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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결말이 유독 불쾌했던 이유

영화 <유전>


 개인적인 생각이다. <유전>은 근래 할리우드 공포 영화계가 얼마나 큰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컨저링> 이후 슬래셔와 좀비라는 정해진 틀에서 탈출한 할리우드 공포 영화는 이후 <겟 아웃>, <그것>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선사하였다. <유전>의 경우 신비적, 초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오컬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영화가 기존 오컬트 영화들보다 더 특별한 이유는 흥행공식이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식 정서의 기본인 가족 간의 관계를 기본에 깔면서 이 가족 관계를 완전히 뭉개버리는 정서적인 추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기자가 <유전>을 유독 불쾌하게 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족 간의 유대감과 사랑의 붕괴, 두 번째는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구성이 없는 이야기다.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경우 가족의 이야기를 다룰 때 그들 사이의 유대와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식들이 악령이 당하거나(<엑소시스트>) 부모가 악령에 점령당하고(<인시디어스>) 외부 존재가 가족을 위협한다.(<라이트 아웃>) 이런 존재들에 대항해 가족들은 힘을 합치거나 자기희생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이야기의 골격을 완성시킨다.       



헌데 <유전>은 충격적이게도 이런 '사랑'을 대변해야 될 가족이 오히려 이들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 애니의 어머니인 엘런은 죽으면서 편지를 남긴다. 그 편지에는 앞으로 애니 가족이 겪어야 될 고통과 고난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 어머니는 죽으면서 딸과 딸의 가족들에게 고통의 씨앗을 남긴다. 그리고 그 씨앗이 남게 된 이유는 애니가 어머니에게 품었던 연민과 사랑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애니 가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가족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하고 단란해 보인다.

애니가 아들 피터를 가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낳았다는 점이 문제로 작용하기 하지만, 이 문제는 딸 찰리의 죽음 전까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남편 스티브는 번듯한 직장인이고 애니 역시 미니어처를 만들며 자신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피터와 찰리 역시 학교생활에서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애니가 품은 불안과 우울함이 숨어 있다. 애니의 불안은 세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던 피터를 낳기 싫어했던 과거, 두 번째는 어린 시절 그녀의 가정사, 세 번째는 찰리의 양육 문제다.

애니의 오빠는 자살을 했고 아버지는 굶어죽었다. 이런 불행한 가정환경 속에서 애니는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품었고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찰리를 키울 환경이 되지 않자 찰리의 양육을 온전히 엘런에게 맡긴다. 이는 애니가 찰리에 대한 돌봐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연민을 품게 되는 이유가 되며 찰리의 죽음 때문에 피터를 더 몰아세우는 이유가 된다. 문제는 이런 애니의 불안을 어머니인 엘런이 이용했다는 점이다. 애니가 품었던 사랑과 연민은 어머니라는 가장 큰 사랑을 주어야 될 존재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진다.          


엘런은 다른 세계의 악마를 부활시키고자 숙주를 찾던 중 그 대상으로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정한다. 다만 그 조건이 연약한 남성이라는 점(영화에서 최종 숙주가 되는 피터의 경우 가족에 의해 철저하게 본인의 자아가 무너지고 결국 연약하고 텅 빈 껍데기로 남게 된다)에서 가족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다.(아버지의 아사와 오빠의 자살은 악마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자신들의 최종적인 의지라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애니가 이때의 아픈 기억 때문에 어머니와 척을 졌다면 그녀 가족은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애니가 찰리를 엘런에게 맡기면서 악몽은 시작된다. 엘런의 악마의 임시 숙주로 찰리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 간의 사랑과 유대의 붕괴는 2대에 걸쳐 발생한다. 첫 번째는 엘런과 애니 사이이고 두 번째는 애니와 피터 사이이다. 애니는 엘런과 엘런과 함께 악마를 숭배하는 이웃 조안의 계략에 의해 피터를 의심하고 몰아치다 결국 피터의 자아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다. 이 영화가 내게 불쾌했던 이유 중 두 번째는 여기서 온다. 이 작품에는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 사이의 줄다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 대한 설명은 <유전>과 비슷하다는 평을 듣는 <곡성>을 통해 해보고자 한다.

<곡성>의 경우 반동인물은 결말 때까지 드러나지 않으나 주동인물의 존재는 확실하다. 경찰 종구다. 그는 악령이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래서 관객은 <곡성>이라는 영화가 난해한 세계관을 지님에도 불구 종구에 이입되어 긴장감 있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가족 간의 사랑과 유대라는 뼈대가 기본이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종구가 주동인물, 종구의 딸에게 악령을 씌운(그리고 마을에 연쇄살인을 일으키는) 이들이 반동인물임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주동인물과 반동인물 사이의 갈등을 통해 흥미를 돋운다. 헌데 <유전>은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설명한 애니의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 피터를 지켜야 될 애니가 찰리에게 품은 동정과 죄책감의 감정 때문에 적극적인 주동인물로 행동하지 않는다. 결말부에 이르러 스티브를 통해 악령과 연관된 공책을 태우려 들지만 이전까지 적극적으로 반동인물과 갈등을 겪어야 될 주동인물이 이 역할에 소홀하다 보니 격렬한 사투를 통한 허무나 슬픔의 감정보다는 악마와 그 숭배자들에게 당한 한 가족의 불행과 고통이 불쾌하게 느껴진다. 이는 기존 헐리웃 공포 영화들이 선보였던 가족의 의미에 반대되는 지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 강하게 드는 감정이 아닌가 싶다.

특히 기자처럼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부모, 악령에 대한 공포에서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식들, 악령과 힘을 합쳐 사투를 벌이는 가족 간의 사랑과 유대의 전형적인 구조를 이 영화는 부정하는 걸 넘어 부셔버리고 있다. <유전>은 잔인하거나 답답한 등장인물의 선택이 아닌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라는 영화 속 문구처럼 정해진 운명처럼 흘러가는 가족의 붕괴가 불쾌하게 느껴졌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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