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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게 담아낸 폭력의 굴레와 구원의 가능성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폭력은 습자지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다. 폭력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며 강자에게 굴복하고 당하던 이가 약자를 괴롭히고 복종시키기도 한다. 이런 폭력의 순환은 끊이지 않고 쌓이고 쌓여 역사를 이룬다. 한 개인이 지닌 폭력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런 폭력의 역사를 끊기 위한 한 남성의 사투를 다룬다.

  

 조(호아킨 피닉스 분)는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과 참전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자살을 생각하는 그는 고위층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살인청부업자다. 조의 폭력의 역사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어린 시절 그는 피해자였다. 참전 당시에는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그리고 현재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그가 자살을 꿈꾸는 이유는 이런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다.

                


 상원의원의 딸 니나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지만 납치사건에는 그의 예상보다 더 큰 거물들이 연관되어 있다.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한 조는 니나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얼핏 내용만 보자면 <맨 온 파이어>가 연상된다. 소녀를 지키기 위한 분투와 뜨거운 감정이 흐를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정직한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웅담을 택하기 보다는 한 인물의 감정에 집중한다.

  

 그 핵심적인 소재가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쉴 틈 없이 행해지는 영화 속 폭력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조가 행하는 폭력은 결정적인 순간을 생략하거나 멀리서 보여준다. 잔혹한 폭력이 행해짐은 알 수 있으나 그 장면을 직접적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반면 조가 겪은 폭력은 선명하게 화면을 차지한다. 이는 가해자의 위치와 피해자의 위치에 따른 차이를 나타낸다. 피해자의 위치에서의 조는 폭력에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이 선명한 기억은 플래시백 형태로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가해자의 위치에서는 망각을 시도한다. 폭력을 행하는 과정은 명확하게 드러나나 결정적인 순간을 지워버리며 그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음을 보여준다. 그는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나 몸에 새겨진 역사를 지워내지 못한다. 그를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는 현재의 폭력에 대한 망각이다.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시백과 편집점에서 행위의 생략은 조가 지닌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다.

                


 조가 니나를 구하고자 결심한 이유는 사회가 지닌 폭력의 굴레의 단절을 의미한다. 제목 'You Were Never Really Here'은 폭력의 아픔을 겪은 소녀에게 전하는 목소리라고 본다. '너는 정말 여기에 있었던 적이 없다(한국 제목은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강한 부정을 통해 소녀가 지닌 폭력의 역사를 망각시키고자 한다. 다만 이는 소녀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 행위의 대상에는 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그에게 폭력의 역사는 굴레와 같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택한 방법은 구조이다. 소녀를 구해냄으로 자신을 구원받고자 한다. 이런 모습은 무기력함과 망상에 빠져들어 어린 창녀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에 접어드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를 연상시킨다. 다만 이 과정이 <레옹>이나 <맨 온 파이어>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멋'을 장착하지 않았다는 점이 관객이 느끼기에 재미가 부족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의 역사를 종식시키기 위한 나약한 사투'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을 만큼 조라는 캐릭터는 강렬함과 거리가 멀다. <이민자>에서 손가락 하나의 떨림에서도 내면의 불안과 나약을 표현했던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작품에서도 외적인 강력함과는 다른 내적인 불안과 나약을 보여준다. 


                


 <택시 드라이버>는 베트남전이라는 사회적인 배경이 트래비스의 캐릭터성을 확실히 심어준 반면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런 지점이 부족하다. 이는 불친절한 진행과 잦은 플래시백의 활용이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플래시백의 편집을 짧게 진행하면서 속도감을 입혔지만 과거와 현재가 병행되는 내용이 아님에도 잦은 사용으로 몰입도를 감소시킨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다 보니 이야기 전개가 부드럽지 못하다.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기보다 관객이 조각을 찾아 껴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하니 피로감이 짙다. 익숙한 사회적인 배경과 이로 인한 영향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트래비스와 달리 조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캐릭터를 설명하다 보니 핵심적인 주제를 잡아내는데 힘이 든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과 폭력에 대한 고찰, 어두운 영화의 색채는 관객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다만 <레옹> <맨 온 파이어> 같은 상처 입은 남자와 소녀의 관계를 그린 할리우드식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실망을 느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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