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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쳤든 주웠든 사랑이 있으면 가족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느 가족>


* 현대의 가족 해체 


최근 기사를 하나 본 적이 있다. 효도 계약서 작성에 대한 기사였는데 이 기사를 보고 상당히 마음이 아팠다. 과거 대가족 시대에서는 자연스럽게 돈을 버는 가장의 위치가 바뀌는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구조의 변화로 핵가족화가 이뤄지면서 노인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렇다면 서양처럼 자녀들을 이른 시기에 독립시키는 게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문제는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일자리 부족 문제로 자녀들의 자립 역시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 부모에게 신세를 지는 캥거루족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 간의 ‘돈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자녀는 자립을 위해 부모에게 기대고 부모는 그만큼 기대게 해줬으니 자신들을 책임져 달라 말한다. 헌데 자녀들은 막상 부모를 부양하려니 집도 넓지 않고 돈도 충분치 않다. 여기에 부모가 질환이 있으면 병간호를 해야 하기에 그 부담감에 손을 떼려고 든다. 


세상 모든 문제는 돈으로 귀결된다는데 가족도 그런 단계에 이른 것만 같다. 대가족 하에서 인내와 희생으로 가족의 형태를 유지했던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이 부족하면 결혼 안 하면 그만이고 결혼을 해도 나는 내 삶을 살겠다며 2세 계획을 세우거나 자녀 양육을 신경 쓰지 않는 부모가 부지기수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출산율 관련 뉴스를 내세우면서 사회적인 위기만 강조하고 있다. 시스템적인 안정을 주지 않고 불안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만 가라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간다. 가출한 청소년들이 뭉쳐 가출팸을 만들거나 남자들끼리 뭉쳐 단체 합숙 생활을 하기도 한다. 몇몇 문학작품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뭉쳐 가족을 꾸리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런 가족의 형태를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줍는 것과 훔치는 것’, ‘돈과 사랑’을 통해 말이다. 



* 줍는 것과 훔치는 것 


오사무는 쇼타에게 도둑질을 가르친다. 그는 매장에서 물건을 훔치는 행위에 대해 ‘주인이 없는 걸 가져오는 것이니 줍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의 가족 형태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가정이 없거나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워져 와 가정을 이룬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리이다. 오사무는 집 앞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유리를 데려와 밥을 먹인다. 그리고 그녀를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찰나 그녀의 집은 편부모 가정이지만 그 엄마는 딸 따위는 관심도 없음을 알게 된다. 유리의 어머니는 집에 질 떨어지는 남자를 불러 살다 스스로 상처 받는 인물이며 딸 유리는 엄마의 학대에 몸도 마음도 상처를 입었다. 오사무의 실질적 아내인 노부요는 유리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건 유괴라는 오사무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는 감금을 시킨 것도 아니고 몸값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이건 유괴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 ‘줍는 것’의 개념은 그들이 사랑으로 뭉친 것만 같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개를 산 사람을 욕하진 않지만 유기견을 주워와 키우는 사람에게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버림받은 이에게 사랑을 주는 걸 더 가치 있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헌데 이런 관점을 ‘어차피 둘 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개를 필요로 한 것이다’라는 이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 줍는 것의 관점을 ‘결국 내가 필요해서’ 라는 생각으로 바꿔본다면 이는 훔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오사무는 유리에게도 도둑질을 가르친다. 이는 결국 유리가 이 가정에 있기 위해서는 자신도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순간 그저 ‘사랑’으로 가정을 바라보았던 쇼타에게는 의문이 생긴다. 그들이 날 데려온 건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고철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과연 날 필요로 했을까. 그 순간 쇼타는 ‘훔치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세계에 빠져버린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아무도 모른다>를 보면 버림받은 아이들은 동료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소년 아키라는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들의 세계로 아이들을 이끌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쇼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오사무가 차를 털려 하자 이를 만류하려 든다. 차 속의 물건은 엄연히 주인이 있기에 훔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다리를 다쳐 일을 쉬고 노부요가 해고당한 마당에 오사무는 아이의 낭만에 빠질 시간이 없다. 하지만 오사무가 낭만을 버린 순간 쇼타 역시 어른의 세계에 눈을 뜨고 만다. 그리고 그는 차에서 자신을 구해줬다 여겼던 오사무가 사실은 구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 어른의 세계라는 건 그들 가족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이다. 이전까지 쇼타는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처럼 낭만에 빠져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피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 뭉쳤기에 오사무와 노부요, 아키와 할머니를 좋아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며 혼자서는 살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여동생인 유리가 결국 자신처럼 살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만다. 쇼타가 바라본 가족, 그 가족의 형태는 결국 ‘돈’이다.  



