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랑>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가 각본을 쓰고 오키무라 히로유키가 메가폰을 쥔 <인랑>은 잔혹한 성인동화이다. 이 작품은 스토리적인 측면에서 굴곡이 약한 대신 빨간모자 이야기를 통해 감정적인 골격을 형성한다. 관객들은 빨간 모자를 속여 잡아먹는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늑대들의 이야기를 감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리를 떠날 수 없는 늑대 후세의 감정에 빠져든다. 문제는 이 감정이 허무함이 강하며 모든 이들에게 공통된 감성을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잘 이어지지 않는 감정선에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GV에서 김지운 감독은 이 지점을 언급하며 애니메이션 <인랑>을 실사화 하는데 겪은 고충을 토로하였다. 소재적인 측면에서는 상업성이 강하나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매니아틱하다. 그래서 그는 전체적인 틀을 다시 잡았다. 원작 <인랑>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아마 상당히 실망할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이 주었던 감성은 담겨 있지 않다. 대신 꽤나 강력한 액션과 흥미로운 설정으로 무장한 상업영화다. 이는 감독이 원작 팬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보다 일반 관객들이 무얼 더 좋아할지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첫 번째는 원작이 보여주었던 액션, 두 번째는 한국의 현재 상황과 어울리는 정서의 재설정이다.
원작 <인랑>의 경우 설정부터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작품이 지닌 허무한 정서와 연관되어 있는 설정인데 전후 세대인 오시이 마모루는 패전 후 일본을 배경으로 급진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하면서 발생하는 실업자 문제, 이를 통한 사회적 불안, 수도 경찰 문제 등등 전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설정했다. 반면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 일본의 경제성장과 강대국들의 패권다툼, 이 사이에서 국가적인 힘을 키우려고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과 이 때문에 열강에게 받는 경제보복, 통일을 막기 위한 세력들과의 대결이라는 컨셉은 현재 한국 상황과 맞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줌과 동시에 ‘미래’를 배경으로 했기에 더 강렬한 액션을 선보인다.
특기대의 전투복의 기능은 엄청나게 향상되어 공격을 당해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 또 드론을 통해 펼치는 액션은 독특한 느낌을 준다. 총을 쏘는 장면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아낌없이 총알을 소비하면서 상당한 타격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김지운 감독의 성향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캐릭터의 수를 늘리고 악역의 비중을 강하게 설정함으로 추격전과 액션의 재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 전후 세대인 오시이 마모루의 정서가 진하게 담긴 스토리 라인 역시 수정이 필요하다 여겼을 것이다. 이런 정서는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친숙하지 않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의 전개에 대해 개인과 집단 간의 이야기라고 말하였다. 주인공 임중경이 친구 한상우가 속한 공안부, 선배 장진태가 속한 특기대, 사랑하는 연인 이윤희가 속한 섹터와의 만남(감독은 이 만남을 집단을 대표하는 또는 대변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라 표현한다.)을 거듭하면서 집단 속에서 개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이는 한국 정치의 성향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은 과격한 집단주의에 의해 상처받아 왔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없고 집단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서가 팽배했으며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집단이 우선이 아닌 개인의 행복 그리고 합리적인 성찰을 통한 선택을 강조한다.
이런 정서는 결국 늑대로 태어났기에 다시 집단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원작의 정서와 큰 차이를 둔다. 그래서 영화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빨간모자 이야기를 초반부에 끝내버리는 건 물론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중경과 윤희가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한 순간으로 설정한다. 이는 원작 팬들은 괴리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대다수의 관객이 될 수 있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빨간모자 이야기를 기본 정서로 깔고 가면 결국 작품은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우울함이 허무주의와 연결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정서적으로 어떠한 감정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김지운 감독은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통일 이야기가 나올 만큼 남북 관계가 좋다는 점은 스토리의 흥미에 있어 크게 한몫했다는 생각이다. 상상력이란 건 현 상황과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야만 눈길을 받을 수 있다. 또 원작에서는 상당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정치권의 알력다툼을 한상우라는 핵심적인 악역을 설정하고 그에게 상당한 분량을 주어 알기 쉽게 표현한 점도 좋았다고 본다. 독특한 점은 강동원 원톱 영화일 줄 알았던 작품이 생각보다 한효주가 맡은 이윤희의 정서도 진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원작 전체를 아우르는 감성이 후세의 감성과 같아 그의 이야기만 해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영화는 중경의 캐릭터가 작품의 정서와 연결되지 않기에 흐름을 위해 윤희를 부각시켰다고 본다.
상업성을 살렸다는 점, 무엇보다 관객이 재미를 느낄 만한 지점들을 많이 만들어냈다는 점은 확실한 플러스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은 원작 자체가 주인공의 정서를 바탕으로 진행되기에 이를 가져오지 않은 만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캐릭터 간의 합이나 전개에 있어 연결점이 부족한 점이 아쉬움이 크다. 특히 미경이나 철진 같은 경우에는 굳이 필요 한가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존재감이 약하다. <밀정>에서도 보여준 아쉬움이기도 한데 정출과 우진의 연대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은 거처럼(특히 정출이 우진의 편에 서는 동기부여가 약한 거처럼) 이 작품에서 역시 윤희가 중경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한 동기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김지운 감독을 박찬욱, 봉준호 감독과 함께 대한민국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3대 감독으로 뽑지만 그 두 감독에 비해 아쉬운 점이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연결고리가 되는 스토리를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또 원작 정서의 큰 비중이었기에 빨간 모자를 가져왔으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을 생각했을 때 차라리 이 부분은 빼거나 김지운만의 방식으로 영화의 정서를 만드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GV에서도 관객의 첫 질문이 ‘원작을 안 봐서 모르겠는데 왜 빨간 모자였나? 였다. 이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정서적인 혼합을 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김지운 감독에게 참 힘든 도전이었다고 본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원작 자체가 얼마나 실사화하기 까다로운 작품인지에 대해 느끼게 되었다. 특히 GV에서 원작 내의 정서를 따를 것인가(무리로 돌아가는 우울한 늑대가 될 것인가), 관객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 것인가(가면을 벗고 미래를 선택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거 같고 말이다. 그래도 참 김지운 감독 다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칭찬을 꽤(?) 했지만 한 부분 더 칭찬하자면 특기대가 주는 분위기 설정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관객들이 느낄만한 압도적인 위용이나 불안감, 공포가 있어야 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 수로관 전투 장면에서 그런 느낌을 이끌어낸 점은 칭찬해 주고 싶은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