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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가족영화의 집대성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이전 고레에다 영화 세 편의 주제의식과 연관성을 지닌다. 먼저 가장 언급이 많이 되는 <아무도 모른다>가 생각난다. <아무도 모른다>는 집을 나간 엄마 대신에 동생들을 돌보는 가장 아키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닌 어른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 때문에 아이들끼리의 유대를 통한 가족의 형성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이다. 예전 한국 드라마에서도 자주 다루었던 '아이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핏줄보다는 유대감과 애정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는 흔히 가족을 '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한다. 세 번째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세 자매는 집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이복 여동생 스즈를 만나고 그녀에게 '함께 살자'고 말한다. 처음 핏줄로 엮였던 이들 자매의 어색함은 대화와 추억을 통해 벽을 허물고 사랑으로 가까워진다.

<아무도 모른다>가 보여준 건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뭉쳐 만든 가족이라는 이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보여준 건 피보다 진한 유대감이 주는 사랑으로 이뤄진 가족,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보여준 건 벽을 허물고 결국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모두 담긴 영화가 <어느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어느 가족>의 인물들은 아이들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 어른들은 사회에서 제대로 된 1인분을 할 수 없는 존재로 비친다. 쇼타는 차에 방치되어 있었고 유리는 편부모 집안에서 학대를 당했다. 가장 오사무는 공사판에서 일하고 아내 노부요는 빨래방에서 일한다. 두 사람 다 한 가정을 이끌 만큼 돈을 벌지 못하기에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시키며 연금이 나오는 하츠에를 데리고 산다. 이들은 피로 뭉친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들보다 더 진하게 묶여 있다. 아버지라 부르지는 않지만 오사무를 따르는 쇼타나 친딸이 아닌 유리에게 애정을 보여주는 노부요의 모습은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화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각자에게 놓인 벽을 깨부수고 '남'에서 '가족'으로 뭉친다.


이렇게만 보면 <어느 가족>은 앞서 언급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위의 세 작품과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있다. 바로 '문제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극 중 오사무 가족은 외부의 문제로 인해 내부의 결속력이 투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할머니의 연금 문제로 찾아오는 복지사, 유리의 유괴 문제로 언론을 장식하는 경찰까지. 이들 가족의 형태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내부가 아닌 외부의 존재로 밖에서 오사무 가족을 흔든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뒤바꾼 아이를 바꿀지 말지의 선택, <아무도 모른다>에서 집을 나간 어머니,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아버지의 가출이라는 가족 내부의 이유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면 <어느 가족>에서는 가족 내부의 결속을 인정하지 않는 외부와의 갈등에서 (전체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쇼타가 내부가 아닌 외부세계에 눈을 뜬 순간 그 가족이 붕괴되었다는 점에 있다. 잡화점 주인이 쇼타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면서 '동생에게 도둑질을 시키지 마라'라고 말한 장면은 쇼타가 처음으로 외부인의 세계에 접촉하며 그들이 바라보는 내부를 경험한 순간이다. 이 순간 쇼타는 가족 내부에 갇힌 아버지 오사무보다 외부를 바라보는 존재, 어찌 생각하면 오사무보다 더 어른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오사무 가족이 처한 딜레마는 훔친 것과 주운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오사무는 쇼타 그리고 유리에게 도둑질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는 도둑질에 대해 훔치는 게 아니라 줍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매장 진열장에 놓인 물건은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 가족의 처지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들이 서로에게 주워온 존재와 같기 때문이다. 

쇼타와 유리를 주워온 것처럼 오사무와 노부요, 아키는 하츠에의 연금에 기대어 살고 있고 반면 하츠에는 이들이 자신을 주워와 하나의 가족이 된 것처럼 말한다. 그렇기에 훔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나름의 합당함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오사무 가족 내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오사무가 다리를 다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공사판이라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다. 다리를 다친 오사무는 노부요마저 직장에서 해고당하면서 결국 주인 있는 물건을 훔치게 된다.


'훔치는' 행위는 쇼타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쇼타는 오사무보다 먼저 외부(세상 또는 사회)를 보게 된다. 그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훔치는 것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다. 감독은 이 변화를 차를 통해 보여준다. 쇼타는 차에서 물건을 훔치다 주워온 아이다. 이를 의미하듯 쇼타는 버려진 조그마한 차를 아지트로 삼는다. 어느 장소를 아지트로 삼았다는 건 그 안에서 안락함을 느낀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오사무가 차 유리를 깨고 물건을 훔친 순간 쇼타의 세계는(버려진 차 안이라는 공간이 유리창이 깨져 외부와 직접적으로 맞닿은 거처럼) 붕괴되어 버린다. 이 순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켜졌던 논리와 규칙은 사라지고 외부의 시선에서 자신의 가족, 그리고 쇼타 본인과 유리의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면 핏줄이 아닌 이들이 가족으로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바라볼 때 가장 현실적인 답은 돈이라 할 수 있다. 오사무가 아키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아키는 오사무와 노부요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 돈 때문이라고 답한다. 아이들에게 물건을 훔치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점, 죽은 하츠에의 장례를 생략한 채 그녀의 유품에서 돈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부부의 모습은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이들은 분명 돈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과 연대, 그리고 유대감이 있다. 하츠에가 왜 오사무와 노부요와의 동거를 택했겠는가. 그녀에게는 연금이 있고 자식이 있지만 외롭다. 사랑을 주고 유대감을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아키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그 가족에게서 사랑과 연대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가 함께 떠나자고 말할 때 가족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츠에가 느꼈을 고독과 소외는 그녀가 일하는 풍속점의 남자 손님을 통해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그녀는 손님으로 여겨야 될 남자에게서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처럼 외롭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기에 자존감이 없고 거울 너머로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를 아키는 안아준다.


이들 가족에게 특별한 순간은 '돈'과 얽힌 순간이 아니다. 포스터로 유명한 바닷가 장면에서 하츠에는 다섯 명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고맙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의 마지막을 사랑과 유대감으로 함께해준 그들에게 담은 진심이라 할 수 있다. 배우 키키 키린이 애드립으로 한 이 대사가 고레에다 감독에게는 영화의 방향을 잡아갈 수 있는 중요한 대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만남은 표면적으로는 돈이나 결국 그 안에 사랑과 연대 그리고 유대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르는 역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을 하나 골라야 한다는 내용을 다룬 고레에다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를 보면 노년에 생을 마감한 노인들은 모두 가족과의 순간을 마지막으로 재현해 줄 삶의 순간으로 뽑는다. 그래서 영화는 가족들이 함께 하는 순간을 많이 집어넣는다. 

<어느 가족>에서는 함께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 아키의 옛 옷을 태우는 장면, 식사를 하는 장면 등을 집어넣어 가족 사이의 연대를 통한 유대감을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빼놓지 않는다. 혼자 생활비를 내지 않고 돈을 모으는 아키나 유리의 유괴 때문에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노부요의 선택은 사랑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가족>이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음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본 정부로부터 어떠한 축하 인사도 받지 못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가족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문제를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연금에만 의존한 채 살아가는 노년층의 고독과 소외 문제, 실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복지 문제, 아동 학대 문제, 여기에 최근 유엔 인권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로리타 성향의 풍속점 문제(아키가 일하는 풍속점이 교복을 입고 일하는 풍속점이다)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시스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족의 형태보다는 그 의미에 중점을 둔 영화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가족 영화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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