* 돈과 사랑 


작품 속 인물들의 현재를 하나씩 살펴보자. 오사무는 공사판에서 일하지만 필요한 물품은 도둑질로 챙긴다. 노부요는 빨래방에서 일하지만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손님들의 물건을 슬쩍 한다. 아키는 유사 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며 할머니 하츠에는 연금이 나온다. 무엇보다 집 자체가 하츠에의 것이다. 그들은 어찌되었건 집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비록 아키는 본인의 돈을 생활비에 보태진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인 역할을 아이들에게도 부담시킨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무력하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특출 난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에겐 사랑이 있다. 버림받은 이들을 어떻게든 주워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헌데 이 ‘살아간다’에는 ‘돈’이라는 필수조건이 수반된다. 우리는 돈을 원하지 않고 자유와 시간을 위한 욜로 라이프를 말하지만 이 욜로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 없는 자유란 없고 돈 없는 삶이란 지속될 수 없다. 


그들이 원하는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다. 이 현실을 일깨워주는 게 오사무와 아키의 대화다. 사실상 이 집안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오사무와 노부요 부부의 관계에 대해 아키는 이렇게 말한다. ‘돈’으로 엮여져 있다고. 사실 이들 사이는 돈보다 더 진한 과거로 엮여 있다.(이 부분은 영화를 보고 확인하길 바란다.) 이 과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원하고 그 사랑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노부요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오사무를 비롯한 인물들은 모두 가족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뭉쳤으나 돈이 없고 이를 벌기 위해서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약간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어도 자본가의 후원이 없으면 한계가 있다. 



이 돈을 현실적인 제약으로 보는가 아니면 속물적인 가치로 보는가에 대한 물음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갈등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오사무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게 도둑질 밖에 없어서 그것만 가르쳤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쇼타는 혼자일 때는 버려진 차에서 혼자 논다. 그의 옆에 유리가 있을 때, 오사무가 그와 놀아줄 때만 쇼타는 이 차에서 벗어난다. 오사무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 가족이 오사무에게 더 많은 경험을 알려주고 더 많은 걸 가르쳐 줬다면 그 역시 더 많은 걸 두 아이에게 주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손가락 트릭을 이용한 마술, 고로케를 사주는 것,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름다운 바닷가 장면 후 할머니의 죽음 장면, 그 장면 후 가족의 선택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이전까지 바닷가에서 함께 놀며 마치 ‘정말 가족’ 같았던 이상적인 그들이(마치 주어온 것이라는 낭만처럼) 한 순간에 돈이라는 현실로 돌아온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약간은 이야기와 동떨어져 보이는 아키라는 인물을 설정한 것도 이런 지점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키는 할머니가 그녀의 삶을 따로 살게 준비해 준 인물이라 여긴다. 그래서 가족에게서 애정을 느끼지 못한 그녀를 품어주고 돈도 따로 모으게 해주었다 생각한다. 하지만 결말부에 이르러 그녀는 할머니에게 의문을 품게 된다. 과연 그녀는 진정으로 날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필요로 이용했던 것일까. 할머니가 주었던 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돈을 위한 연극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 훔쳤든 주웠든 사랑이 있으면 가족이다 


고레에다의 가족 영화도 여느 가족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가족 간의 갈등과 아픔의 종착역은 결국 사랑 그리고 연대와 유대감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영화 중 좋아하는 작품이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이 작품에서 스즈는 아버지의 죽음 후 배다른 언니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 시작에서 그녀는 언니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한다. 세 사람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하나라는 연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스즈는 그 연결점이 되어줄 수 있었던 아버지가 죽었기에 부족한 연대와 유대감 속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작품에서 스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슬픈 인물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스즈는 사랑을 통한 연대와 유대감을 얻게 된다. 


