석과 조수석을 비추는 카메라가 전부이며 샷의 이동이 없다. 파트에 따라 조수석이 비춰지면 쭉 조수석만 운전석이 비춰지면 쭉 운전석만 보여준다. 배우들은 창녀로 출연한 배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고 한다. 영화 속 모자는 실제 모자 관계이며 여자는 실제로 이혼을 했다고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대화로 이뤄지지만 어떠한 서사를 갖춘 건 아니다. 인물과 인물이 만나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는 수다에 가깝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유엔 국제농업개발기구의 요청에 의해 촬영한 작품 <ABC 아프리카>에서 그는 작은 캠코더를 이용해 촬영을 했다고 한다. <체리 향기> 촬영 당시 사정에 의해 35mm의 카메라로 진행했던 작품을 캠코더로 찍었던 경험은 그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10 온 텐>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은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인공적 연출 없이도 대상의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얻어내 절대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 제가 지난 30년 동안 찾아왔던 것입니다.’ 우간다의 아이들은 작은 카메라를 신선해 하고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감독은 카메라를 불편해하지 않는 아이들의 솔직함을 발견하게 된다.
<텐>은 상황의 설정은 있으나 서사의 진행은 미비하다. 비전문 배우들은 연기인지 아닌지 모를 대사들을 내뱉는다. 이는 감독의 연출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 경력 초기부터 영화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연출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다. 숏-리버스숏의 생략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영화의 화면을 대사를 내뱉는 인물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헌데 이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로 한 인물의 모습만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예측을 벗어난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을 통해 연출로 인한 인위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미국의 취업률을 95%라고 가정해 보자. 이 숫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긍정적인 숫자로 보일 것이다. 100명 중 95명이 직장이 있다는 소리니 말이다. 하지만 미국 같이 인구가 많은 국가는 5%의 실업률이 전체 인구로는 약 16만 명에 육박한다. 숫자를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는 거처럼 다큐멘터리 역시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이끌어갈 수 있다. 감독의 연출 의도에 따른 영화는 이보다 더 현실을 왜곡해서 보여줄 수 있다.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 흐르다 보면 감독의 기획 의도에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고 생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연출에 대한 문제는 두 명감독의 대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히치콕 트뤼포>에서도 나타난다.
완벽한 계산에 의해 미장센을 구성하는 히치콕 감독에게 촬영 전 배우들을 만나고 그들의 개성에 따라 각본을 고친다는 트뤼포 감독의 말은 충격처럼 다가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의도대로 흘러가야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의문을 품게 만든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네오리얼리즘을 표현하는 방식에 더 다가선 모습을 보여준다. 담아내는 방법이 아닌 담아내는 도구 자체를 이용함으로 영화가 현실에 더 밀접하게 다가설 수 있는, 현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연출을 고안해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해 약간의 해석을 시도해 볼까 한다.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그저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었다고는 하지만 그 장면을 찍은 데는 의도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혼을 결심한 여성과 이를 위해 거짓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이란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녀는 운전대에 앉아 있다. 운전대에 앉았다는 건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주체적인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처음 보조석에 앉는 아들부터 그녀는 격한 대립을 보인다. 또 카메라는 그녀가 아닌 아들을 비춘다. 운전은 운전자가 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건 동승자와 함께이다. 영화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을 다루고 있고 주체적인 여성을 내세우고 있으나 동시에 운전석과 조수석을 통해 연대의 끈을 묶어놓는다. 허나 그 연대는 쉽지 않다. 자신의 세대에 당한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 노파나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모욕을 주는 가해자에 가까운 창녀의 모습은 같은 길을 가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유독 동승자들의 ‘길을 잘못 들었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연대를 위해 동행을 권하나 받아들이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여성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행해지는 남성 위주의 권위적인 사회 구조에 이혼을 통해 반기를 들고자 하지만 같은 여성은 물론 아래 세대로 대변되는 아들에게조차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실패를 끝으로 결말을 내리지 않는다. 영화가 10개의 파트를 진행하는 방식을 보면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지는 화면이 등장한다. 파트가 진행됨에 따라 갈등의 양상은 점점 수그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첫 파트에서 (개인적으로 웃음이 터졌던) 모자의 격렬한 말다툼은 점점 누그러진다.
이 부분은 서사적인 흐름은 없지만 대화를 통한 감정의 변화는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최종 파트가 끝났을 때 무언가 떨어지는 결말(만약 숫자의 의미가 카운트다운이라면)이 있어야 한다. 결말에서 차는 할머니 댁을 향한다. 개인적으로 이 의미는 최종적인 연대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저항하고자 하는 여성(그녀), 시대에 순응한 윗세대(할머니),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남성(아들)이 한 자리에 모일 것을 암시함으로써 좁은 차 안을 벗어나 더 넓은 토론의 장을-어쩌면 이를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