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앤(엘리자베스 모스 분)은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 분)에게 질문을 던진다. 박물관 홍보글 문구가 다소 어렵던데 설명 좀 해달라고. 이어지는 크리스티안의 답변.
"미술 전시회에서 전시물을 미술 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내가 당신 가방을 빼앗아 여기 놨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걸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답에 대한 예시로 마르셀 뒤샹의 <샘>을 들어보고자 한다. 뒤샹은 익명으로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작품을 냈고 그의 이름을 몰랐던 전시회 관계자들은 작품을 치워버렸다. 하지만 2004년 기준으로 36억이 넘어선 <샘>의 가격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미술계의 새로운 혁명을 이끌었다 할 수 있다.
영화 <더 스퀘어>는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이 '더 스퀘어'라는 작품의 전시를 앞두고 겪게 되는 최악의 사건들을 통해 스웨덴의 현재와 현대인들이 품고 있는 모순과 위선, 이중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급스러운 현대 미술관의 모습과 길거리의 난민과 빈민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 주제의식을 강조한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핸드폰과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고, 전시회 광고가 논란이 되는 등 최악으로 치닫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이 웃음을 주지만 그 이면에는 스웨덴의 현실과 현대인의 이중성과 이로 인한 차별과 위선이라는 씁쓸함이 담겨 있다.
이 영화, <더 스퀘어>가 보여주는 첫 번째 위선은 길거리에서 일어난다. 길바닥에서 구걸을 하는 노숙자를 무시한 채 이웃의 생명을 구하자며 전단지를 돌리는 여성은 걸인의 깡통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이웃을 돕자고 말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미술관 큐레이터 크리스티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더 스퀘어라는 예술작품의 전시회를 기획 중인데 이 네모난 장소의 의미는 '신뢰와 배려의 영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이다. 하지만 그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걸인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더 스퀘어>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세 장면 있다. 첫 번째는 크리스티안이 소매치기 당한 스마트폰과 지갑을 찾기 위해 이민자 건물로 향하는 장면이다. 그는 위치 추적을 통해 스마트폰이 이민자 건물에 있다고 나오자, 그 건물로 들어가 스마트폰과 지갑을 내놓으라는 편지를 건물 전체 우편함에 넣기로 한다. 어느 집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티안과 부하직원은 서로 건물 안에 들어가는 걸 떠넘긴다. 그들은 빈민과 이민자 집단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건물에 발을 들이미는 걸 꺼린다. 이 장면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코믹하지만 그 이면에는 차별과 편견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두 번째는 행위예술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혹성탈출>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테리 노터리가 연기한 이 배역은 전시회 축하연에 나타나 행위예술을 선보인다. 그의 행위 예술은 점점 거칠어지지만 관객들은 그 모습을 바라만 본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관객들은 눈을 내리깐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한 남성이 행위예술가를 제지하자 쌓여 있는 분노가 폭발한 듯 달려들어 행위예술가를 폭행한다. 이는 빈민과 노숙자 문제가 심각한 문제라는 건 알지만 그들에게는 온정을 베풀기 싫어하면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더 스퀘어'라는 작품에는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의 이중성과 일맥상통하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은 행위예술가의 행위가 자신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에 대단한 예술을 보는 양 바라본다. 여성을 향한 극단적인 폭력이 발생할 때까지 관객들은 침묵을 유지한다. 그 침묵이 깨지는 건 한 남성 때문이고 이를 시작으로 관객들은 눈을 뜬다. 그들이 이런 이중적인 위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크리스티안 역시 자신이 지닌 차별과 편견 그리고 위선에서 깨어난다. 그 순간을 말하기 전에 인상적으로 본 세 번째 장면인 전시회 광고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크리스티안의 허락 없이 만들어진 이 광고 영상은 한 빈민 계층의 소녀가 '더 스퀘어' 안에 들어가 폭발해 죽는 내용이다. 영상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전시회가 지닌 의미를 퇴색시킨다. 헌데 이 장면에는 독특한 부분이 있다. 위선에 당하는 존재는 빈민, 이민자 그리고 난민이다. 헌데 광고 속 소녀는 새하얀 피부에 금발을 지닌 북유럽 계통의 아이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기자도 한 마디를 한다. 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아닌 금발 소녀를 내세웠느냐고 말이다.
영상 속 폭발로 죽은 소녀는 스웨덴 그 자체다. 어린 소녀가 신뢰와 배려,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이야기하는 '더 스퀘어' 안에서 마치 폭탄테러에 당한 것처럼 죽었다는 것은 난민과 빈민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결국 그 문제는 스웨덴의 미래 세대에게 향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크리스티안이 위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신뢰와 배려를 말하는 전시회를 준비하지만 차별과 편견의 위선이 담긴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민자 건물에 뿌린 편지 때문에 한 이민자의 아들이 "도둑 취급 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그의 집에 찾아와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자,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그를 계단에서 밀어 넘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제대로 사과하기로 결심한다.
헌데 감독은 '화합'으로 끝낼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단절'로 마무리 짓는다. 현실이 변하지 않는데 영화가 행복을 말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더 스퀘어>의 역설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네모난 공간 안이 신뢰와 배려,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의미한다면 네모 밖은 불신과 욕심, 차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답게 크리스티안에게 최악의 하루를 선물하는 영화는 그 안에서 인간이 지닌 위선을 강하게 꼬집는다.
세계 최고의 복지와 이로 인해 행복 국가로 불리고 있는 스웨덴.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위선과 편견, 이로 인한 개인의 우울과 외면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는 난민과 빈곤 문제, 이를 바라보는 이중성과 편견을 예술을 통해 드러낸다. 이 영화가 왜 제70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지 영화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