<어느 가족> 속 가족들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들 사이의 감정에 대해 관객은 물론 인물들조차 끝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긴다. 왜냐하면 이 가족의 형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형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새로운 것은 의심하고 의문을 품는다. 그래서 이 영화 속 가족이 사랑이 아닌 돈으로 결속되어 있다는 하나의 단서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들에게는 적어도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건 무엇일까. 전통 사회에서는 이 증거가 핏줄이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 핏줄의 기능성에 지나치게 기댄 나머지 발생한 사회적인 문제들이 부정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영.유아 유기 범죄, 가정 폭력, 고독사 등등 핏줄을 통한 사랑, 이 사랑으로 가족의 문제는 가족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노부요는 새 옷을 사준다니 때릴 거니까 싫다고 말하는 친엄마와의 아픔에 고개를 젓는 유리에게 말한다. 때리는 건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과거 <가을동화>처럼 낳아준 정이 있으니 아이를 바꾼다는 스토리는 현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핏줄의 중요성보다 아이에게 주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그가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 선택한 가족의 정체는 몇몇 관객들에게 충격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왜 굳이 감독이 저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레에다 감독의 그 선택이 가족들에게 ‘사랑’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자신들에게 결핍된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들 자체가 무엇이 사랑이고 아닌지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무엇을 주고 주지 말아야 될지에 대해 안다. 다만 슬픈 점은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막힌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앞서 언급한 사회의 시스템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회가 원하는 가족의 형태는 정해져 있고 가족의 문제는 가족 내부에서 해결하길 원한다. 이는 단순 정부차원의 정책문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인 인식 역시 문제다. <어느 가족>의 상반된 키워드인 돈과 사랑은 사회적인 구조인 돈과 사회가 가져야 될 인식인 사랑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이 있으니 가족이지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형태가 있어야 한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액체가 아닌 튼튼한 틀에 고정되어 묶여 있는 걸 가족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차갑고도 뜨겁다. 현실은 그들을 틀에 고정시켰지만 마음은 여전히 액체처럼 뜨겁게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보여주고 있다.  



* 일본의 그림자를 찌르는 고레에다, 아쉬운 아키 


<어느 가족>은 <버닝>을 누르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화제작이다. 헌데 이 작품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어떠한 축하 인사도 없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에서 거둔 쾌거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축사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만큼 국가 이미지를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헌데 칸 영화제 수상에 대해 일본 정부쪽은 반응이 없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오히려 일본의 그림자, 즉 어두운 측면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마더>가 보여주었던 편부모 가정의 문제, 이런 가정의 케어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사회의 시스템, 독거노인 문제와 아동 관리 문제는 물론 결정적으로 아키 캐릭터의 역할, 일본 내 로리타 콤플렉스 성매매 문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번째 살인>을 통해서 이미 자신이 사회파 감독으로써도 얼마나 역량이 있는지를 증명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장기인 가족영화를 다루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를 폭 넓게 건드리고 있다. 동시에 깊이적인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키 캐릭터다. 캐릭터 자체가 애매모호하다. 다른 캐릭터들이 이야기에 하나로 흡수되는 느낌이 있는 반면 아키는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 강하다.(혼자 생활비를 내지 않아서인가......) 또 그녀가 돈을 버는 유사 성매매에서 남성과 얽힌 사연은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보여준다는 점-특히 아키가 그런 인물이라는 점에서 캐릭터의 강화를 보여주었다는 의미는 있지만 너무나 전형적이고 익숙한-그러면서 감정적으로 무언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상영시간을 늘려서라도 아키와 하츠에 사이의 연대와 유대감을 강화시키거나 아키와 노부요를 더 붙여놔야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오사무와 쇼타의 관계라는 점 때문에 이들에게 많은 분량을 부여한 건 이해하지만 이런 분량적인 요인 때문에 아키라는 캐릭터가 덜 부각된 점-특히 아키라는 캐릭터가 할머니를 따라 집에서 나온 앞선 이들과 다른 색을 지닌 캐릭터라는 점에서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음에도 조금은 외면(?)당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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