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이 덮인 산속. 아버지는 총을 들고 사슴을 조준한다. 사슴을 조준하던 총구는 방향을 바꿔 딸을 향한다. 어린 딸은 사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얼굴에 근심을 품은 아버지는 딸에게서 총구를 떼지 못한다. <델마>의 이 오프닝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와 근심. 차마 딸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성애의 한계. 그리고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처럼 순수한 딸.
영화는 대학생이 된 델마(에일리 하보 분)가 겪는 발작 증세와 그녀의 유일한 친구 아냐(카야 윌킨스 분) 그리고 비밀을 간직한 아버지 트론드(헨릭 라파엘센 분),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델마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철저한 종교 생활 아래서 살아왔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건 물론 발작으로 문제를 겪는 그녀는 아냐를 만나 처음으로 감정적인 동화를 겪는다.
하지만 그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억압을 받는다. 그런 억압을 드러내는 소재가 뱀이다. 기독교에서 뱀은 죄악을 뜻한다. 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유는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후 순수성을 잃어버려 낙원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델마는 아냐와 만난 후 술과 욕설, 담배 등 세속적인 욕구를 취한다.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욕구는 애정이다. 가족과 만난 식사 장면에서 델마는 그 나이대 아이들이면 누구나 할 만한 남을 비꼬는 이야기를 하지만 아버지는 '넌 뭐가 그리 잘났느냐'는 식으로 받아치며 델마를 무안 준다. 델마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는 관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안부를 걱정해 전화를 걸지만 델마의 관심사나 취미, 즐거웠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런 부족한 애정과 관심을 델마는 아냐를 통해 충족시킨다. 문제는 델마의 이 감정이 우정 이상의 사랑을 향한다는 점이다. 델마가 아냐에게 욕망을 품을 때 뱀이 나타나고 뱀은 델마의 몸 속을 향한다. 부모에 의해 억압되었던 델마의 욕망은 뱀이란 존재를 통해 표출된다.
그렇다면 부모는 왜 델마를 종교를 통해 억압하려 드는 걸까. 이는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델마의 발작과 연관되어 있다. 델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자신의 발작이 가족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과거 델마의 할머니도 같은 증상을 앓았다. 그 능력은 자신이 마음속으로 품은 강한 욕망을 발현시키는 일종의 초능력이다. 델마의 부모는 발작을 억제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로 한다.
델마를 억압하는 소재는 기독교이지만 이런 억압을 시행하는 이는 부모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의식의 문제는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 칭한다는 데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면죄부 판매의 문제는 돈을 통해 인간의 죄를 지운다는 데 있었다. 중세와 근대의 기독교는 사회의 깊은 곳까지 영향을 뻗쳐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라는데 있었고 면죄부를 팔아 장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죄의식의 강요가 먹혔던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마음 속에 죄를 지었다는 의식이 자리 잡으면 불안이 싹튼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영혼을 잠식한다. 죄인이라는 명찰과 죄의식이란 생각에 갇힌 채 그 굴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델마는 타자가 보는 자신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인식하면서 불안과 잠식에서 벗어난다. 이 영화는 광과민성 증후군을 유발하는 빛의 효과를 사용하는데 이 깜빡거리는 빛은 눈의 깜빡임을 의미한다. 델마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이런 효과가 사용되는데 이때 델마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머무른다. 이 경계 속에서 델마는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감은 채 어둠이라는 불안 속으로 잠식당하느냐. 잠식은 부모의 영향력 속에서 종교와 약으로 자신의 능력을 억제하는 삶을 의미하고 눈을 뜨는 건 아냐와의 관계의 지속과 자유로운 캠퍼스 생활을 의미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델마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선택은 북유럽의 종교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북유럽의 경우 국민행복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복지의 영향도 있지만 종교적인 영향도 있다고 한다. 독실한 종교적인 행위를 어린 시절부터 익혔기에 이런 삶을 추구하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이다.
델마는 의미 없는 죄의식으로 자신을 불안과 고통에 잠식시키는 대신 자신을 바라본다. 그 안의 행복과 자아의 욕구를 실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런 델마의 변화는 성인 델마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도입부와 결말부에서 도드라지게 표현된다. 대학 광장을 보여주는 도입부의 부감 숏에서 관객들은 수많은 인파 속 델마의 모습을 찾지 못한다. 카메라가 그녀를 향할 때까지.
반면 결말부의 부감 숏은 델마에서 시작된다. 관객은 델마를 인식하고 그녀가 광장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델마>는 불안과 죄의식을 벗어나 진정한 자신이라는 자아를 찾아가는 델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라우더 댄 밤즈>로 국내에 마니아층을 형성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신작으로 잔잔함 속에 진한 공감을 주었던 전작과 달리 SF와 미스터리가 섞인 복합장르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작품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