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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성 해방은 이뤄질 수 있는가

영화 <안티포르노>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문제는 꽤나 복잡한 양상을 이룬다.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 남자 몰라요 라는 과거 TVN의 예능프로그램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처럼 여자가 줄기차게 이야기하지만 남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이 있고 남자들이 설득하려고 해도 여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세력에게 가장 유감으로 여겨지는 주장이 탈코르셋이다.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 화장을 하지 않겠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그것이 자신들을 가두는 사회적인 시선 때문이고 그 시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여기면 이를 이겨내는 거 자체가 용기고 격려해줄 일이라고 본다. 헌데 ‘나는 이렇게 행동하면서 여성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넌 왜 안 하느냐’라며 같은 여성들에게 탈코르셋을 강요하는 건 결국 또 다른 코르셋 씌우기에 불과하다.


몇몇 분들은 여성 인권 운동에 대해 끊임없이 연대를 외쳐온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게 모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주장 자체에는 모순이 많다. 그리고 이런 모순들은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넘어 남성 권력을 여성으로 이양해야 한다는 강요에서 비롯된다. 사회 시스템은 익숙함과 상식이란 걸 심어준다. 사회가 정한 약속이고 그렇게 통용되며 오랜 시간 가장 유용하고 합리적인 것이라 여겨져 왔기 때문에 믿음을 준다. 이를 바꾸기 위한 급진적인 운동과 주장은 이 시스템과 맞물려 모순을 낳게 된다. 이는 맞다 틀리다로 구분하기 힘든 문제다. <안티포르노>는 이런 지점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과연 진정한 여성 해방은 이뤄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 변기와 구토


쿄코의 방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침대, 그림 네 점, 그리고 변기와 세면대다. 그녀는 침대 위에 마치 정사를 끝낸(혹은 자위를 끝낸) 듯한 자세로 누워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향하는 곳이 문도 벽도 없는 색깔로만 다른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변기다. 그녀는 변기 위에 앉지만 볼일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세면대가 있지만 손을 씻지 않는다. 쿄코는 남자는 변기 앞에 서 있지만 여자는 변기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누가 볼일을 보는데 앞에 서 있으면 볼일을 볼 수 없다. 쿄코가 학창시절 성에 있어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성적인 억압을 겪어야만 했던 점, 아버지와 새 어머니와의 격렬한 섹스 소리는 들으면서 자신은 성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는 압박 속에 살았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이 작품에서의 변기 위의 볼일이란 자연스러운 성적 욕구의 해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녀는 성적인 욕구를 해방하지 못한다. 그 대신 경험하게 되는 것이 구토이다. 쿄코는 노리코라는 비서를 성적으로 학대하는데 이 과정에서 몇 번의 구토를 경험한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배변활동을 하지 못하기에 극단적인 배변활동인 구토를 경험한다. 쿄코는 숲속에서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는 판타지에 빠져 있는데 이 극단적인 판타지는 여성이 누려야 될 성적 자유를 빼앗긴(배변활동) 것에 대한 극단적인 형태(구토)라 볼 수 있다. 그녀의 소설 작업 방식을 보자.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다시 그 인물들을 글로 표현한다. 이는 여성 해방을 부르짖는 인물의 성격과 연관성이 있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주장과 실체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글은 주장이고 그림은 실체다. 


헌데 여성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면서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성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릇된 판타지를 품으며 극단적인 형태로 성을 표출한다. 더군다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쿄코가 처녀라는 점이다. 쿄코는 자신이 강간당한 영상이라며 영상을 틀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혼자만이 볼 수 있는 격렬한 정사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변기 앞에 선 남성은 성적인 표출을 틀어막고 구토는 성적인 욕구를 뒤틀린 형태로 표출시킨다.



* 여동생과 도마뱀


<안티포르노>는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인물들과 묘사가 난무한 작품이다. 헌데 이 작품에서 딱 한 명 순수한 천사처럼 묘사되는 이가 있다. 바로 쿄코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자살을 했는데 그 자살의 형태가 기묘하다. 남학생을 설득해 칼로 자신을 찌르게 한 것이다. 앞선 식사 장면에서 쿄코의 성에 대한 질문이 아버지에 의해 차단된 점을 생각했을 때 여동생을 죽인 건 집안에서의 남성 권력에 의한 압박(칼로 찌른 이가 남자(남학생)로 묘사된다는 점, 하지만 살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 의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여동생은 형형색색의 나비가 그려진 그림책을 지니고 있다. 나비는 하늘을 날아갈 수 있다는 점, 작품 도입부에서 여동생이 나비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 쿄코가 여동생이 사라지자 극한의 상황에 몰린 거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해방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래서 여동생이 자살한 뒤 책 속의 나비들은 색깔이 모두 사라지고 모양만 남아있다. 쿄코는 이런 말을 한다. 여성은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다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기에 열정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나태하다, 무능력하다는 낙인을 찍힌다. 출발점이 다르고 물려받은 재능과 재력이 다른데 사회적인 시스템이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여성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생각해 보자. 일본은 이 글에서 따로 쓸 필요도 없이 여성 인권이 바닥인 나라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일본은 세계 1위의 국민성을 지닌 국가라는 점 때문에 모든 인권이 잘 지켜지고 있는 거처럼 포장된다. 여성에게 보장되지 않는 자유, 그러니까 성적으로 억압된 쿄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병 속에 갇힌 도마뱀이다. 그녀는 도마뱀은 너무 커버렸기에 병에서 나올 수 없다 말한다. 도마뱀은 쿄코고 병은 성적인 억압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는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억압에서 탈출한다. 자유로운 자위생활과 합의에 의한 섹스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 


헌데 쿄코라는 도마뱀은 병에 갇혀 있기에도 탈출하기에도 너무 커버렸다. 왜곡된 성적 인식에 의해 건강하고 자유로운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지만 동시에 왜곡된 인식에 갇혀있다. 즉,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나 이 주장은 극단으로 치우치고 현상 역시 역겨운 그림을 향하는 것이다. 이는 온전한 여성(건강한 성인)이 되지 못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보여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


작가 쿄코와 매니저 노리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겨졌던 <안티포르노>에는 반전이 일어나는 지점이 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촬영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워낙 현실과 환상, 꿈을 뒤섞여서 표현하는 소노 시온 감독의 특성상 무엇이 현실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알고 보니 쿄코는 신인 배우이며 노리코는 베테랑 배우라는 점, 방 안에 있는 배우들은 여성들이지만 그녀들에게 지시를 하고 촬영을 하는 집단은 남성이라는 점이다.


이 구조는 화면 속에서 자유를 외치던 여성 쿄코는 결국 남성의 ‘허락’에 의해서만 주어진 자유를 누렸을 뿐이라는 것이고 노리코는 남성의 ‘주문’ 속에 노예에 가까운 모습으로 치욕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 이 남성 집단 속에서 쿄코는 연기를 못한다 욕을 먹고 감독은 처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 보라며 유사성행위를 시도한다. 지나가는 스탭조차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동을 행한다. 여성 집단은 어떤가. 노리코는 쿄코의 뺨을 때리고 다른 배우들 역시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들은 남성 집단의 요구에 따라 쿄코가 제대로 행동하길 원한다.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대를 하거나 동정을 품지 않는다.


쿄코의 환상으로 등장하는 여성 무리들을 생각해 보자. 그녀들은 쿄코가 여성의 해방을 이뤄내길 원한다. 그래, 원한다. 쿄코에게 영화 속 역할은 진정한 자신이 아닌 여성들을 위한 ‘연기’에 가깝다. 억압과 강요 속에서 자신을 찾기 보다는 또 다른 억압과 강요에 의해 소극적인 자신이 아닌 당당하고 자유로운 쿄코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기조차 남성들이 허락한 공간 하에서만(그 공간은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전부이다.) 이루어진다.



* 처녀와 매춘부


성교육의 문제 중 하나는 성적인 억압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무조건 ‘안 돼!’만 외친다. 성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이 욕구를 건강하게 풀어내는 방법을 교육해야 하는데 이런 교육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 성적인 억압은 ‘무엇이든 열 수 있는 열쇠, 어떤 열쇠에도 열리는 자물쇠’라는 말처럼 남성에 비해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쿄코는 두 가지 자아 사이에서 분열을 겪는다. 첫 번째 자아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에 의해 탄생한 처녀, 두 번째는 이런 강압에서 탈출하고자 쿄코가 만들어낸 매춘부이다. 


처녀와 매춘부는 극단을 이룬다. 쿄코는 강압과 억압에 의해 자살한 동생(처녀)처럼 되고 싶지 않아 매춘부를 꿈꾸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새 어머니가 보여준 더럽고 왜곡된 형태를 섹스라 여기기에 매분부가 되는 것에 겁을 먹는다. 오디션 장면에서 쿄코는 ‘매춘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담겨 있다는 상자 속에 등장한 건 정사를 나누는 아버지와 새 어머니의 모습이다. 길에서 만난 남성에게 자신을 강간해 달라 말하나 결국 정사의 순간에 겁을 먹고 포기하는 건 쿄코다.


해방이란 건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에는 공포가 따른다. 시장 경제의 완전한 자유가 커다란 빈부격차를 의미하듯, 사회 시스템의 완전한 자유가 빈곤층의 몰락을 의미하듯 날개를 달지 못한 인간에게 자유란 끝이 보이지 않는 땅을 두 발로 걸어가는 목적지 없는 마라톤이라 할 수 있다. 연대를 통한 시스템의 구축이 선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만의 해방은 추락과 같다. 그래서 쿄코는 차마 완전한 매춘부를 택하지 못한다. 입으로는 해방과 자유를 외치는 매춘부이지만 실상은 조그마한 방에 숨어(병에서 나오지 못하는 혹은 나오지 않는 도마뱀처럼) 처녀를 지킬 뿐이다.



* 생일 그리고 물감


작품의 초반 변기에 앉은 쿄코는 깨진 유리조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이 생일인 것은 잊어야 한다며 생일을 부정한다. 이 부정이 변기 위 그리고 유리조각을 통한 모습의 일부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앞서 말했듯이 변기는 쿄코에게 억압을 상징한다. 유리조각이 전체가 아닌 얼굴 일부를 비추었다는 점은 그녀의 일부가 아직은 억압에 의해 완전한 해방을 누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생일의 부정은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한 살 더 나이를 먹는, 그러니까 유년의 시절에서 벗어나 성인(해방을 통한 건강한 성인)을 향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본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이 땅의 여자들의 자유를 부정하는 쿄코에게 동생은 생일을 축하한다며 케이크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 케이크를 쿄코는 얼굴로 뭉개버린다. 동생은 처녀라는 과거를 상징하고 케이크는 생일, 성년으로의 미래를 상징한다. 쿄코는 이를 거부하고 그녀의 위로 형형색색의 물감이 떨어진다. 영화에서는 이 물감과 비슷한 이미지를 두 장면에서 보여준다. 첫 번째는 동생이 보고 있던 나비가 그려진 그림책, 두 번째는 학생 쿄코의 방에 그려진 여자 그림(배가 갈라져 창자가 쏟아지는데 아름다운 색깔과 도마뱀이 배에서 창자와 함께 나오는 징그럽지 않은 순정만화 느낌의 그림)이 그것이다. 나비는 앞서 말했듯 해방이다. 두 번째 그림 역시 해방의 의미로 보는 것이 적당하는 생각이다. 배라는 공간이 터지면서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특히 도마뱀)이 쏟아지니 말이다.


헌데 끈적거리는 물감은 쿄코의 온몸을 더럽히며 그 옆에서는 아버지와 새 어머니가 섹스를 하고 있다. 색색의 나비가 해방이라면 색색의 물감은 결국 해방을 꿈꾸었으나 해방되지 못한 쿄코의 마지막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은 자유로운 척을 한다고 말한다. 색깔 있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어 하나 실상은 물감을 뒤집어 쓴 채 바닥을 벌레처럼 뒹굴고 있다고 말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진정한 여성의 해방은 이뤄질 수 있는가. 영화는 진정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가 우선 자신을 묶고 있는 족쇄에서 건전하게 탈출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족쇄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자유를 외치는 건 자유로운 척, 그러니까 변기에 앉아 볼일도 못보고 더러운 구토를 내뱉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최근 페미니즘 집회에서도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과 구호들, 이를 대충 무마하기 위한 궤변들이 등장하며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논란은 자유로운 ‘척’하는 이들이 나비의 날개가 아닌 물감을 뿌리는 행위를 반복하기에 생기는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여성이 스스로의 족쇄를 푸는 게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영화가 이야기했듯 추락하지 않을 날개를 주는 일, 허락에 의한 공간의 제공에서 벗어나는 일 등 다방면에서 자유를 위한 발걸음을 전진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여성의 해방’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며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기모순을 마주하는 순간과 같다. 마치 이 영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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